소설리스트

126화 (126/232)

황혼단

***

둘은 큰 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는데, 객잔의 누구도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여기. 소채는 언제 나오나?”

“술 한 병 추가!”

한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점소이가 분주하게 주문을 처리하고 있었다.

“예이! 갑니다요~.”

호충과 왕호도 그런 주변의 상황이 당연하다는 듯이 여겼다. 누가 듣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무림맹에서 있었던 일을 나누고 있었다.

방금까지 왕호를 칭찬하던 호충은 고개를 저으며 왕호의 말을 지적했다.

“저런···. 의제는 왜 항상 반만 맞추는지 모르겠어. 지존이라니···.”

둘의 걸음은 거리낌 없이 객잔을 지나 별채에 다다랐다.

“···아니시옵니까?”

왕호는 무림의 지존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자신의 대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호충은 왕호가 별채의 문을 닫는 것을 보며 말했다.

“이미 나는 흑림의 지존이잖아. 크하하.”

“아. 듣고 보니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이미 지존이신데 어찌 또 지존이 되시겠습니까. 하하하.”

“그보다는 흑림이라는 말의 어감이 정말 좋아. 왕호가 맡은 방의 이름을 정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정할 수 있었어. 흑림방. 이제 왕호 너는 흑림방의 방주다.”

“흑림방···. 감사합니다. 문주님.”

“푸흐흐. 오늘 저들은 하오문이 가진 비급을 탈취하려 대대적으로 쳐들어 올 것이다.”

“헌데···. 어찌 저들에게 경고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본래 헛짓을 하면 비급 사본을 중원 무림에 풀겠다는 경고를 남기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문파의 비급을 무상으로 중원에 풀면 우린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 잔돈 몇 푼을 받고 팔기야 하겠지만, 그 대가로 하오문은 모든 문파를 적대해야 할 것이야. 차라리 이들의 초기 공격을 감당하는 편이 낫다.”

“···문도들을 준비시키지요.”

호충과 왕호가 머무는 허름한 객잔은 하오문의 것이었다. 이미 객잔 주변에는 문도들이 포진해있었다.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객잔에 방문한 손님들까지 전부 하오문의 문도였다.

“손님도 준비시키겠습니다. 급하게 부르면 다 올지 모르겠습니다.”

“다 올 것이다. 그들은 머리 회전이 빠르니까.”

손님 모두가 하오문의 문도일 것인데, 왕호는 다른 손님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호충도 새로운 손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일이라 다른 일을 지시했다.

“문도들에게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아낌없이 풀어내도 좋다고 전하라.”

“!”

“그간 숨기느라 고생했다는 말도 꼭 전하고.”

“벌써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문주님.”

“우리 문도들도 같은 마음이겠지.”

“하하하. 물론이지요. 녀석들이 기뻐 날뛸 것입니다.”

“마음껏 날뛰어 놀아라. 너 또한 마찬가지다.”

“아까 결착을 보지 못한 두 놈에게 흑패의 맛을 보이겠습니다.”

“쓰디쓰겠군.”

“몸에 좋은 약이니 써도 어쩔 수 없지요.”

“하하하. 왕호는 이제 혓바닥까지 고수가 되었구나. 하지만 네가 녀석들을 상대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지. 그래도 이건 받아가라.”

호충은 왕호를 위해 준비했던 마지막 선물을 꺼냈다.

“벌써 이제 이걸 줄 때가 되었다니···.”

“······.”

왕호가 받은 것은 거무튀튀한 물건이었는데, 팔목에 착용하는 철제 보호대였다.

“아직 네가 대월천룡권이 극성에 이르지 않아 날카로운 무기에 취약하다. 검의 고수를 상대할 때 필요할 것이다.”

“···충.”

왕호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을 챙겨주는 호충에게 묵직하게 포권지례를 보이며 물러났다.

.

.

.

왕호는 밝은 얼굴로 포권하며 별채를 나섰고, 소란했던 객잔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왕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신호였다.

“오늘 밤 무림맹의 공격이 시작된다.”

“······.”

분주했던 이들이 모두 행동을 멈췄고, 왕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대로 휘저어도 좋다는 문주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소채를 주문했던 손님은 젓가락을 내려놨다.

탁.

술을 주문했던 손님도 술병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텅.

저마다 하던 일을 멈췄고 곧 객잔 내의 모든 이들의 눈이 한쪽으로 몰렸다. 하오문의 문도들은 방금 문주의 명을 전한 왕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바로 이들에게 요리와 술을 나르던 점소이가 이들의 관심을 차지했다.

“흐흐.”

팡팡.

손님이 어지럽힌 객잔 식탁을 치우던 점소이는 하얀 명주 수건을 털어 어깨에 걸치며 천천히 허리를 폈다. 구부정했던 허리를 펴고 당당함을 되찾았다. 실실 웃던 표정을 굳히자 흉신악살 같은 그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눈이 점소이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왕 방주님 말씀 들었지?”

점소이의 말에 단단한 답이 들려온다.

“예! 단주님!”

“황혼단은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가장 하잘 것 없어 보였던 객잔의 점소이가 하오문의 무력부대인 황혼단을 이끌고 있었다. 단주가 점소이를 맡은 것은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기 위한 최적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위 단주님. 명을 내려주십시오.””

호충이 연안에서 거두었던 연위 흑패의 패주 위지승이 하오문의 단을 이끄는 단주였다. 위지승은 몸을 돌려 왕호에게 먼저 물었다.

“왕 방주님. 문주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문주님이 따로 지시하지 않으셨지만···.”

왕호 본인의 생각이 있었다.

“쉬이 무림인들의 목숨을 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무림의 은원은 흑패의 은원이나 마찬가지다. 기필코 원수를 갚으려 하지. 시작부터 은원을 만들면 하오문에 좋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이다. 이는 내 생각일 뿐이니 선택은 황혼단의 위 단주에게 맡기겠다.”

오늘 무림맹에서도 호충이 문을 지키는 무사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주도 함부로 살행을 결정할 수 없었으니, 하오문의 문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옳으신 판단이십니다. 처음으로 하오문의 무력이 무림에 드러나는 일인데 함부로 피를 볼 수야 없지요. 피를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상대할 자신이 있고요. 하하.”

왕호는 이들과 합류하여 무림맹의 공격을 준비하려다가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문주님의 중요한 말씀이 있었는데, 전한다는 걸 깜빡했군.”

“예. 방주님. 말씀하십시오.”

“앞으로 하오문의 무력을 맡은 여명단, 황혼단은 흑림방 아래 존재할 것이다.”

드디어 무력을 담당하는 자신들의 방명이 결정된 것이다. 객잔 안에는 황혼단, 밖에는 여명단이 대기 중이었다.

“흑림방···.”

새벽을 가리키는 여명단과 노을을 칭하는 황혼단의 가운데에는 깊은 밤이 존재했다. 양쪽에 여명과 황혼을 둔 깊은 어둠의 방이니 흑림방이라는 명칭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되새길수록 좋은 이름이었다.

“하하. 감축 드립니다. 흑림방주님.”

위 단주를 포함한 황혼단 단원들은 저마다 흑림방이라는 이름을 마음속에 간직했다.

“자아. 남은 것은 손님맞이로군. 위 단주는 녀석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방진을 만들고, 단원들은 녀석들에게 최대한 고통을 줄 수 있는 초식을 생각해둬라.”

“예! 방주님!”

위지승은 몸을 돌려 단원들을 돌아봤다. 단주로서 당원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었다.

“오늘 전투에서 밀리는 놈이 있다면···.”

그리고 태연하게 무시무시한 말을 전했다.

“녀석들의 피 대신 그 놈의 피를 보고야 말 것이다.”

“···예! 단주님.”

무림맹을 상대로 밀린다는 예상은 아예 하지도 않는 것이다.

위지승의 말에 왕호도 나섰다.

“나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군.”

왕호 자신도 다치지 말라며 흑주(黑紬)를 선물해주지 않으셨던가. 왕호는 호충이 선물한 물건에 이미 이름까지 붙여두고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왕 방주님. 방주님까지 나서실 것은···.”

위지승의 명령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말을 덧붙였다.

“문주님이 처음으로 흑림방에 내리신 명이신데 감히 다쳐? 다치거든 스스로 자진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방주님.”

.

.

.

분주한 밖의 움직임을 느낀 호충은 작은 기대감을 드러냈다.

“부디 늦지 말고 오시오. 우리 문도들이 그대들의 방문을 무척 기다리고 있으니···.”

***

일단의 무리들이 이동 중이었다. 맨 앞에 선 인물은 진가장의 진호현이고 나머지는 이번 작전에 함께하기로 한 무림맹의 거두들이었다. 호현을 앞에 세우긴 했지만, 얼굴만 앞세웠을 뿐이다. 각 세가와 문파는 저마다 명령체계를 놓지 않고 있었다.

사사로이 호현의 외할아버지인 모용태가 앞에 선 호현을 향해 편히 말했다.

“어차피 뒷골목 아랫것들이 모여 이룬 문파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녀석들은 괜찮지만 문주와 문주의 호위가 걱정입니다.”

모용태가 서문진과 합격을 행했음에도 하오문주의 호위무사를 당해내지 못하지 않았겠는가.

“큼. 아까는 쉬이 살수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신 무공을 전부 펼쳐내면 제깟 놈이 어찌 버티겠느냐.”

“그 둘만 제대로 붙들어두면 나머지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호현은 다시 하오문의 둘을 맡기고자 꺼낸 말인데, 모용태는 다시 붙고 싶지 않았다. 호위무사의 무공 수위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황가와 연을 맺을 것인데 추태를 보일 수는 없지.’

모용태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이를 찾았다.

“이번엔 소림의 방장께서 상대하시는 편이 어떻소?”

“!”

“본래 서문가와 모용가가 나섰던 것도 소림의 방장께 함부로 대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

소림사의 방장인 석영(釋永)을 향해 땡중이라고 칭하며 함부로 말했던 하오문주였다. 이를 꼬투리 잡아 하오문주를 찍어 누르려고 했고, 거창하게 실패를 가져왔다. 하지만 땡중이라는 말 때문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절정에 이른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을 뿐이다.

“소림의 절기를 극성으로 익히신 방장이시라면 두 놈을 단 번에 제압하실 수 있겠지요.”

“···내가 나설 것도 없는 일. 소림의 나한들이 녀석들을 상대할 것이오.”

모용태는 석영이 발을 빼도 상관없었다. 자신만 아니라면 누가 상대해도 좋을 일이다.

“소림의 나한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당연하오.”

‘소림의 나한들이 둘의 힘만 빼놔도 상대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한들이 이긴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모인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세가의 가주와 문파의 문주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을 따르는 일대 제자들이 있었다. 또한 그 이하의 고수급 무사들까지 포함하면 물경 이백을 훌쩍 넘는 숫자였다. 어지간한 대형 문파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전력이었다. 이런 전력으로 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가주님. 이 골목을 넘어가면 녀석들이 머무는 객잔이-”

진가장의 무사 하나가 곧 도착할 목적지를 설명하려 했는데, 어둠 속에서 작은 돌이 하나 날아왔다.

따악.

“끅.”

살상력이 없는 수준의 작은 공격이었지만, 기습은 기습이었다. 호현은 주변을 향해 급히 소리쳤다.

“모두 경계하십시오! 녀석들이 우리가 온 것을 안 모양입니다!”

“겁이 많은 놈들이었군. 하지만 돌팔매라니···. 크하하. 우습지 않소.”

서문진은 너무나 가벼운 기습에 위기감을 느낄 수도 없었다. 돌에 맞은 무인도 맞은 부위를 손으로 문지른 것으로 끝이었다.

“녀석이 하오문에 알릴 수도 있으니 어서 잡아야 합니다.”

“서문가에서 잡아 오겠소. 가자!”

서문세가의 무인들이 돌이 날아온 방향으로 향해 뛰었다.

일행은 서문세가의 무인들이 골목으로 사라지자마자 다른 기습을 받았다.

챙.

이번엔 단검이었다. 진호현은 느릿하게 날아온 단검을 쳐낼 수 있었지만, 작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 놈은 종남에서 맡지요!”

“잠깐···.”

종남파의 장문인 종무는 진호현이 말릴 사이도 없이 제자들과 함께 단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뛰었다. 이어진 공격은 조금 더 본격적이었다.

“우리 일행 뒤에서 일단의 무리가 접근하고 있소!”

“몇이나 됩니까!”

“···둘이오.”

“둘? 혹시 하오문의 문주와 호위무사?”

진호현은 가장 강한 둘을 떠올렸지만, 기대를 무너트리는 답이 돌아왔다.

“점소이 복장의 늙은이와 깡마른 거지요.”

“···녀석들은-”

“악가장에서 맡지요.”

“혹시 모르니 전력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하하하. 진가주는 염려 말고 객잔으로 향하시오. 저 두 놈을 끌고 곧 합류할 터이니.”

“······.”

하오문을 제대로 도모하기도 전에 전력이 분산되고 있었다.

‘···전력을 분산해도 우린 강하다.’

진호현 자신부터 하오문을 경시하고 있었다.

‘우리가 강한 것이 아니라 녀석들이 약한 것이지.’

아무리 자신들의 전력을 분산해도 하오문이 자신들을 막아낼 방법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객잔으로 빠르게 진입하겠습니다!!”

무림맹 일행은 서문세가와 종남파, 악가장을 제외하고 객잔으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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