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전장
***
무림인 수준으로 무공을 익히진 않았으나, 보는 눈 하나만큼은 고수와 비슷하다 자신하는 이들이었다. 다른 상단과 전장도 화산파의 도인들이 어떤 검공을 사용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동감하는 바였다.
“아무래도 진가장은 화산의 비급을 손에 넣었던 모양이오. 화산이 지금까지 선보인 검공과 비슷하지만, 더 뛰어나 보이오.”
“향후 화산파에서 진가장을 두고 보지 않겠군.”
“화산파에 비급이 없다면 더욱 날뛸 것이오.”
“하오문에 화산파의 진산절기가 있다면 더욱 문제입니다. 하오문에서 화산파의 비급을 넘기면 진가장이 화신의 검을 익혔다는 것을 좌시할 수 없을 것이오.”
“화산파에서 실전한 비급을 숨기고 있다면···. 이라는 가정도 필요하겠지요.”
화산이 비급을 갖고 있어도 갖고 있지 않아도 결론은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진가주는 화산의 검을 쓰지 못하게 되겠구려.”
주변에 숨긴다고 숨겼으나, 멀리서 이곳만 주시하는 이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음이다.
“애초에 타 문파의 비급을 익힌 것부터가 문제일 것이오. 진가장에서 설마 화산파의 비급임을 몰랐겠소.”
“···한참 전부터 진가장이 화산파에 공을 들이고 있어 이상타 여겼는데, 결국 화산의 무공을 진가장의 소유로 만들고자 했음이로군.”
이들은 진가장의 움직임도 모두 알고 있었다. 중원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한 이들이 바로 상단과 전장이었다. 마교의 행사부터 무림의 두 거대 세력이 무림맹으로 발족하는 정보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찌 이들이 짐작하지 못하겠는가.
“잡담은 여기까지 합시다. 끝이 보이는 듯하니 우리가 나서야 할 때가 된 것 같소.”
“허허. 진가주가 저렇게 형편없이 밀릴 줄이야.”
“저, 저! 이제 정말 말려야 하지 않겠소?”
왕호는 진호현을 쉽게 이길 수 있음에도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었다. 바로 이 시간을 위함이었다.
까앙.
힘없이 휘둘러지던 진호현의 검은 왕호가 내려진 팔에 두 동강이 나버렸다. 단단한 흑주에 부딪친 것이다.
타악.
진호현이 부러진 칼에 황망해하고 있을 때 왕호의 팔이 옷깃을 잡아챘다.
“드디어 왕건이를 잡았구나.”
오랜 수련으로 두터워진 왕호의 팔뚝은 어깨부터 뒤로 한껏 당겨졌다가 앞으로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퍼어억!
한번 주먹이 발출 될 때마다 진호현의 고개는 뽑힐 듯이 뒤로 젖혀졌다.
“쿨럭.”
진호현의 입 안이 터지며 핏방울이 비산했다.
빠악. 빡!
주먹만이 아니었다. 왕호는 팔꿈치와 머리, 무릎을 가리지 않고 아낌없이 대월천룡권의 고(柧)를 쏟아 부었다.
퍼버버벅.
천룡출두(天龍出頭)까지 완벽했다.
“바로 이거지. 이게 바로 나의 주먹이고 나의 무공이다.”
“크흑···. 지금이라도 물러선다면 험한 꼴은 보지 않을 것이다.”
진호현은 그토록 얻어맞았지만, 아직까지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 승패는 오늘이 아니라 향후 무림 주요세력의 입을 통해 결정되리라 믿고 있었다.
“오호. 여전히 입은 살았군.”
“···너희는 아무도 죽이지 않더구나. 우리가 두려웠겠지.”
왕호는 주변을 돌아보며 대부분 정리가 끝났음을 확인했다. 상대를 죽이지는 않았으나, 어디 한군데 부러지지 않은 놈은 찾기 어려웠다.
“끄아악. 내 다리!”
“안 뒈졌으면 됐지···. 이 새끼는 엄살이 좀 심하네.”
“끄윽. 끅.”
“···지금 우냐? 울긴 왜 울어. 이제 시작인데.”
“아악! 살려줘!”
“안 죽어 새끼야!”
죽이지 않되, 최대한 고통을 주고자 했던 의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우리도 정파 무림의 일원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그대들이 무도한 짓을 해도 우리까지 그래선 안 되는 일이지.”
“끄읍···. 너희가 이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일이 잘 풀릴 것 같으냐?”
오늘의 패배는 무림의 핵심 세력의 힘으로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었다. 협의맹과 정무맹의 핵심 문파가 한 목소리로 하오문을 성토한다면 무림맹의 다른 문파들은 믿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오문은 예고도 없이 무림맹을 공격한 사파의 일원이 될 것이다. 무림맹의 창설에 위기감을 느낀 마교의 일원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
“크흐흐. 무림맹 휘하의 모든 방파는 하오문을 적대하고 천라지망을 펼쳐 쫓을 것이다. 앞으로 너희는 무림의 공적이다.”
“······.”
왕호는 옆에서 다가오는 인물들의 면면을 확인하고 잡았던 진호현의 옷깃을 놓아버렸다. 그 바람에 진호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여전히 눈빛이 살아 있었다.
“이제 슬슬 감이 오느냐?”
“감은 네가 찾아야겠구나.”
‘내가 괜히 힘을 조절했을까···.’
왕호는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진호현을 상대한 것이다. 왕호는 다가오는 이들에게 몸을 돌려 예의를 갖췄다.
“하오문의 왕 모가 황금전장의 장주님을 뵈옵니다.”
“!”
진호현은 한 눈에 상대를 알아봤다.
‘황금전장의 황금석이 여길 왜!’
“어허···. 이 자리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소.”
황금전장의 장주는 주변에 많은 이들보다 먼저 인사를 받은 것으로 모자라 혼자만 인사를 받아 난감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왕호는 다른 이들의 면면을 보면서도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아직 눈이 어두워 높으신 상단의 상단주님들과 전장의 장주님들을 다 알지 못합니다.”
“허허. 우리야 황 장주처럼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황금전장의 황금석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왕호는 그가 입고 있는 휘황찬란한 금빛 장포로 알아볼 수 있었음이다. 나머지는 안면도 없었고, 숫자도 너무 많았다. 중원의 상단들 중에 이름이 알려진 곳은 대부분 이번 초청에 응했고, 전장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얼굴을 좀 드러내야 하나보오.”
“그러다 칼이나 맞겠지요. 우린 전처럼 조용히 삽시다.”
“나야 상단주님 대신 왔는데 뭘···.”
‘어째서 저들이···.’
‘함정이야. 하오문이 함정을 파두었어!’
이들의 등장에 무림의 인사들은 똥 씹은 얼굴을 했다. 저마다 진호현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황금전장의 황금석은 이들의 얼굴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황금전장은 대부분의 무림방파와 연을 맺고 있었고 그 인연은 현 장문인이나 가주가 아닌 전대와 전전대에 걸쳐 있었다. 전장은 무림의 배분에 구애받지 않으나, 이들에겐 부친과 전대 가주의 친우나 다름없는 위치인 것이다.
“전대 가주와 전대 장문인이 지금 그대들의 행태를 보면 대체 뭐라 하겠는가! 의(義)를 숭상하고 정도(正道)을 행한다는 그대들이 오히려 사파보다 못한 행태를 보였음이다! 헌데 어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느냐! 그대의 사조들이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일이 아닌가!”
무림의 중요인물들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무림에서 체면은 목숨과 같았다. 오늘 하오문을 상대로 크게 패배한 것으로 모자라 일의 시작도 정의롭지 않았으니, 앞으로 무림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터였다.
황금석은 정파 무림인들을 크게 꾸짖고 나서 왕호에게 포권하며 허리를 굽혔다.
“부덕한 이들의 행동에도 자비를 보인 하오문의 행사에 깊이 감읍하는 바입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누구나 욕심이 동할 수 있음입니다. 비급의 가치가 그만큼 대단했던 탓이지요.”
“허면···.”
“하지만···. 이들의 행동을 그에 합당한 벌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부디 이들을 용서하라는 말씀만 하지 말아주십시오.”
수월하게 일이 풀리나 싶었는데, 말문이 막혀버렸다. 하오문은 이들을 쉬이 용서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들을 모두 모아라. 문주님께서 이들의 처분을 결정하실 것이다.”
“예! 방주님.”
전장과 상단의 주인들은 하오문의 행사를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무림의 거대문파들을 상대한 이들의 행사를 어찌 막겠는가.
***
호충이 머무는 별채 앞에 무림의 주요 인물들이 꿇어앉았다.
끼이익.
호충 문을 열고 나왔고, 가장 먼저 왕호를 찾았다.
“왕 방주.”
“예. 문주님.”
“우리 문도들이 상하지는 않았는가.”
“다행히 다친 이는 없었습니다.”
무림의 고수들이 대거 침입하였음에도 경상자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막아낸 것이다.
“저들의 체면이 크게 상했겠어. 아픈 시늉이라도 할 것이지···.”
“앞으로는 그도 고려하겠습니다.”
“손님들부터 자리에 모시게.”
“어떤 손님을 이르심 이옵니까.”
“당연히···.”
설마 무림의 인사들을 지칭하는 말이겠는가.
호충이 지칭하는 손님은 선한 마음으로 이곳에 온 상단주들과 전장의 장주들이었다.
“저분들이지.”
“아. 예. 문주님.”
호충은 하오문주로 이들을 맞이했다. 급하게 의자와 탁자가 옮겨졌다. 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좋지 못한 일로 뵈었지만, 이렇게라도 얼굴을 맞대니 반갑습니다.”
“흠. 황금전장의 황금석이오.”
“어이쿠. 황 장주님. 저는 송재호라고 합니다. 하오문이라는 작은 문파를 일으켜 문주를 맡고 있지요. 별 볼일 없는 흑패를 주축으로 성장한 하오문이라 급히 초청하기 민망했습니다. 헌데 이렇게 많이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
그 작은 문파는 오늘 무림의 거대 문파를 모조리 집어 삼켰다.
“다들 앉으시지요. 황망한 일을 겪은 터라 대접이 소홀합니다.”
호충은 꿇어앉은 이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이들을 대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뭣들 하느냐. 어서 다과를 준비하라.”
호충은 귀빈을 대접하듯이 예를 다했는데 대접을 받는 이들은 좌불안석이었다. 황금석도 같은 마음이었다. 무림인들에게 큰 소리를 치긴 했으나, 저리 대접받을 이들이 아니었다.
“아. 송 문주. 아직 저들이···.”
무림맹의 인물들은 바닥에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제대로 얻어터져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탓이다. 상단주와 장주들이 어찌 이들을 두고 편히 차를 마시고 다과를 들 수 있겠는가. 황금석이 대표로 먼저 이 점을 지적하자 호충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하하. 장주님은 마음도 넓으십니다. 여봐라.”
“예. 문주님.”
“손님들이 보기 흉하다고 하시니, 녀석들이 보이지 않도록 똥통에 박아 놓아라.”
“!!”
“!!”
“!!”
손님들이 놀라건 말건 왕호는 굳게 답하고 행동했다.
“예! 문주님. 다들 끌고 가라! 뒷간이 부족하면 다른 집 뒷간이라도 빌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오문의 문도들은 정말 아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뒷간으로 끌고 갔다.
“자, 잠시만! 송 문주. 수하들에게 잠시 멈추라 해주시오.”
호충은 황금석의 말을 곧장 실행으로 옮겼다.
“예. 황 장주님. 여봐라. 잠시 멈춰라!”
‘···하오문은 상단과 전장에 뜻을 두고 있는가. 어찌 무림의 세력보다 우리를 대우하는가.’
무림인들을 무시하면서도 자신들의 뜻은 바로바로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하오문을 개파하고 오래되지 않아서인가? 아직 하오문주는 어리숙하구나.’
“저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충분히 깨닫지 않았겠소. 이쯤에서 용서하시는 것이···.”
“물론 그렇기야 하겠습니다만, 아직 저들은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똥통에 처박혀봐야 체면이고 뭐고 사죄할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황금석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무림의 인사들에게 소리쳤다.
“대체 뭣들 하는가! 아직도 그대들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나마 멀쩡하다고 할 수 있는 진호현이 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럼 뭘 망설이는가! 오늘 그대들이 잘못한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는가!”
“······.”
“······.”
“······.”
무림의 인사들도 그제야 하나씩 깨닫기 시작했다.
‘오늘 크게 체면이 상하겠구나. 돌이킬 방법이 없다.’
입막음을 하고 싶어도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저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갈! 아직도 머리를 굴리는가!”
진호현은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상책임을 깨달았다.
“송 문주님. 오늘 무림의 행사가 의(義)에 기반하지 않았음을 통감합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그릇된 결정을 하였으나, 이는 잠시간의 실수일 뿐. 부디 선처를 바라는 바입니다.”
“······.”
호충은 고개만 살짝 돌려 고개를 숙인 진호현의 정수리를 노려봤다.
“듣자하니 하오문을 마교와 결탁한 세력으로 몰고 가려 했다지요?”
“······.”
“무림맹에 속한 모든 방파를 동원해 천라지망을 펼치겠다는 말씀도 들었지요. 무림공적? 기가차서 정말.”
“······.”
“실전된 비급들을 찾고 돌려주려 찾아온 선한 손님을 이리 대해놓고 그저 잠시간의 실수일 뿐이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저 선처를 바란다? 대체 이런 사과는 누구에게 배웠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