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
***
“그렇다면 하오문은 저들이 저지른 무도한 짓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용서해야 옳습니까?”
“······.”
“······.”
“······.”
누구보다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 좋아하는 상단과 전장의 인물들이었다. 대가를 바라는 하오문주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고 또한 크게 공감하고 있었다.
“송 문주의 생각이 옳소. 승리한 자는 전리품을 챙길 자격이 있으니···.”
한 상단주가 물꼬를 트자 저마다 자신의 말을 시작했다.
“사실 하오문에서 저들을 죽여도 할 말이 없을 일이 아니오?”
“하지만 하오문은 그 와중에 아무도 죽이지 않았소. 그렇다면 최소한 성의는 보여야 옳지 않겠소.”
삼도상단의 지부장 자격으로 따라온 인물은 상단의 인물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냈다.
“이백만 냥은 받아야 옳을 것이오.”
“그렇지! 그것도 최소일 것이오.”
“하오문이 가진 비급의 가치가 겨우 그것밖에 안 되겠소? 나 같으면 오백만 냥을 부르리다.”
처음 실제적인 돈을 입에 올렸던 삼도상단은 그 다음부터 말없이 듣기만 했다.
이들의 말을 듣던 호충이 다시 진호현과 무림의 인사들을 향해 물었다.
“자. 진가주. 사과는 그에 걸 맞는 선물과 함께 했을 때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답니다. 무림의 지주들께서는 하오문에 얼마나 성의를 보여줄 것이오?”
“···자, 잠시 논의가 필요합니다. 진씨 세가만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뜻대로 하시오. 하지만 성의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흑패의 법대로 처리하리다.”
황금석은 흑패의 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물었다.
“송 문주. 흑패에선 보통 어찌 처리하시오.”
“은화 한 닢에 손가락 마디 하나입니다. 저들은 그나마 무림에 명망이 있으니, 금화 한 닢으로 하지요.”
“!”
황금석도 뒷골목의 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흑패가 운영하는 도박장에서 단지(斷指)를 당하는 이들이 종종 생긴다고 했었지···.’
“······.”
금화 백 개만 해도 손가락과 발가락 마디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며, 금화 천 개면 온 몸이 온전치 못할 것이다. 이어진 하오문주의 말은 황금석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보통 손가락 두 마디만 잘라도 마누라와 자식까지 팔아먹더이다. 저들은 얼마나 버틸지 무척 기대가 큽니다. 하하하.”
“······.”
황금석은 자신을 향해 천진난만하게 웃는 하오문의 문주가 더 이상 어리숙해 보이지 않았다.
‘잔인한 자였구나. 웃으며 사람을 죽일 자로다.’
“여봐라! 소작두를 대령해라.”
“!”
황금석은 하오문주의 명령에 문도들이 들고 오는 작은 작두가 피를 가득 머금은 듯이 보였다.
‘저 작두에 묻힌 피가 대체 얼마나 많단 말인가.’
진호현은 약재를 써는 작은 작두가 보이자 다급하게 하오문주를 찾았다.
“송 문주! 시간을 주기로 하지 않으셨소!!”
“어차피 그대들이 보일 성의는 각각이지 않겠는가. 하나씩 나와서 작두에 손가락을 올리고 성의를 입에 올려라. 마음에 들지 않는 만큼만 자를 것이다.”
“······.”
‘모든 것이 놈의 뜻에 달려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성에 차지 않는다며 손가락을 자를 수 있음이다.
“송 문주. 방금 논의가 끝났으니, 저희 말을 먼저 들어주십시오.”
“거참. 말 많네. 손가락 마디 몇 개만 자른다는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멀쩡한 사람의 손가락 마디를 자른다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지금까지 너희가 검(劍)과 도(刀)로 자른 팔 다리와 떼어낸 목의 주인은 놀라지 않았겠느냐?”
“······.”
양민들은 무림인을 마주하면 횡액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피해 다니는 실정이었다. 왜 양민들이 무림인을 두려워할까. 무림에서 상승 무공이 사라졌다고 해서 무림인들의 잔인한 면모가 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림인은 양민들을 상대로 무공을 사용하지 말아야 했으나, 걸핏하면 칼을 휘둘렀고, 이에 목숨을 잃은 이가 한 둘이 아니었다. 특히 하오문에 속하는 흑패는 양민이라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반쯤은 무림에 속했다고 할 수 있으니, 무림의 인사들은 이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지금은 너희가 양민과 하층민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다. 본래 무림이라고 하는 곳은 강자가 모든 것을 갖고 약자가 다 잃는 곳이니, 너희는 지금 약자라는 사실을 뼛속까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도 그에 도움을 주고자 너희 손가락 마디 몇 개만 자르겠다는 것이야. 훗날 비어있는 손가락 마디를 보면서 항상 오늘을 떠올리라고 말이야.”
“······.”
‘애초에 무림인의 손가락을 자를 각오였구나.’
이젠 성의로 만족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이백만 냥! 우리의 성의를 모아 하오문에 드리겠소!”
“너부터 할까?”
진호현 곁에 있던 당세천이 입을 열었다.
“이백오십.”
“오. 당 가주. 오십 더 쓰셨소? 내 특별히 세 마디만 자르리다. 손가락 하나 없다고 사는데 지장은 없을 것이오.”
정신을 차린 소림의 석영도 입을 열었다.
“사, 삼백!”
“방장. 소림이 너무 짜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소. 아까 날 가리키던 방장의 검지가 무척 탐이 난다오.”
소림의 석영이 얼른 자신의 손가락을 감추는 사이 모용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백. 그 이상은 우리에게 무리요. 없는 것을 더 줄 수는 없지 않겠소.”
“큭. 사백만 냥이면 그럭저럭 오늘 고생한 값은 나오는구려.”
“후우···.”
“후우···.”
“후우···.”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황금석은 하오문주의 심리전을 읽고 있었다.
‘상대를 벼랑 끝까지 몰아넣고 협상에 임했으니, 어찌 실패가 있겠는가.’
무림의 인사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터에서 춤을 춘 광대에 지나지 않았다. 상단주와 장주들도 모두 하오문주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뭣들 하시오? 지금 느긋할 때요?”
호충은 이들을 더욱 다그쳤다.
“성의를 말로만 보이면 끝입니까? 내 손에 아무것도 없는데?”
호충은 빈손을 들여 보였다. 지금 당장 돈을 가져오라는 말이었다. 호현을 비롯한 무림의 인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큰돈을 갑자기 어떻게 만들어 오겠습니까. 모두 전장에 맡겨 두었으니···.”
“그게 뭐가 문제요? 여기 중원의 내로라하는 전장의 주인들이 있는데.”
황금석은 오늘따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다. 폭풍처럼 일을 진행시키는 하오문주 때문이었다.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이유가 또 있었구나.’
전장의 장주들을 급하게 초청한 이유가 무림의 행사를 보고 증인이 되어 달라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일이 끝난 이후의 급전 수급까지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장주님들 그리고 상단주님들. 이들이 급전이 필요하다고 하니 나머지는 알아서 챙기시지요. 이렇게 좋은 기회는 또 오지 않을 것입니다.”
“······.”
“······.”
“······.”
‘앞으로 우린 저들의 행사를 지켜본 일 때문에 앞으로 무림 방파와 마주하기 껄끄러웠을 것인데···.’
이번에 급전을 빌려주면 껄끄러운 일을 덮고 금전적 이해관계가 새로이 정립되는 셈이었다. 전장은 무림 방파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거액의 자금을 융통하며 이자까지 받을 수 있게 되니 나쁠 일이 없었다. 주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횡액을 당한 무림인들이 있어 차마 소리 내어 웃지 못 할 뿐. 상단주와 장주들의 얼굴 표정은 희색이 만연했다.
‘하오문주의 심계가 이렇게 깊을 줄이야···. 실로 두려울 지경이군.’
황금석은 황금전장을 중원 제일의 전장으로 성장시키며 많은 이들을 만나왔다. 거대 무림 방파의 문주와 세가의 가주들은 물론이고 관부의 인물들까지 두루 만나며 수많은 인간군상을 접해왔다. 그 사이에 하오문주와 같이 깊은 심계를 지닌 인물이 없었겠는가.
‘그들과는 또 달라. 크게 다르다.’
하오문주의 심계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오문의 문도들은 무림의 최정예를 단일 세력으로 완벽하게 꿇어 앉혔다. 이는 과거의 마교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 심계에 실력이 더해진 상대였다.
‘상승 무공이 없는 무림이라고 하지만···.’
하오문은 무림이 잃었던 과거의 상승 무공까지 모조리 손에 넣고 경매에 붙일 계획까지 실행 중이었다.
‘···이런 인물과는 무조건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인물은 자신의 편에 서게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황금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지례를 보이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실로 탁월한 방책입니다. 송 문주님.”
“어이쿠. 황 장주께서 그리 예의를 차리시면 저는 무릎을 꿇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호충은 황금석을 얼른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저는 저들이 꼴도 보고 싶지 않으나, 장주님께서 저들을 용서하라 하시니 어쩔 수 없이 합의에 나섰습니다. 부디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송 문주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금전장에서 잡음이 없도록 힘쓰지요.”
이후의 일은 하오문에서 나설 것도 없이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번 무림맹의 급전을 차용해줄 상단과 전장은 이리로 모이시오. 우리가 사백만 냥을 마련하고 가주들과 장문인들의 수결을 받을 것이니, 대금을 회수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오.”
거대 상단에서 나온 인물들과 전장의 인물들이 모조리 황금석 앞으로 달려갔고, 사백만 냥은 눈깜짝 할 사이에 마련되었다. 비급의 경매를 일찍 시작 하나 싶어서 품에 거액의 전표를 넣어 왔기 때문이다.
“무림을 대표하는 각 파의 장문인과 세가의 가주들께 고하오. 사백만 냥은 마련되었소. 빌리는 이율은 한 해에 이 할을 받을 것이오. 이는 현재 시장에서 통용되는 합당한 비율이니 수결할 분만 나서주시오. 물론 전장에 바로 돈을 갚는다면 이자는 받지 않겠소.”
“···알겠소.”
“아미타불.”
“제길···.”
진호현은 가장 마지막에 수결하며 암담한 미래를 가늠했다.
‘사백만 냥은 무림맹의 자금에서 빼면 된다지만···.’
사백만 냥은 이들이 무림맹의 설립을 위해 각출한 금액이었다. 그래서 모용태가 사백만 냥 이상을 주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이 할의 이자에 불만이 없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무림맹에 헌납했던 자금을 빼 바로 갚아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빈털터리 무림맹으로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향후 무림맹이 제대로 굴러가긴 어려울 것이다.
“······.”
호충은 황금석의 손을 거쳐 자신의 손에 도달한 전표 뭉치를 보면서도 욕심 한 점이 없었다.
“거참. 쓸데없이 많기만 하군.”
“······.”
‘금전에 욕심이 없어?’
황금석은 하오문주의 눈에 드러난 귀찮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오문주의 속을 가늠하기 쉽지 않구나.’
“왕 방주!”
“예. 문주님.”
“전표는 하오문 본부로 보내라. 하오문의 십만 문도가 오랜만에 배에 기름칠을 하겠구나.”
“!!”
“!!”
“!!”
“!!”
“!!”
하오문주의 입에서 나온 십만이라는 숫자가 상단주와 장주들의 얼굴에 균열을 일으켰다.
무림의 인물들이 받은 충격은 더 했다.
“시, 십만이라니···.”
“말도 안 되는 숫자가 아닌가.”
“문도의 수가 십만? 허풍이야!”
“큭. 왜? 못 믿겠나?”
보통 무림의 대형 문파라도 이천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 중형 문파는 보통 백단위의 제자들을 거느렸고, 소형 문파는 백 이하의 숫자였다. 가장 많은 구성원을 자랑하는 소림도 학승과 무승을 더해 일만이 넘지 않으니 하오문의 문도 수가 십만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운 것이다.
“너희가 개방을 버렸지 않느냐?”
“개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