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232)

진무검

***

“남궁가주. 혹시 옥 공자의 성명은 어찌됩니까?”

“비연이라 하였소.”

“!!”

빼어난 용모에 바른 성품, 이름까지 같은 이가 중원에 몇이나 될 것인가. 같은 인물일 확률이 구할이었다.

“삼도상단···. 상단의 자제라···.”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소?”

당연한 얘기를 또 하니 하는 말이다.

“남궁가주.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따님께 옥 공자를 선보이셨는지요.”

“···아직은 아닙니다만, 곧 인연이 되겠지요.”

한천과 비연이 머무는 객잔에 보내긴 했지만, 소선이 비연을 만났는지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이번에 저도 남궁가에 잠시 신세를 져야겠습니다. 본가로 가실 때 저도 함께하지요.”

“허허. 가주께서 방문하신다면 저야 환영입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정이 길어질 터인데...”

“우리 일양이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는 길에 화산파에 들러 무환 장문인과 합류하고 호북에서 제갈가에 들른 다음 안휘로 가면 되겠습니다.”

단숨에 남궁가주의 여정까지 정해버리는 제갈진이다. 제갈진은 본가에서 딸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딸아. 아비가 드디어 녀석을 찾았구나.’

가주의 딸은 옥 공자를 찾아오라며 매일 같이 성화였다.

“허허. 어차피 안휘로 가는 길에 거쳐 가야 할 길이니 문제는 없겠지요.”

“역시 남궁가는 사내의 기상이 남다르지요.”

“하하. 겨우 이런 일로 사내의 기상까지야···.”

‘우리 가문에 방문한 옥 공자가 확실하다면 그가 남궁가의 비급까지 되찾아 주었을 것이다. 분명 또 비급 값을 다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겠지.’

제갈진은 옥비연의 신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넌지시 물었다.

“옥 공자가 남궁가의 비급을 넘긴 모양입니다?”

“말도 마십시오. 비급을 어찌나 떠넘기려 하는지 거저나 다름없는···. 자, 잠깐. 이건 또 어찌 아셨소?”

‘의심할 여지도 없이 확실하군.’

“제갈가에서 모르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척하면 척이지요.”

“하지만 남궁가는 물론이고 삼도상단에서도 철저하게 보안을 지켰을 것인데···.”

“하하. 실은 남궁가와 삼도상단에서 나온 정보가 아니라 가주의 입을 통해 알았습니다. 방금 남궁가주와의 대화로 추측한 것입니다. 남궁가와 거래를 틀 정도로 대단한 일이라면 비급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이거 말도 함부로 못하겠군.”

“우리는 한 배를 타지 않았습니까.”

“휴우.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제갈가와 대척점에 서는 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소.”

“제갈가의 힘은 앞으로 우리 일양을 위해 쓰일 터. 염려 놓으십시오.”

제갈진은 어떻게 해야 삼도상단의 옥비연을 꾀어낼지 고민했다.

‘우선 삼도상단의 여정을 알아내야···.’

아직 남궁가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 전에 딸과 마주하게 만들고 싶었다. 남궁가에 사위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애초에 우리가 먼저 옥 공자를 만나지 않았겠는가.’

무림맹 행사 전이라면 제갈가에 방문했던 때와 상당한 시간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옥 공자에 미쳐있는 자신의 딸을 생각해도 양보는 어림도 없었다.

‘남궁가주에겐 미안하지만···. 옥 공자는 제갈가의 사위가 될 것이오.’

***

일단의 무리가 관도를 지나고 있었다. 남궁곤과 제갈진이 그토록 원하는 옥비연과 삼도상단의 상단주 자리를 꿰어찬 송 영감의 무리였다.

“어르신. 이제 곧 섬서성을 벗어날 것 같습니다.”

무리은 섬서성을 지나 호북성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섬서성의 서안에서 호북성을 지나 안휘성의 황산까지 가야 했다.

“어허. 비연. 어르신이라니···.”

“아. 죄송합니다. 상단주님.”

“문주님의 명이다. 실수가 없어야 해.”

“문주님이 보내주신 서찰을 아예 머리에 박아 넣었습니다.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인들만 기억하는 건 아니고?”

“아, 아닙니다.”

호충이 보낸 서찰을 통해 제갈가와 남궁가의 여식에 관해 알고 있었다.

‘대형은 괜히 무림의 여인들과 인연을 만드셔서는···.’

사실 인연이라고 할 것도 없는 일방적인 관계였으나, 비연의 눈엔 그게 그거였다.

“호북성에 제갈가에 들러 보겠느냐?”

“그러다 일이 꼬일 수도 있습니다. 제갈가에서 붙잡히면 안휘성에 언제 도착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따지면 안휘성의 남궁가도 마찬가지지. 거기서 붙잡히면 어찌할 생각이냐?”

“···휴우.”

송 영감은 푸욱 한숨을 내쉬는 비연에게 더 깊은 한숨을 만들어낼 말을 했다.

“게다가 나는 삼도상단의 상단주이기 전에 네 외조부로 알려져 있다. 무림의 거대 가문에서 외손주의 성혼을 원한다면 나는 허락할 수밖에 없어.”

“···하아.”

“어차피 네가 다른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쁠 것도 없는 일이지 않느냐.”

“······.”

비연은 과거 어미가 어떻게 자신을 길렀는지 기억하고 있었기에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일에 회의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홀로 자신을 길렀고, 아비의 관심과 사랑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남자들이 기루에서 얼마나 여인들을 못살게 구는지 지켜봤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기루에서 살아온 환경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남녀의 믿음은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대체 무슨 죄란 말입니까. 저는 성혼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 잘난 얼굴이 아깝구나.”

옥비연은 여인들이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출 정도로 출중한 외모를 자랑했다. 하오문에서도 가끔 루방의 기녀들이 옥비연과 마주치면 얼굴을 붉히곤 했었다. 옥비연이 하오문의 방주가 아니었다면, 매일 연서를 받느라 바빴을 것이다.

“외모에 혹한 여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서로의 진실한 마음을 주고받아야 될까 말까한 인륜지 대사를 겉모습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송 영감의 말이 이어지자 비연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문주님의 명이라면?”

“···따라야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송 영감도 비연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문주님은 네 의사에 반한 결정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네 결정을 중히 여기시겠지.”

“흐흐. 그러니 제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비연은 대형을 떠올리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송 영감의 말대로 억지로 자신을 혼인으로 밀어 넣을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었다.

“이제야 네 표정이 살아나는 구나.”

“그래도 제갈가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남궁가에서도 그녀와 인연을 맺지 않을 것이고요.”

“사람의 인연은 모르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이어질지 어찌 확신하겠느냐.”

“헌데 남궁 가주가 혼인에 대해 물으시면···.”

정말 허락할 생각이냐는 물음이었다.

“내가 네 외조부라니까? 어떤 외조부가 하나뿐인 손자를 어찌 성혼도 시키지 않고 그냥 둬? 게다가 너는 아비도 어미도 없이 내 손에 자랐다고 알려지지 않았느냐.”

“제 뜻을 존중한다고 하셔도 될 터인데···.”

“가서 상황을 좀 보자···. 여기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부탁 좀 드립시다. 외조부.”

“아직 모른다니까 그러네.”

옥비연은 서찰에서 읽었던 다른 내용을 떠올렸다. 자신이 기억해야 할 일이 아닌 상단주가 기억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남궁가주가 벼르고 있다는데···. 어찌 하시렵니까.”

서찰에는 자신과 송 영감이 익힌 무공을 남궁가주가 알고 있고, 특히 삼도상단의 상단주인 송 영감이 익힌 월하답보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혹시 대련을 청하면 성심을 다해야지.”

“···그러다 가주 잡습니다.”

송 영감이 온 힘을 다해 대련에 임했다가는 남궁가주가 검을 뽑기도 전에 목이 먼저 떨어질 것이다. 이제 완숙하게 정중동의 검을 펼치는 송 영감을 어찌 막을 것인가. 옥비연도 하오문의 영단을 취했지만, 송 영감의 검은 여전히 일초식도 받기 힘들었다.

“그래도 한 가문의 가주가 아니냐? 무림에서 무공으로 크게 인정받는 가문을 얕잡아 볼 수는 없지. 게다가 이번엔 실전했던 가문의 제왕검형과 창궁무애검법까지 회수하였으니···.”

무림에 속한 가문의 가주가 약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진짜 사람 잡습니다.”

“···왕호 정도로 상대하면?”

“더 낮추시지요.”

“더? 그럼 부상단주 정도로?”

“그에 반 정도가 적절하겠습니다.”

“에이. 그건 너무 내려가지 않았느냐.”

“제발 살살하십시오. 가주는 하오문도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긴 하지만···.”

“대련으로 깨달음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적당히 무위를 보이시면 됩니다.”

“그럼 아예 져줘야 한다고?”

“······.”

패배는 비연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문주께서 전해주신 무공에 패배는 없습니다.”

송 영감도 그간 많은 대련과 훈련을 통해 자신의 무위가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인지하고 있었다.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나도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적당히 찍어 눌러줘야겠군.”

“저는 남궁가에 납품할 물건이나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영단을 확인하려고?”

물품이야 상하지도 않을 것이니 다시 확인할 필요가 없고, 남은 것은 습기와 벌레에 취약한 영단밖에 없었다.

“예. 지금쯤 무림맹에서 경매가 끝나고 영단을 구하느라 난리가 났겠지요. 남궁가에 영단을 가져가면 크게 환대를 받을 것입니다.”

현 무림의 가장 큰 관심을 차지하고 있는 사안이 바로 영단에 관한 것이었다. 비급이야 각 문파와 세가에서 잃었던 물건이고, 워낙에 높은 금액으로 낙찰된 다른 비급들도 중소무림인들이 감히 노려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영단은 달랐다. 중소문파라도 자금을 쥐어짜면 몇 개는 살 수 있을 영단이었다.

“몇 개나 넘겨주려고 하느냐.”

“남궁가에 일단 여섯 개 정도만 넘기려고 합니다. 나머지는 이후 이동 중에 걸치는 문파와 세가에 넘길 생각입니다.”

“하나는 따로 빼서 네 벗인 한천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

“저는 그 녀석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만···.”

남궁가의 대공자 한천은 자신의 벗이 아니라 문주의 벗이었다.

“문주님도 겨우 한번 만난 것이 전부다. 남은 인연은 네가 이어가야지.”

“···그러다 다른 인연도 이어질까 겁나네요.”

비연을 찾는 인연이 둘이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인연은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다. 너는 하늘의 뜻에 따른다 생각 하여라.”

“···그럼 내 아비가 누군지나 하늘에 알려달라고 하겠습니다. 그 전엔 어림도 없습니다.”

“······.”

‘도련님. 이 녀석이 제 아비를 알고 싶답니다.’

송 영감에게 하늘은 바로 호충이었다.

***

세상엔 서로 날을 세운 아들과 아비도 있었다.

“아, 아버지!”

“왜. 내가 어찌 알았는지 궁금하긴 하느냐?”

“아니옵니다! 전부 거짓이옵니다!”

“여전히 눈도 깜짝하지 않고 거짓을 입에 올리는 구나. 너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잘못을 저지르고도 인정할 줄을 몰랐어.”

흰머리가 가득한 봉두난발의 노인의 근육은 흰머리와 대비되어 더욱 도드라졌다. 팔뚝에서부터 찢어진 웃옷은 노인의 우람한 팔 근육으로 인해 그리된 것처럼 보였고, 그 노인의 손은 진원우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아버지! 어찌 자식이 아비를 밀고하겠습니까! 그러니 손을 놓으십시오!”

“너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내가 널 모를까.”

호충이 진가장에 보낸 서찰이 원로원에 닿은 것이다. 서찰에는 누가가 어떻게 자신을 원로원에 보냈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에 보고 들었던 이들의 성명과 일의 경과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 일의 중심에는 당연히 진원우가 존재했다.

“아닙니다!”

“그래. 너는 죽도록 맞아도 네 죄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끝을 봐야 했지.”

“계속 이렇게 고집을 부리시면 저도 힘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허허. 이제 너도 절정에 올랐다 이거냐?”

“···진강이십사검을 모르시는 아버지는 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탁.

진원우는 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 진원우의 아비는 손을 벗어난 아들보다 검법이 중요했다. 너무나 황망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진강이십사검? 진가장의 진원검법은 어쩌고?”

“절정에 이르기도 어려운 진원검법은 제가 가문의 무공에서 빼버렸습니다. 이제 진가장은 진강이십사검을 가문의 검법으로 전할 것입니다.”

“허허. 내 자식이 가문의 검법을 사장시킬 줄이야···.”

“더 좋은 검법이 있으니 당연히 바꿔야지요.”

“아아. 저승에서 조상님들을 어찌 뵌단 말인가. 이 진무검의 자손이 어찌···.”

한참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던 진무검은 얼굴을 굳히고 검병에 손을 가져갔다.

“바로 잡을 수 있을 때 바로잡아야 할 터, 내가 죄를 씻어내야겠다. 아직 늦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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