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소(砒素)
***
“···아직 늦지 않았다.”
“검을 뽑으시면 그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버지.”
“오냐. 오늘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
스스릉.
“···제길. 자식을 어찌 여기까지 내몬단 말입니까.”
스르릉.
부자가 검을 빼들고 섰다. 서로 완전히 다른 기수식이었다. 진원검법을 익힌 진무검과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힌 진원우의 대립이었다.
“어라?”
진무검은 아들의 기수식이 묘하게 낯이 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거······. 어디서 많이 본 기수식이다?”
진무검도 화산의 검공을 견식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섬서 땅에 있으니 어찌 교류가 없었겠는가.
“···화산의 검법을 진가장이 입수하였습니다.”
“!!”
“진강이십사검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젠 진가장의 검법이지요”
“···쉽지 않겠군.”
진무검도 화산파의 매화검법을 입수한 것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문의 검법을 사장시킨 네 죄와 나를 관에 밀고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게다가 지금도 네 죄를 인정하지 않고 아비에게 검을 들었으니, 죽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큭. 제 성정이 누굴 닮았겠습니까. 다 아비를 닮아 이리 컸지요.”
“···못 난 건 다 조상 탓이냐? 이 썩을 놈!”
비슷하게 못난 두 사람의 검이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챙! 챙챙!
완력에서 차이가 났는지 진원우의 발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갔다.
“크흑.”
“네 놈이 절정에 오른 것보다 내가 절정에 오른 것이 이십 년은 빠르다. 네가 날 어찌 상대하겠느냐!”
“타앗!”
진원우는 마교도를 상대했던 매화검법을 가감 없이 펼쳤다.
대경한 진무검은 날아드는 검기 사이로 검을 찌른 다음 몸을 뒤집었다.
채앵! 챙!
“큭.”
그럼에도 검의 공세에서 벗어나지 못해 팔에 자상을 입고 말았다. 팔에서 뒤늦게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뚝. 뚝.
검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땅을 적셨다.
“검법의 수준차이는 시간으로 메꿀 수 없습니다.”
“···개인의 수련차이는 메꿀 수 있는 법이다. 고작 한 번 이득을 봤다고 날 가르치려 들어? 하압!”
진무검은 본격적으로 진원검법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참의검(斬意劍)!]
진원우는 어릴 적에 배웠던 진원검법의 기억을 되살리며 진무검의 검식을 상대했다.
“제게 고작 참의검이라니요!”
“타앗!”
참의검은 베는 뜻을 가진 검이라는 말로 진원검법의 가장 단순한 초식이었다.
촤악!
“끄악!”
하지만 누가 검을 펼치느냐에 따라 가장 단순한 초식도 가장 고절한 초식으로 변할 수 있음이다.
투둑.
이번엔 깊게 어깨를 베인 진원우가 주르륵 피를 흘렸다. 참의검이 자신의 과거 기억과 달리 너무나 빠른 속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검의 속도가 끝이 아니었다. 검첨이 흔들렸고, 검의 경로가 마음대로 뒤틀려 어디로 들어오는지 예측할 수도 없었다. 진무검의 말대로 개인의 수련에 깊이가 다른 것이다.
“항복일랑 꿈도 꾸지 말거라. 아비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쪽도 마찬가지요!”
“그럼 아비는 저쪽이냐 새끼야!!”
“하앗!”
“오냐. 와라! 하압!”
둘의 신형이 다시 얽혀 들어갔다. 진원검법을 쓰는 진무검과 매화검법을 쓰는 진원우의 대결은 서로에게 커다란 상처만 남기고 있었다.
“허억. 헉.”
“흐으. 흐윽.”
한참이나 검을 나눈 둘의 호흡은 무척 깊었다.
“기본을 무시하면···. 흐윽. 그 꼴이 나는 거다.”
“허억. 헉. 헉.”
많은 나이에도 강건한 몸을 가진 진무검은 호흡이 빨라졌을 뿐인데, 진원우는 호흡은 물론이고 손까지 떨리고 있었다. 몸도 만신창이였다. 서로의 검격이 닿은 곳에 저마다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검격이 너무 강하다.’
떨리는 손을 아무리 붙잡아도 떨림이 가시질 않았다.
“이제 슬슬···. 흐흡. 끝내야지?”
“아들을 죽일 생각입니까?”
“안 아프게 팔 하나만 잘라주마. 감히 가문의 검법을 버리고 다른 문파의 검법을 익힌 죄다.”
“안 아프긴 개뿔! 지금까지 날 때린 값을 갚아줄 것이오!”
“아들이 잘 되라고 매를 들었건만···.”
“매가 아니라 당신의 기분을 풀기 위한 폭력에 불과했소!”
“쩝. 그것도 없진 않았지···.”
“···부정이라도 할 것이지.”
“죽여주랴?”
“내가 죽여 드리지!”
“집안 꼴 잘 돌아가네. 썅.”
아들을 잡으려는 자신이나 아비를 죽이려는 아들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둘의 충돌은 하나가 바닥에 몸을 눕힐 때까지 계속되었다.
쨍그렁.
누군가의 검이 돌바닥에 몸을 눕혔다. 검날은 검붉은 피로 얼룩져있었다. 누구의 피가 더 많이 묻었는지를 모를 일이었다.
투툭.
“······.”
그리고 입을 쩍 벌린 진원우가 무릎을 꿇었다.
“약속대로 팔만 잘랐다.”
“끄억.”
바닥에 떨어진 검은 아직도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있었는데, 바로 진원우의 팔꿈치 아래에서 떨어져 나간 오른쪽 팔뚝과 손이었다.
“네 짓 맞지?”
관에 밀고한 이가 맞느냐는 물음이었다.
“···끄으윽.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이봐. 너는 끝까지 가야 진실을 말하지. 이러니 어찌 내가 중간에 그만두겠느냐.”
“사, 살려주십시오. 아버지.”
“···흐음. 어차피 네가 낳은 자식이 많지 않으냐. 대가 끊길 일도 없을 것인데···.”
“아버지!”
촤악!
진원우가 소리치자 팔뚝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진정해라. 그러다 진짜 죽겠다.”
“끄윽···. 제가 아버지의 과오를 항상 덮어줬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십시오.”
“···제기랄. 알았다.”
진무검은 밖에 사람을 불러들였다. 원로원에서 머물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하거나 의원이 필요할 수도 있음이다. 이럴 때는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와도 관부에서 용인해주었다.
***
진가장의 의원들은 진원우의 상세를 살피고 긴급하게 치료를 시작했고,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누워있는 진원우 곁에 진무검도 온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있었다.
“휴우. 두 분은 어쩌자고···.”
상세를 보고 둘이 싸웠음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럴 일이 있었다.”
“그래도 아드님이신 전 가주님의 팔까지 자르시다니요. 무인에게 팔은 생명일 것인데···.”
그것도 검을 들어야 하는 오른손을 잘랐으니, 앞으로 진원우는 무림에 이름을 내밀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밖은 어찌 흘러가는가. 바깥소식을 듣지 못해 무척 궁금하군.”
“···아무도 서찰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진가장에 많은 일이 있었고, 당연히 그 내용이 전해졌을 줄 알았다. 진가장의 의원인 자신들도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손주 놈들도 이놈을 닮아 버르장머리가 없겠지. 조부가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서찰 한 번을 보내지 않아.”
이번에 전해진 서찰은 손자들이 보낸 것이 아니었다. 서찰에서 성명을 밝히지 않았고 과거의 일만을 자세히 작성한 것이 전부였다. 손자들이 알 수도 없었던 일일 것이니, 자신과 인연이 있었던 진가장의 무인 중 하나가 보냈거니 여기고 있었다.
“그럼 첫째 도련님이 맹주자리를 차지하신 것도···.”
진무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 호현이가 협의맹의 맹주가 되었다고?!”
진무검이 원로원에 들기 전까지는 진가장이 세가 연합인 협의맹 소속이었으니, 협의맹의 맹주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협의맹이 아니라 무림맹입니다. 협의맹은 정무맹과 하나가 되었고 무림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였습니다. 첫째 도련님이신 진호현 공자님이 초대 맹주자리를 차지하셨단 말입니다.”
“무, 무림맹! 무림맹의 맹주라니! 야 임마! 퍼질러 잘 일이 아니야! 어서 일어나!”
진무검은 기식이 엄엄한 진원우를 흔들어 깨웠지만,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의원이 난리였다.
“지, 지금은 절대 안정해야 합니다. 그러다 겨우 봉합한 곳이 터집니다요.”
“제길. 제 아들이 맹주가 되었다는데···.”
“그럼 전 가주님의 처가에서 곧 황실과 백년가약을 맺는 것도 모르십니까?”
“화, 황실?!!”
“그 덕에 상승 무공에 대한 규제도 조금씩 풀릴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진행되면 향후 원로원을 개방할 지도 모를 일이지요.”
“!!!”
진무검에게 이보다 중한 소식이 있겠는가.
“그보다 이놈의 처가라니 셋 중 어디 말인가!”
“대부인마님의 모용 세가입니다. 무려 태자 전하와의 혼례라고 들었습니다.”
“이놈이 날 닮아서 여자는 잘 자빠트렸지. 그 중에 하나가 잘 걸렸구나.”
“······. 어쨌든 지금 진가장은 확장일로입니다. 전 가주님이 기반을 마련하셨고, 지금은 도련님들이 뒤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큭큭. 오래간만에 들은 소식이 희소식으로 가득하군. 나가면 재미있겠어.”
많은 나이에도 진무검은 수련을 빼먹지 않았다. 여전히 단단한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직 그는 자신이 젊다고 생각했고, 밖으로 나가면 얼마든지 무림의 고수 반열에 들 것이라 확신했다.
“밖을 오가며 계속 소식을 물어오겠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물어보시지요.”
“흐하하.”
자신의 위치가 당장에 달라진 것 같아 크게 웃음을 터트리던 진무검은 아들의 마지막 인연을 떠올렸다.
“···아. 막내는 어찌되었느냐?”
“막내라 하시면···. 셋째 진호성 공자를 이르심이옵니까?”
“아니, 아니. 넷째 호충이 녀석 말이야.”
자신이 원로원에 들기 전에 아들이 마지막에 들였던 며느리의 아들이었다.
“지난번 화산에 보낸 다음부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벌써 몇 년 지났지요.”
“큭. 결국 그렇게 내쳤군. 알았네.”
기이하게도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의원은 혹시 몰라 전 가주인 진원우가 원로원에 든 다음의 일을 입에 올렸다.
“그리고 마교의 습격 이후 진가장은 세 아드님이 공동 가주직을 수행해왔습니다. 이번에 첫째 도련님이 맹주가 되셨으니 두 분 공자님이 진가장의 공동 가주인 셈이지요.”
“별 지랄을 다 하는군. 공동 가주라니···. 나 같으면···.”
진무검은 당장에 다른 하나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세 형제의 성정도 진무검과 다르지 않음이 당연했다. 세 형제가 결국 누구의 피를 물려받았을 것인가.
“왜 그렇게 됐지?”
“그야···. 진가장엔 세 분 도련님이 전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모용가와 서문가, 중부전장의 힘이 진가장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기둥이 흔들립지요.”
“썩을. 결국 이놈은 처가의 힘으로 진가장을 키워낸 것이야.”
따악.
불만스럽게 아들의 머리를 때리자 의원은 또 화들짝 놀라서 말렸다.
“그, 그러다 진짜 큰일 납니다. 제발 태상가주님···.”
잠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던 진무검은 아들이 가질 영향력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이 원로원을 나서면 아들도 나서지 않겠는가.
‘아들은 무림맹의 맹주, 아내는 황실의 인척. 원로원이 개방하면 제일 먼저···.’
진원우가 자신의 오른팔을 자른 아비를 두고 보겠는가. 아들의 성정이 자신과 다르지 않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분명 가문의 힘을 동원할 것이고, 그것도 부족하면 황실의 힘까지 빌려 나를 처분하려 할 것이다.’
“···자네 이름이 뭔가.”
“문노라 하옵니다.”
“···함께 들어온 의원들 중에 밖으로 나간 이가 있는가?”
“저의 수발 제자 둘은 여전히 밖에서 탕약을 달이고 있습지요.”
“자네와 제자들의 입은 무겁나?”
문노는 입이 무겁냐는 물음에 언제나 목숨 값이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무검의 눈에 일어난 살기가 이를 확신하게 했다.
“······.”
침을 꿀꺽 삼킨 문노가 답했다.
“태상가주께서 원하신다면 저희는 벙어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아. 그럼 탕약에 좋은 약제를 많이 넣게.”
‘휴. 다행히 별일 아니었군.’
하지만 안심할 일이 아니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이다.
진무검은 몸을 숙이고 의원만 들을 수 있도록 조그맣게 말했다.
“특히 비소(砒素)와 같은 귀한 약제 말이네···.”
몸에 좋은 탕약이 아니라 사람을 죽일 사약을 만들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탕약을 먹을 대상은 자신의 아들인 전 가주 진원우였다.
“!!”
“원로원에서 나가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전한 말에 의원은 자신의 목숨을 더 연명할 방법이 하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태상가주님.”
“허허허. 오늘 큰 인연이 생겼군. 내가 떠먹여 줄 터이니 어서 탕약을 들여오게. 아들이 몸을 털고 일어나려면 탕약을 필히 먹어야 할 것이야.”
“······예.”
며칠 뒤 원로원으로부터 진가장에 비보가 전해졌다. 전대 가주 진원우의 부고를 알리는 비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