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놀이
***
한천은 그 상대가 너무 궁금했다.
“누구야? 누가 너보다 강한 건데?! 내가 아는 놈이야?”
“···외조부님의 하나 뿐인 제자.”
비연은 틀어졌던 인연을 다시 이어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말뿐이었지만, 감히 형수와 자신을 이어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형수님은 문주님과 함께 있어야 어울리지.’
“···월하검문?”
“그래 월하검문의 삼십팔대 문주로 확정인 분이지.”
사전에 입을 맞춰둔 일이었다. 호충은 송재호로 분해 하오문의 문주직을 맡으면서 본래 정체를 일인전승 월하검문의 제자로 정해둔 것이다.
“······. 그렇게 강해?”
“강하지. 그것도 내가 추측하기 힘들 정도로···.”
“하아. 암담하네.”
“네가 암담하긴 왜 암담해?”
“힘들면 내가 같이 싸워주려고 했거든.”
“큭. 마음만 받으마. 너와 내가 열이 더 있어도 가능할까 싶으니까.”
‘네가 문주님을 무슨 수로···.’
그래도 친우의 일에 나서준다는 말이 듣기는 싫지 않았다.
“아. 안 그래도 네게 줄 선물이 있었다. 이거나 받아라.”
비연은 별거 아닌 듯이 품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 한천의 손에 올렸다.
“이게 뭔데?”
“요즘 중원 무림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관심을 차지하는 물건인데···.”
한천은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몰라서 나무 상자를 흔들고 있었는데, 소선과 미가 기겁했다. 둘은 상자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와악! 그게 여기서 왜 나와요!”
“그거 똑바로 잡지 못해요! 흔들지 마세욧!”
“···어. 나만 모르나?”
“그, 그거 혹시···.”
“옥 공자님?”
“맞아요. 하오문 영단.”
“요즘은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한다고 들었는데···.”
“요새 제갈가도 그 영단 때문에 난리라고요.”
“영단? 몸에 좋은 건가?”
여전히 한천만 모르고 있었다.
“오라버니! 제발 가문의 일에 관심 좀 가지시라고요! 저 영단은!”
소선의 말을 미가 받았다.
“얼마 전 무림맹 출범에 맞춰 열린 하오문 경매에서 최대 낙찰가 이천이백 냥을 기록한 영단이에요. 무려 십년의 내공을 증진시켜주는 희대의 영단이라 지금은 구할 방법도 없어요.”
“시, 십년? 이천이백 냥?”
한천은 가볍게 들었던 상자를 얼른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너무 비싼 물건이었다.
“이, 이걸 나한테 주면 어떡해?! 비연!”
“외조부께서 여섯 개를 더 확보해서 하나는 내가 너 준다고 달라고 했다. 나머지는 가주님께 선물로 드렸어.”
“와아.”
소선도 놀랐지만 한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크흑. 역시 우리 가문과 날 생각해주는 건 너밖에 없구나.”
한천은 팔을 벌려 비연을 안으려 했지만, 비연은 두 손으로 밀쳐냈다.
“저리가라. 그거 먹어도 이번 생에 네가 날 이길 일은 없으니까.”
“뭐얏! 두고 봐! 내가 가문의 무공을 이으면 너도 절대로 날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
비연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두 여인이 있었다.
“···저희는 뭐 없어요?”
“저희 손도 선물 받을 수 있는데···.”
‘결국은 이걸 써먹네.’
“아름다운 그대들을 위해 준비한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비연은 송 영감이 혹시 몰라 준비해둔 물건을 마차 안 수납장에서 꺼냈다.
“우앗! 이건 삼도상단의!”
“언제 신품이 나왔어요?!!”
성인 남성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상자를 열자 여인들이 사용하는 갖가지 분과 용품들이 가득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삼도상단에서 여인들을 위해 새롭게 준비한 상품이었다. 상자부터 상당히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안에 든 하나하나의 용품이 예술품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오로지 여인을 표적으로 만들어진 상품이었다.
비연은 한천에게도 같은 상품을 건넸다.
“네 것도 있다.”
“나도? 나보고 여인들처럼 화장하라고?”
“···줄 사람을 잘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
“······아. 고맙다.”
지금도 기루의 그녀를 만나고 있는 한천이다.
‘월향에게 가져다 줘야겠다.’
하지만 비연이 찾으라는 사람은 월향이 아니었다.
“그래. 모친께서도 무심한 아들이 가져다준 선물을 받으시면 눈물을 한 바가지는 쏟으실 게다.”
“······.”
이러면 월향에게 가져다 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제길. 소선이가 들었으니, 안 가져다주면 어머니께도 맞을지 몰라.’
소선은 어머니까지 챙기는 비연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다.
“어머. 어쩜 그렇게 생각이 깊으신지···.”
“이렇게 생각 없는 놈을 보면 가만 볼 수가 없습니다.”
“맞아요. 오라버니가 생각 없긴 하죠.”
“······.”
자신을 생각 없는 놈으로 만드는 여동생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댔지만,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밀어버린 소선은 비연에게만 집중했다.
“제가 부모님이 안계서서 더 그런 모양입니다.”
“···저도 상단주이신 외조부님 손에서 자라셨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그래도 두 분은 분명 하늘에서 공자님을 보시며 기꺼워하실 것 같아요.”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소선 낭자.”
“······.”
소선은 이름을 불러주는 비연의 목소리에 볼을 붉혔고, 한천은 볼썽사납다는 듯이 말했다.
“낭자는 무슨···. 피가 낭자하면 모를까. 쟤한테 얻어 터져봐야 ‘아! 한천이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어.’ 할 거야.”
“푸흡.”
별것도 아닌 농에 제길미는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공자님의 벗인 네 오라비는 내 편인 모양이다.’
소선과 분위기가 좋을까 싶으면 제 때 나서서 초를 쳐주기 때문이다.
“······.”
소선은 화를 참아내려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천아. 장원에 돌아가서 무사하고 싶으면 말을 삼가는 편이 좋지 않을지···.”
“···나도 동감일세. 입을 조심해야겠군.”
“어머, 어머. 제가 뭘 어쨌다고요?”
소선은 얼른 표정관리를 했지만, 이미 한참 늦었다.
“소선아···.”
또 입을 열려는 한천을 비연이 말렸다.
“내일도 살아서 보려면 그 나불거리는 입 좀 다물라니까.”
“···덕분에 목숨을 구했군. 내 생명의 은인.”
“오라버니이이이!”
제갈미는 자꾸만 터지는 웃음을 참아내려 고생이었다.
“끄윽. 끅.”
덕분에 비연은 관심의 대상을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계속 소선과 대화하다간 한천이라는 멍청한 놈이 정말 소선에게 맞아죽을 지도 몰랐다.
“웃음은 나쁜 것이 아니니 감추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어찌 외간 남자들 앞에서 입을 벌려 크게 웃을 수 있겠는가. 무림의 여식은 여염집에 비해 상당히 개방적이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앞에 있는데 편히 웃음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저희끼리 내외할 일이 무엇입니까. 편히 만나라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셨을 가주님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는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 희생양이 필요했다. 비연은 검지로 한천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처럼 생각 없이 대해주십시오.”
“푸흡. 흐하하하.”
본래 별 것 아닌 농담도 잘생긴 놈이 해야 더 잘 먹히는 법이었다.
“너무 재미있으셔요.”
“더 재미있는 일은 아직 시작도 전입니다만?”
마침 마차가 목적지에 당도하고 있었다.
“옥 공자님. 도착했습니다.”
“자. 그럼 같이 가실까요?”
마차의 문이 열리며 들어온 햇빛이 절묘하게 비연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환한 빛과 함께하는 비연의 얼굴은 여인들의 가슴에 깊이 박혀버렸다. 또한 비연은 상쾌한 미소를 보이며 뒤를 돌아보았고, 햇빛은 다시 후광처럼 비연을 비춰 주었다. 태양조차 그의 주변에서 맴도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쿵.
쿵.
두 개의 심장이 또 어디론가 떨어져 버렸다.
‘옥 공자님.’
‘아아. 이 마음을 어쩐단 말입니까.’
두 여인은 저도 모르게 서로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있었다.
“허응.”
“어쩜 좋니.”
“···안 내립니까?”
비연은 높은 마차에서 내리는 여인들의 손을 잡아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두 여인은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찌 감히 그의 손을 잡겠는가. 차마 손을 잡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둘의 시야에 거대한 엉덩이가 손을 가리며 나타났다.
“어. 고맙다.”
“···그래.”
한천이 비연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고, 이후 비연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가버렸다.
“내가 잡았어야 하는데···. 그 손을 오라비가 왜!”
“네 오라비는 대체 왜 저 모양이라니?”
“내가 저걸 오라비라고···.”
“어디 아는 가문 여식 없니? 빨리 짝을 찾아서 보내버려.”
“온 동네 모자라다고 소문나서 찾는 사람도 없어 얘.”
“···너도 걱정이 많겠다.”
“에효···.”
“어! 공자님 가시잖아! 우리도 얼른 가자.”
“그래. 가자.”
둘이 언제부터 친해졌는지 모를 일이지만, 지금은 마치 오랜 벗처럼 나란히 뛰고 있었다.
***
비연 일행이 도착한 곳은 황산 근처 신안강의 선착장이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태평호나 포양호로 갔겠지만, 오늘은 이곳으로 만족하시지요.”
선착장에는 하오문에서 준비한 배가 꽃단장을 하고 대기 중이었다.
“우아···.”
“너무 예뻐요.”
“······.”
오직 한천만 불만이었다.
“이걸 나하고 타려고 했다고? 너와 내가 둘이?”
여동생과 제갈가의 여식은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이었으니, 결국 자신과 함께 타려고 했다는 말이었다. 꽃장식이 가득한 배에 남자 둘이서 대체 뭘 하자는 말인가 싶은 것이다.
“에효. 내가 괜히 이런 배를 준비했을까.”
비연은 소선과 미가 배를 구경하려 멀어진 사이 한천에게 말했다.
“···저녁에 자네의 그녀를 불러서 좋은 시간 보내게 해주려고 했지.”
본래 이 배는 한천이 루방의 월향과 좋은 시간을 보내라고 준비한 배였다.
“으아! 정말 좋았겠다!”
“넌 내 깊은 뜻도 모르고···.”
“아.”
“넌 그냥 술이나 마셔라.”
“제길. 소선이 년 때문에···. 내 즐거운 시간이···.”
“나중에 내가 준비하면 되지 않겠어? 남의 손을 빌리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것이 낫지.”
“좋아. 나도 이런 배를 준비시켜놔야겠어.”
.
.
.
신안강에서 유람을 즐기는 배들 사이에서 일행의 화선(花船)은 크게 주변의 눈길을 끌었다. 다들 그저 그런 배를 끌고 유람을 즐기는데, 비연의 배만 꽃 장식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다들 저희만 보는 것 같아요.”
“배가 너무 예뻐서 눈길을 빼앗긴 모양입니다. 조금 민망하군요.”
이들이 떠난 다음 신안강은 꽃배로 가득해질 예정이었다.
“아. 너무 좋다.”
제갈미는 뱃전에서 바람을 맞으며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항상 장원에 박혀 가문에서 입수한 천궁전도를 분석하느라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장원을 벗어나 이렇게 강에서 유람하니 너무나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습기가 가득한 강바람이지만,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었다.
“바람 좋죠?”
“아. 공자님.”
제갈미는 이런 좋은 날에 옥 공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 중이었다.
“저도 가끔 가슴이 답답하면 강으로 가곤 했습니다. 흐르는 물을 지켜보다보면 제 속의 답답한 마음도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지요.”
“······.”
제갈미는 우수에 찬 눈으로 반짝이는 강물을 지켜보는 옥비연의 얼굴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쩜, 어쩜···.’
“···이렇게 잘 생겼을까.”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걸 입으로 내뱉고 있었지만,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비연은 고개를 저으며 검지로 강을 가리켰다.
“사람의 겉모습은 저기 흘러가는 강물과 같습니다.”
“!”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제갈미가 얼른 입을 가렸다.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이 흐르면 아무리 잘난 이도 똑같이 주름 가득한 노인이 되지요. 하지만 속은 다릅니다. 바른 뜻을 지니고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배우자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고, 자식이 태어나도 책임감을 갖고 현명하게 키워낼 수 있습니다.”
비연은 본래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풀어내고 있었다. 아직 꽃다운 나이의 여인이 외모에만 집착해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자신이 아비의 얼굴도 모르고 여태 살아온 이유도 모친이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리 되었다 여기고 있었다.
“겉이 아닌 속을 채운 사람은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소중한 가족들에 집중하지요. 속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기에 믿을 수 없고, 어려울 때 기댈 수도 없습니다.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를 선택하실 때 꼭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정말 좋은 말씀이셔요.”
어느새 옆에 와 있던 소선까지 듣고 답했다.
“명심할게요. 옥 공자님.”
‘얘들 눈빛이 왜 이래···.’
소선과 미의 눈빛이 전보다 더욱 반짝이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연! 밖에서 뭐하는 거야? 요리까지 다 준비해놓고 제사지내? 아니면 나 먼저 먹는다?”
한천은 밖의 일보다 배에 차려진 술상이 더 중요했다.
“······.”
“······.”
두 여인은 좋은 분위기를 단번에 깨부수는 한천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두 분은 객잔에서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으니 들어가서 함께 드시지요.”
방금까지 가자미눈을 했던 두 여인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보였다.
“준비성도 좋으셔라.”
“역시 옥 공자는 완벽하세요.”
“완벽까지야···.”
본래 한천과 그의 연인을 위해 준비했던 일들일 뿐이다.
배에 준비된 요리와 술을 함께하니 두 여인은 낙원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강에서 선실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가끔 배에 장식한 꽃잎을 날려주었고, 술잔에 들어가기도 했다.
‘매일 이렇게 살면 좋겠다.’
‘옥 공자님과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너무나 좋은 시간이라 하늘이 시기했을까?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한천이 아니었다.
쿵.
큰 소리와 함께 배가 흔들렸다. 그 바람에 술병이 떨어져 깨지기까지 했다.
쨍그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