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흑패
***
“악!”
“무슨 일이죠?”
“······.”
배를 몰던 인부가 밖에서 소리쳤다.
“공자님. 잠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알았네.”
밖에 소리친 비연은 얼른 선실을 빠져나갔고, 서로 눈을 마주친 소선과 미도 얼른 밖을 내다봤다.
비연은 선수로 나가 어찌된 일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배가 다가와 부딪친 것이다.
‘이 넓은 강에서?’
서로 부딪치지 않으려 멀찌감치 떨어져 다니는 배들이다. 우연히 이렇게 부딪치기도 힘들었다.
‘우연이 아니다.’
비연은 부딪친 배의 인물이 하는 말을 듣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는 어여쁜 기녀를 둘이나 끼고 놀고 말이야.”
“거 양보 좀 하지? 엉?”
분명 아까부터 자신들을 지켜봤을 것이다. 비연은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아. 아까 배에 들어오자마자 풀어두었구나.’
태도(太刀)를 차고 있었다면 저들도 자신이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반한 면상에 칼자국 나기 싫으면 주머니도 끌러놓고 돌아가려무나.”
“그 면상만 유지하면 돈이 없어도 다른 기녀를 찾아 자빠뜨리는 것은 일도 아닐 터. 크흐흐.”
“······.”
하지만 건들거리며 말하는 꼴을 보니 예의를 차릴 이유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근방의 흑패 소속인가?”
황산흑패에 속한 이들이라면 목숨은 붙여 놓을 생각이었다.
“내가 황산흑패에 아는 형님이 몇 있지.”
“우리도 곧 황산흑패 소속이 될 어르신들이고 말이야. 흐하하.”
“저 년들 데리고 형님들도 부를까?”
“그거 좋겠군.”
“······하아.”
황산흑패에서 이따위 녀석들을 조직원으로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마침 녀석들의 배와 붙어있어 비연은 훌쩍 난간을 뛰어 넘어갔다.
탁.
배에서 지켜보던 두 여인이 소리쳤다.
“어머! 옥 공자님!”
“조심하셔요!”
조심하고 말고 할 일도 없었다.
“······.”
‘좋은 기회로군.’
두 여인이 자신에게 정을 뗄 좋은 기회라 여긴 비연은 잠시 가면을 벗어버리기로 했다.
“병신 같은 놈들이···. 좀 전에 날 어쩐다고 했지?”
“하! 기녀들 앞이라고 용기가 났느냐?”
“죽을 자리를 모르고 넘어오다니.”
우락부락한 인상을 가진 하나가 단검을 빼들었다.
“오늘 그 잘난 면상이 성하지 못하겠구나.”
“냄새나는 입은 그만 다물고 들어와라.”
내공을 보일 필요도 없는 상대와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늘 넌 뒈졌다. 물고기 밥으로 던져줄 테다!”
“물고기가 포식하는 날이로군!”
단검을 꼬나 쥔 녀석이 흔들리는 배를 달려 다가왔고, 비연은 쓴 웃음을 지으며 녀석을 맞이했다.
‘오늘 너희 일진이 사납구나.’
조금 심하게 상대할 각오였기 때문이다.
타닥.
비연은 두 손으로 단검을 쥔 팔을 낚아챘고, 상대가 반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우드득.
“끄아악!”
기괴하게 뒤틀린 팔에 비명을 지르는 녀석이지만, 고통은 끝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일 뿐.’
비연의 오른쪽 발이 바람처럼 바닥을 쓸며 나아갔다.
빠각.
“끄악!”
녀석의 왼쪽 종아리뼈는 누구나 부러졌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고,
빠각.
“윽!”
나머지 오른쪽도 사이좋게 부러뜨렸다.
털썩.
“꺼흑!”
두 다리가 부러졌으니 녀석은 그 자리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연은 녀석의 머리칼을 야무지게 잡아 위로 들어올렸다.
“다시 말해봐.”
비연의 오른쪽 주먹이 크게 휘둘러졌다.
빠악.
“컥!”
“누가!”
뻑!
“끅!”
“뭘!”
퍽.
“쿨럭!”
“어쩐다고?!”
짜악! 짝!
“······.”
주먹으로 모자라 따귀까지 골고루 때려줬다.
“이 새끼는 몇 대나 맞았다고 기절이야?”
퉁.
피투성이로 변해 기절해버린 녀석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남은 놈을 돌아보았다.
남은 놈은 벌벌 떨며 뒤로 한걸음씩 물러서고 있었다.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울어 버린 승부가 대적할 마음을 깨끗하게 지워버린 것이다.
“너도 일로와 새끼야. 남은 화는 네가 감당해야 할 것이다.”
“훠이! 저리가!”
“하! 뭐 임마?”
비연이 가까이 다가서자 녀석은 선수 끝까지 밀려났고, 곧 결단을 내린 듯이 말했다.
“두고 보자! 내가 네 놈을···.”
첨벙!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녀석은 얼른 강물로 뛰어들었고, 헤엄쳐서 배에서 멀어졌다.
‘저걸 죽여 살려···.’
품에 꼽힌 유엽비도를 날리면 녀석의 목숨을 거둘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겠지···.’
품에 넣었던 손을 꺼낸 비연은 이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난 이런 놈이다. 너희가 생각하는 마냥 착해빠진 공자가 아니란···.’
“공자님 정말 훌륭하세요.”
“저 시원한 박력. 어쩜 좋니.”
그녀들은 무림의 여식이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군.’
비연은 씁쓸한 얼굴로 다시 배에 돌아왔고, 한천은 여전히 남에 속을 긁었다.
“잔챙이들을 상대로 뭐 하러 힘을 써? 대충 경고만 하고 보낼 것이지.”
“···그러게 말이다. 괜히 헛수고만 했네.”
그리고 작은 수고는 큰 수고로 되돌아왔다. 두 놈팡이를 마주하고 한참 뒤의 일이었다.
“배를 멈춰라!”
“고, 공자님! 큰 배가 다가왔습니다.”
“또 뭐야?”
“이번엔 네가 나가보던가.”
한천은 느긋한 한 때를 방해하는 놈이 누군가 싶어서 밖으로 나갔고, 곧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왔다.
“비연! 이번엔 좀 많다!”
“에효. 뭔데 그래?”
여인들에게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계책이 실패했던 터라 다시 힘을 쓰고 싶지 않았다.
“같이 나가자.”
“이번엔 저희도 돕겠어요.”
“맞아요. 아깐 옥 공자께서 수고하셨으니, 이번엔 저희 차례죠.”
소선과 미까지 나선 터라 비연도 얼른 뒤따라가서 지켜봤다.
“워. 많긴 하네.”
일행이 타고 있던 배보다 조금 더 큰 배가 곁에 붙어있었고, 일단의 인물들이 이미 넘어온 다음이었다. 이들의 숫자만 다섯이었고, 옆에 큰 배에도 많은 수의 인원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넘어온 이 중에 가운데 서 있던 이가 나섰다.
“너희가 마태를 그 꼴로 만들었겠다!”
“마태? 아까 비연에게 맞은 놈인가?”
“아마도 그렇겠죠?”
“옥 공자도 참. 이름은 듣고 패셨어야지.”
“···이것들이 뭘 믿고 이렇게 목이 뻣뻣해!”
남궁가의 대공자와 그의 여동생, 제갈가의 금지옥엽까지 함께한 일행이다. 거기다 이곳은 안휘성의 황산이 아니던가. 목이 뻣뻣할 이유는 충분했다.
“···에효. 상대를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비연이 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행을 위해 나선 것이 아니었다.
“이런 개-.”
“거기 입 닥치고 조용.”
지금 막 욕을 내뱉으며 내공을 일으키려던 황산흑패의 패주를 위함이었다.
“넌 뭔데 끼어들고·········.”
선실에서 나오던 이를 돌아본 패주는 하던 말을 멈췄고, 손가락질 하던 몸도 굳어버렸다.
덜덜덜.
이제는 아예 몸을 떨기 시작했다.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수련관의 저승사자가 여길 왜!!!!’
불과 얼마 전까지 하오문의 수련관을 맡아 관리해온 비연이다. 하오문이 황산을 접수하며 황산의 흑패주도 하오문 수련관을 통과해야 했고, 거기서 비연에게 수련을 받았다. 너무나 지독한 수련에 수련생들은 모두가 비연을 저승사자라고 불렀었다. 수련관을 돌파하고 앞으로 쉬이 볼일이 없다고 여겼거늘 지금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비연은 잘 아는 사람을 만난 듯이 말을 건넸다.
“너 지금 거기서 뭐하니?”
벌벌 떨던 황산 흑패주는 비연의 음성에 정신을 부여잡고 후다닥 앞으로 뛰어들었다.
당연히 공격을 위한 도약이 아니었다.
쿵.
흑패주는 비연의 앞까지 달려와서 선상에 머리를 박고 뒷짐을 졌다. 완벽한 자세였다.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하긴 뭘 시정해?”
“뭐든 시정하겠습니다!”
“하아. 답답하기는···. 너 지금 뭘 잘 못했는지도 모르는구나? 지금 여기가 어디지?”
황산의 흑패주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찌 모르겠는가.
“황산의 신안강입니다!”
“그럼 저기 저 놈의 허리춤에 뭐가 달려있나 보여?”
머리를 박은 상태에서 옆으로 눈알을 돌리자 폭이 넓은 검집 끝이 눈에 들어왔다. 황산에서 저런 검을 쓰는 가문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 남궁가···.”
‘아까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비연만 나섰기에 선실에 남아있던 한천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 옆에 여인의 허리춤엔 뭐가 있는지 보여?”
두 여인 중에 허리춤에 뭔가를 꼽고 있는 여인은 하나였다. 제갈미의 허리춤엔 제갈가의 상징인 부채가 꼽혀 있었다.
“섭선···. 제갈가!”
“이제 알았어?”
“죄, 죄송···.”
사과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비연의 발이 흑패주를 차서 넘어트렸다.
퍽.
후다닥.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다시 머리를 박는 흑패주였다.
“시정하겠습니다!”
“······.”
비연은 답도 없이 다시 발을 들었다.
퍽.
후다닥.
“시정하겠습니다!”
“······.”
퍽.
후다닥.
“시정하겠습니다!”
“······기상.”
“기상!”
복창복명까지 확실했다.
“······.”
“······.”
“······.”
“······.”
다만 아직까지 하오문의 수련관 냄새도 맡아보지 못한 이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지켜보고 있었다.
“······.”
“······.”
“······.”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한천과 소선, 미도 마찬가지였다.
“저 분들에게 정중하게 사죄하고 조용히 돌아간다. 실시.”
“실시!!”
흑패주는 곧장 일행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제가 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뭐. 아직 실례까지는 아니었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그렇긴 하네요. 오라버니.”
“그런데 옥 공자님과는 어찌 알고 지내셨는지···.”
황산 흑패주는 비연이 고개를 젓고 있음을 보고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총동원했다.
“저, 저희 어려운 사정을 보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자리를 내려주셨고,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크나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하오문 수련관에서는 비연이 곧 법이었다. 수련장에서 먹고 입고 자는 것도 비연의 허락이 필요했고, 무공의 전수도 당연히 비연의 소관이었다. 또한 스스로 일어날 도움이란 무공을 익히 흑패로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의미였다.
“오오. 비연의 평소 행실을 보면 그러고도 남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사람이죠.”
“그런 인연이 얼마나 많으면 이렇게 만날까.”
“맞아요. 평소에도 많은 선행을 베푸신 것이 틀림없어요.”
“······.”
비연은 어처구니없는 일로 여인들에게 점수를 더 얻었다는 사실에 얼른 손을 휘저었다.
“가라! 얼른 가!”
“옙!”
.
.
.
황산 흑패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인의 배에 올랐고, 조직원들은 열심히 노를 저었다.
그리고 흑패주의 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 개새끼는 던져버려!”
“예! 패주!”
“자, 잠시만! 패주님! 아악!”
강을 헤엄쳐 황산 흑패에 소식을 전했던 놈팡이가 흑패 조직원들의 손에 들려 다시 강으로 입수했다.
첨벙!
“어푸!”
“저 새끼 추천한 새끼도 나왓!”
패주가 아끼는 조직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죄, 죄송합니다. 패주.”
“너였어? 이걸 죽일 수도 없고···. 네 삼 개월 간 월봉의 삼 할을 감봉한다. 불만 있냐?”
아끼는 조직원이 아니었다면 똑같이 배에서 던져버리고 또한 흑패에서 쫓아내버렸을 것이다.
“패주. 아까 그 분이 누구시기에···.”
황산 흑패주는 화선이 멀리 떨어졌음을 보고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네가 그걸 알아내면 내가 널 죽여야 하는데, 괜찮겠냐?”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겠습니다. 패주.”
하오문의 중추인물에 관한 것은 철저히 비밀을 지켜야 했다.
대신 다른 이들이 들리지 않게 조그맣게 말했다.
“너도 나중에 하오문에 더 깊이 속하면 알게 될 일. 지금은 궁금해도 참아라.”
“하, 하오문···.”
하오문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도 알고 있었다. 황산흑패가 하오문에 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조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불과 몇 명의 인원이 모든 조직원을 압도하고 흑패를 접수하지 않았겠는가. 당시 마주했던 하오문주의 무위는 경천동지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지금도 하오문주에게 맞아 하늘을 붕붕 날아 떨어져 내리던 조직원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저, 정말 죽다 살았습니다.”
오늘 하오문의 인물을 만나고도 멀쩡히 서 있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제발 애들은 가려 받아라. 어중이떠중이까지 다 받아주면 하오문에서 두고 보지 않는다.”
“명심하겠습니다. 패주.”
“네가 마누라 동생만 아니었어도 넌 오늘 나한테 뒈졌어. 새끼야.”
“···죄송합니다. 매형.”
패주가 괜히 아끼는 조직원이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