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의 용(龍)
***
이후 비연은 유람을 마치고 일행과 남궁가의 장원까지 함께 돌아왔다. 드디어 헤어질 시간이었다.
‘하루가 너무 길다···.’
힘든 하루를 끝냈다는 후련함이 가득한 비연과 달리 두 여인은 아쉬움이 가득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너무 아쉬워요.”
“조금 늦어도 뭐라 하진 않으실 텐데···.”
“푹 자야 피부가 고와지는 법입니다. 한천. 그녀들을 부탁해.”
“장원 대문 앞인데 부탁은 무슨 부탁. 알아서 잘 들어가겠지. 어린애들도 아니고.”
“오라버니는 이래서 장가나 가겠어요?”
“그래···. 쉽지 않겠다.”
소선과 미는 한참이나 친해졌는지, 눈앞에 한천을 두고도 함께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냥 알았다고 하면 될 일을···.”
“흥. 상관없어.”
월향과 인연을 이어가는 한천은 다른 여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연. 오늘 못 다한 얘기는 내일 다시 나누기로 하지.”
“그래. 한천.”
“!”
“!”
방금까지 한천을 흘겨보던 두 여인이 한천에게 매달렸다.
“오라버니···. 같이 가도 되죠?”
“저도요!”
내일도 옥 공자와 함께하려면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가 분명했던 것이다.
“왜, 왜 이래?”
“오라버니~~”
“우리도 같이 가요오오~”
“이거 놔아. 난 몰라!”
“잡아라!”
“거기서!”
비연은 대문을 넘어서 도망치는 한천의 뒷모습과 한천을 쫓아가는 두 여인도 눈에 담았다.
‘뭐···. 그리 나쁘지 않은 하루였어.’
문주가 시작한 인연을 자신이 이어가야 한다는 것에 조금 불편한 마음이 있었지만, 오늘 함께 지내고 보니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어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정말 새로운 인연이 생긴 느낌이었다. 순수함(?)을 가진 한천과 쾌활한 두 여인이 함께한 시간은 비연에게도 신선한 자극이었다.
‘···나름 재미있는 이들이야.’
비연의 마음에도 작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객잔으로 걷기 시작한 비연 곁으로 삼도상단의 인물들이 붙기 시작했다.
“상단주님은 돌아오셨느냐.”
“반 시진 전에 객잔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가자.”
“예. 공자님.”
객잔으로 돌아간 비연은 고요한 가운데 운기조식에 빠져 있는 송 영감을 만날 수 있었다.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뜬 송 영감은 비연이 들어와 있음을 알고 있었는지, 바로 물었다.
“별일 없었고?”
“···몇 가지 일들은 있었지만, 별일 아니었습니다.”
놈팡이 몇이 시비를 걸었고, 황산흑패의 패주를 만나기도 했지만 대세에 지장을 주는 일이 아니었던 탓이다.
“루방의 아이가 대기만 하다가 돌아갔다고 들었다.”
월향에 관한 것이었다. 월향은 사전에 계획된 대로 한천과 만나려 기다렸지만, 일정이 틀어져 돌아가야 했다.
“남궁가의 여식과 제갈가의 여식이 함께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곁가지에 불과한 일이니 상관없겠지만···.”
송 영감은 남궁가 대공자의 일보다 남궁가 장원에서 세 무림의 거두들과 나눴던 대화를 설명해야 했다.
“남궁가주와 제갈가주의 뜻이 확고해보였다. 어떻게든 너와 여식을 엮고 싶은 모양이야.”
“···오늘 둘의 태도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떨궈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은 내 탓도 있을 것이다. 남궁가주가 대련을 청하기에 월하답보를 보여줬거든. 남궁가주의 내공이 부족하여 자칫 일을 그르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디까지 보이셨는지요.”
“만월강림(滿月降臨).”
“······.”
만월강림을 보았다면 그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눈에 선했다. 월하답보의 후반부 첫 검식이지만, 현 무림에서 이와 같은 수준의 검식이 있다는 얘길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주를 포함한 하오문 수뇌부의 무공만이 이와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제가 익히지 않을 무공인데···.”
“네가 익힌 황룡살도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어차피 월하답보와 다르지 않은 수준의 도법이니까.”
“···내일은 제가 무공을 선보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예상이 맞을 수도 있겠어. 그들은 무공에 미쳐 있었다.”
“내일 무공을 시연해 달라고 하면 힘을 조절해 보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 그보다 제갈가에서 삼도상단을 청했다.”
송 영감이 그들과 어울리는 중에 들었던 특별한 제안이 있었다.
“제갈가도 남궁가와 같은 거래를 원하더구나. 남궁가와 같은 조건이다.”
“!”
“삼도상단이 단숨에 거상으로 성장할 기회다.”
“······.”
남궁가와 같은 조건이라면 제갈가와 관련된 모든 상회와 무관에 납품한다는 뜻이었다. 이렇게만 계속 성장할 수 있다면 중원 제일 상단에 올라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화산파 장문인도 화산파 내부에서 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연통하기로 했다. 잘하면 세 곳의 무림 방파와 거래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화산파까지···. 문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화산파는 솔직히 문주님의 공이 컸다. 문주님 때문에 삼도상단과 거래를 이어두고 싶어 했거든.”
비연도 익히 숙지한 내용이다. 이미 한천과 여인들에게도 월하검문의 계승자에 관해 흘리지 않았던가.
“···월하검문의 계승자. 이것도 말씀하셨군요.”
“화산파 장문인을 비롯해 그 이하의 제자들이 모두 문주님께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문주께서 가장 먼저 공을 들이신 곳이 아닙니까. 왕호 대신 제가 함께했으면 좋았을 것을···.”
“너는 용모가 너무···.”
“제 용모가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넌 어딜 가도 눈에 띄어. 네가 왕호 대신 꼽추 노릇을 했다면 사람들은 당장에 알아봤을 것이다.”
“······.”
용모가 너무 잘나도 문제였다. 왕호는 적당히 감추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평범한 인상으로 만들 수 있지만, 비연은 무슨 옷을 입혀놔도 눈에 띄는 용모였다.
“어쨌든, 문주께 말씀드리고 같이 화산파에 잠시 들러야 할 것 같다. 제갈가에 갔다가 다시 화산파로 가야하고 그 다음에나 서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휘유. 여정이 또 생겨버렸네요.”
남궁 세가의 일만 끝나도 조금은 수월해질 줄 알았는데, 일이 자꾸만 늘어갔다.
“특히 세 곳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비연은 이후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영단이겠지요.”
“그래. 이번에 남궁가주에게 준 다섯 개의 영단을 보고 제갈 가주와 무환 장문인가 얼마나 놀랐더냐. 이들도 앞으로 삼도상단이 하오문의 영단을 취급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중원 제일의 전장인 황금전장과 함께 하오문의 영단을 판매하게 될 삼도상단이다. 이것 하나로도 무림 세가에서 삼도상단과 관계를 맺을 이유가 충분했다.
“지금보다 더 바빠졌으면 바빠졌지, 수월할 날은 오지 않을 듯합니다.”
“······.”
앞날의 고난을 예상하는 비연에게 송 영감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다.”
“왜 주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말씀하십시오.”
“내게 함께하자고 하더구나.”
“?”
“삼도상단이 아닌 월하검문의 문주로 함께 무림을 경영하자는 제안이었다.”
남궁가, 제갈가, 화산파가 모인 일양(一兩)에 월하검문이 들어오길 원한 것이다. 그들은 월하검문을 더해 이가(二家), 일문(一門), 일파(一派)의 각 종주(宗主) 뜻하는 사종(四宗)으로 새로운 명칭을 정하기까지 했다.
“······.”
“아무래도 상단은 네가 혼자 꾸려나가야 할 것 같···.”
비연은 누가 들을지 상관도 하지 않고 본래의 호칭으로 돌아왔다.
“어르신! 그건 너무하잖습니까!”
“···미안하게 됐다.”
“삼도상단을 저 혼자 어떻게 하라고 그러신단 말입니까!”
“어차피 상단의 일이야 문도들과 함께하는 것이고···.”
“어르신이 삼도상단 꼭대기에서 무게를 잡고 대소사를 결정하셔야지요! 이미 문주님과도 그리 얘기되어 있었습니다만!!”
“문주님은 이 늙은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
“아오.”
송 영감의 말대로 호충은 무슨 말이든 수용할 것이다. 호충이 친조부처럼 생각하는 송 영감이 아니던가.
“너만 허락한다면 나도 마음 편히 갈 수 있지 않겠느냐.”
“잠시만······.”
비연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반짝였다.
“그들과 무림을 경영하신다고요? 무림맹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거기 누가 있는지 잊으셨습니까?”
무림맹에는 송 영감의 얼굴을 알고 있는 진가 형제들이 있었다. 남궁, 제갈, 화산파와 함께하다보면 무림맹에서 진호현과 마주칠 수 있지 않겠는가.
“진가장은 어쩌시려고요? 또한 진가장의 진호현이 무림맹의 맹주란 말입니다.”
“내가 어찌 그걸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송 영감은 무림맹까지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오늘 대화한 남궁, 제갈 가주와 화산의 무환 장문인도 같은 생각이었다. 네 방파의 종주를 칭하는 사종(四宗)은 수면 아래 감추기로 합의하였고, 한 문파와 두 가문을 칭하는 일양(一兩)으로 계속 무림 내에서 활동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일양(一兩)이라는 이름도 함부로 입에 올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무림맹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혹시 무림맹에 들어가더라도 활동하는 것은 문주님이 되실 것이야.”
“하지만 문주님은 하오문주로서···.”
“아니지. 문주님은 하오문이 무림맹에 속해있어도 맹의 일에 관여하실 수 없다. 너무 많은 관심이 집중될 테니까. 오히려 월하검문의 제자로 활동하시는 편이 더 수월하실 것이다. 진가장의 형제들 외에 누가 문주님을 주시하겠느냐. 게다가 일문의 계승자로 무공을 전수받았다는 명분까지 있으니, 높은 무공을 마음껏 뽐낼 수 있으실 것이다. 무공을 숨기는 하오문주와 달리 운신의 폭이 더 넓어지는 게지.”
“······.”
“대신 나는 맹 밖에서 이들과 자주 회동하며 무림의 대소사에 관여하려 한다. 문주님께서 결정하신 일을 전하는 수준이겠지만 말이다.”
“삼도상단 밖에서 활동하시다가 진가장의 인물들과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상단주 자리를 계속 지키시고 간간히 그들을 보시는 편이···.”
“아니야. 오히려 내가 삼도상단에서 상단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더욱 위험하다.”
송 영감은 자신의 욕심만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삼도상단이 하오문 영단의 판매처로 결정된 이후부터 중원 각지의 무림 방파가 모두 나를 찾고 있다.”
하오문 경매가 끝나고 부상단주를 통해 전해진 서찰만 한 가득이었다. 지금이야 중요한 볼일이 있다며 핑계를 댈 수 있지만, 영원히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한곳씩 마주해야할 사람들이고, 그 사이엔 무림맹도 존재했고, 셋째 호성의 중부전장과 둘째 호중의 서문세가도 있었다. 모용가나 다른 무림 방파는 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계속 이들을 피한다면 오히려 의심만 불러일으키겠지.”
“······.”
‘어르신 말씀이 옳다. 상단주를 찾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터이니···. 그 중에 진가장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
“나는 노환으로 상단주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하고,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문주님의 일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저도 자장 출신이온데···.”
문제는 송 영감이 자장의 진가장 출신이듯 옥비연도 자장 토박이라는 점이다.
“꼬질꼬질한 몰골로 배수패를 이끌던 너와 지금의 네가 같아 보일 것 같으냐?”
“···아까는 제 용모가 너무 눈에 띈다고 하셨습니다만?”
“···그때와는 많이 다르다. 경계심만 가득해서 눈알을 굴리던 당시의 네 모습과 지금 자신감 넘치는 너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야.”
호충이 자장에서 처음 옥비연을 만나러 갔을 때 송 영감도 곁에 있었다. 당시 배수패와 배수패의 우두머리인 옥비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당시 옥비연은 거지 굴의 왕초 노릇을 하는 대왕 거지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용(龍)이라 불러도 될 정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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