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5/232)

광견(狂犬)

***

‘지금은 용(龍)이라 불러도 될 정도지.’

허름하고 더러웠던 의복은 번쩍이는 비단 옷으로 바뀌었고, 언제 씻었는지 모를 정도로 더러웠던 얼굴과 몸은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무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겨우 삼류에 불과했던 비연이 지금은 고대의 무공을 익혔고, 하오문에서 수련관을 맡아 많은 이들을 가르치기까지 했다.

“···저는 자장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며 일부 손님들에게 얼굴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정 문제가 되면 삼도상단에 가서 출세한 것으로 하면 되겠구나. 그 동안엔 외조부의 명으로 세상 경험을 쌓았다고 해도 될 일이고···.”

“······.”

모든 논리가 완벽했다. 빠져나갈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진가장이야 가장 나중에 접견을 허락해도 될 일. 나머지 무림 방파의 일을 우선하면 당장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 제가 상단주를 맡아야 되겠습니까?”

“남궁가와 제갈가에서 네게 갖고 있는 호의를 생각하면 넌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더 퍼줄 것이야.”

“제가 두 여인 사이에서 얼마나 큰 고초를 겪을지도 생각해주셔야죠.”

“무림의 젊은 무인들은 인연을 맺고 싶어도 감히 시도하지도 못할 무림 세가의 여식들이다.”

“······.”

“또한 네가 삼도상단의 상단주로 올라서면 상방의 방주가 되니, 하오문의 많은 정보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 네 아비에 관한 것도 있을 수 있지.”

“······.”

비연은 일찍 철이든 다음부터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미움을 키워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홀로 풍진세상을 살아갔지만 그 마음은 하나도 희석되지 않았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그리 무심하게 어머니를 떠나버렸는지 꼭 찾아내고 말 것입니다.’

비연이 아버지를 찾고자 하는 것은 마음속 응어리를 풀고자 하는 것이지 핏줄을 향한 그리움이 아니었다.

“···그 부분만 마음에 듭니다. 찾아야지요. 꼭 찾고 말 것입니다.”

송 영감은 비연의 눈빛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움이 아니라 원망이었더냐?”

“어미가 겪은 고초를 녀석도 겪어야지요.”

“네가 원하면 그리 될 것이다.”

“······.”

비연은 대화를 더 이어가면 자신의 살기를 더 드러낼까 얼른 인사하고 자리를 피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대공자 일행과 있던 중에 황산흑패를 마주한 터라 녀석들에게도 대강의 일을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황산흑패라면···. 광구(狂狗)라는 녀석이었던가?”

미친개라는 뜻의 별호가 붙은 황산 흑패주였으나, 비연 앞에서는 배를 뒤집고 꼬리를 흔드는 순한 황구(黃狗)에 불과했다.

“예. 그 녀석이 황산흑패의 흑패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낮에 약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적당히 해라. 녀석도 하오문도가 아니냐.”

“알아서 하지요. 쉬십시오. 상단주님.”

“너도 일찍 들어와 쉬어라. 내일 또 남궁가의 장원으로 가야할 터이니.”

“예.”

***

비연은 무거운 마음으로 객잔을 나섰다.

그간 하오문에서 비연이 맡았던 일들이 주르륵 스쳐지나갔다.

처음 자장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던 일이 시작이었다. 그 전에도 배수패를 이끌었고, 그 배수패의 아이들과 함께 도박장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미를 느꼈었다. 하오문이 창설된 다음에는 문주님이 접수한 중원 각 지역의 흑패주를 비롯한 새로운 하오문도의 수련을 도맡아 관리하며 하오문의 무공 수준을 높이는데 전력했으며, 동시에 배수들의 방인 배방을 이끌기도 했다. 장위에게 넘겨줬지만, 여전히 자신의 배방의 방주가 자신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송 어르신과 상방으로 넘어와 일을 맡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배방으로 돌아가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일로 자신이 배방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형. 보고 싶소.’

아무리 많은 일을 맡아도 호충을 만나면 다 잘 풀릴 것 같았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의제가 되겠습니다.’

상단에서 일하라 할 때부터 각오한 일이기는 했다. 나이가 많은 송 영감이 오래도록 삼도상단을 맡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일찍 시작한다 생각하자.’

비연이 밖으로 나오자 경계를 서던 삼도상단의 무인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다시 나가십니까. 공자님.”

“쉬고 있어라. 금방 다녀오겠다.”

“심부름 시키실 일도 생길 수 있으니, 저라도 함께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보호를 위함이 아니라 귀찮음을 방지하기 위한 호위였다. 삼도상단의 무인도 하오문의 수련관을 돌파했고, 비연에게 직접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비연의 무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괜히 고생만 시키는 군. 그리하게.”

비연은 무인 한 명을 곁에 대동하고 길을 나섰다.

.

.

.

황산 시전은 저녁이 되었음에도 불을 밝힌 곳이 많았다.

“시전엔 어쩐 일로···. 사실 것이 있다면 저희에게 시키셔도 됩니다.”

“내가 마음대로 부려먹으려고 너희를 수련시켰더냐? 네가 맡은 일에만 충실해라. 너희는 하인이 아니다. 문주님도 하오문도를 함부로 하지 않는데, 내가 어찌 마음대로 부릴까.”

“공자님을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도 저희 임무입니다. 그래야 상단의 중요한 일에 힘을 쏟으시지요.”

“···딴엔 맞는 말이군. 하지만 오늘은 물건을 사러 나오지 않았다.”

비연의 걸음이 시전의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황산흑패에 볼일이 있거든.”

“황산흑패라면···. 광견이 패주를 맡고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광견(狂犬)이 아니라 광구(狂狗)다.”

어차피 미친개라는 뜻은 같았다.

“네가 수련관 몇 기였지?”

“저는 육기(六期) 수료생입니다.”

“그럼 광구가 십기(十期) 수료생이니···.”

“···십(十) 기수라면 제 손자의 손자뻘입니다.”

수련관의 수료 기수는 하오문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하오문도의 위아래를 구분하는 직급으로 가장 높은 위치의 문주가 있었고, 그 이하로는 방주와 단주들이 있었다.

나머지 하오문도는 모두 문도로 통칭했기 때문에 수련관의 수료 기수가 기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하오문은 문도 간에 위계를 두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알아서 서로의 위아래를 나누는 것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네가 한참은 이르구나.”

“한 해 이상 차이가 납니다. 까마득합니다.”

“큭큭. 까마득하기는···. 그럼 난 뭔데?”

수련관의 초창기 수료생인 일기(一期)도 벌벌 떨었던 수련관의 저승사자 비연이다. 이후의 수료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비연은 지극히 두려운 존재였다. 수료생들 사이에서 옥비연의 별호인 광도(光刀)를 입에 올리는 것도 금기시 될 정도였다.

“전에 동기 수료생들 사이에 도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 뭔데?”

“하늘 아래 두 개의 거성(巨星)이 있으니···. 하늘은 문주님이시고 두 거성은 사 방주님과 옥 공자님을 뜻합니다. 빛(光)과 그림자(影)를 따라 고난을 이겨내면 세상에 바로 설 수 있으리라.”

하오문 초기엔 사중환(영창:影槍)과 옥비연(광도:光刀)이 함께 수련관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둘을 따라 고난이 가득한 수련을 이겨내면 중원 무림에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인이 된다고 믿었고, 실제로 이들은 높은 수준의 무공을 익혀냈다.

“풋. 상단주님과 형수님이 서운하시겠어.”

“당시 저희가 두 분을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이후 문주가 조부처럼 따르는 상단주 송동석의 무위를 확인하며 거성 위에 더 큰 달(月)이 있음을 알았고, 루방의 방주이자 문주의 예비 부인인 황화진의 찬란한 미모를 보고 태양(日)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저희 육기(六期) 수료생이 두 분을 더해 지은 짧은 시도 있지요. 하지만 그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크흣. 어디 들어나 보자.”

“하늘(天) 아래(下) 일월(日月)은 무궁토록 빛(光)과 그림자(影)를 만드니, 하오문의 영광도 끝이 없으리라.”

“···너희 육기(六期)에 먹물이 있었냐?”

“예. 하나 있었습니다. 녀석이 우리 문의 수뇌부를 알아가며 입버릇처럼 뱉은 말이었는데, 간단하고 쉬워서 다들 귀에 익어버렸습니다. 지금은 흑림방 여명단에 몸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명단에 들어간 육기(六期) 문사는 흑림방의 방주가 된 왕호를 넣어 다시 시를 지었다고 한다.

[하늘(天) 아래(下) 일월(日月)은 무궁토록 빛(光)과 그림자(影)를 이루며, 흑림의 왕(王)은 언제나 하늘(天)과 함께한다.]

자기가 속한 방의 우두머리이니 왕호의 격(格)을 더 없이 높여버린 것이다.

“재미있게들 놀았네.”

한참 대화하며 걷다보니 벌써 황산흑패의 전각에 도달했다.

“넌 누구냐!”

전각을 지키는 황산흑패의 인물 앞에 삼도상단의 무인이 나섰다.

“너는 얼른 가서 패주를 모셔 와라.”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오른손을 복부 앞으로 가져가 옷섶으로 숨기고 간단한 수신호를 보여주며 한 말이었다. 이는 하오문 문도가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도록 만든 수신호였다.

“!!”

수신호를 알아보았는지 눈을 크게 뜬 녀석이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뒤로 돌아 달렸다.

“광견(狂犬) 교육은 잘 한 모양입니다. 공자님.”

“광견(狂犬)이 아니라 광구(狂狗)라니까.”

“저희 육기(六期)에서 중원 전 지역의 패주 목록을 정리하며 아는 놈들의 별호를 몇 개 손 봤습니다. 그래서 광견(狂犬)이라는 별호가 입에 붙어버렸습니다.”

“네가 전부터 아는 놈인가?”

“저는 하남성의 허창 출신이라 광견(狂犬)과 접점은 없습니다. 동기 중에 안휘성 합비 출신이 있었는데 녀석이 황산 흑패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서 바꿔놨습니다. 덕분에 이곳을 정리하신 문주님도 녀석을 광견(狂犬)이라 부르셨을 겁니다. 본래 성명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비슷하기는 하다만···.”

황산패주의 본래 이름은 곽건이었다.

“저기 오네.”

“저는 이제 제 역할로 돌아가지요.”

삼도상단 무인이 비연의 뒤로 가서 시립했고, 황산의 흑패주 곽건이 후다닥 뛰어나와 깊이 허리를 숙이며 포권지례를 보였다.

“······.”

뭐라 호칭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곽건은 낮에 보았던 신분을 기억해냈다.

“···옥 공자님을 뵈옵니다.”

“내가 삼도상단의 후계자로 왔으니 옥 공자가 옳다.”

“아. 안으로 뫼시지요.”

“같이 들어가지.”

비연은 전각 안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흑패주 곽건은 주변을 무른 터라 호칭을 달리했다.

“옥 관주님. 낮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수련관의 교관인 옥비연과 사중환은 수련생들 사이에서 관주로 불렸었다.

“흑패 조직원을 받는 기준이 있을 터. 수련관에서 이 부분도 교육한 것으로 안다만.”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는 모양새라 곽건은 바짝 긴장하며 답했다.

“···아직 수련관에 들지 못한 문도가 실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월봉을 감하는 것으로 벌을 주었고, 앞으로 조직원을 들이는데 실수가 없도록 당부했습니다.”

“혹시 잊었을까 싶어 다시 말하지만, 하오문은 하류 인생이 하나둘 모여 이룬 문파다. 무공을 조금 익혔다고 타인을 깔보고 험하게 대한다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혹여 그런 놈이 흑패의 문을 두드린다면···. 너는 그 놈을 두들겨 패서 돌려보내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관주님. 낮에 그 녀석들은 앞으로 흑패에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며, 황산에서 어설픈 짓도 시도하지 못하게 만들어 두겠습니다. 한 놈은 이미 관주님이 탈탈 털어버리셔서 남은 한 놈만 관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건 곽 패주가 알아서 할 일.”

“옙!”

“그보다 이쪽도 인사를 나눠야겠던데?”

비연은 호위 무사 역할에 충실한 육기(六期) 수료생을 소개했다.

“이쪽은 하남성의 허창 출신의 조저우라하네.”

“반갑습니다. 황산흑패 곽건입니다. 삼도상단에서 일하시는 모양입니다. 허허허.”

조저우는 마주 포권하며 빙긋 웃었다.

“···하오문 수련관 육기(六期) 조저우라네.”

“!”

깜짝 놀란 곽건이 얼른 인사를 고쳤다.

“수련관! 십기(十期) 곽건! 육기(六期) 선배님을 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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