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체
***
강여홍은 세 번째로 걸음을 옮겼고, 드디어 일의 진행을 볼 수 있었다.
“원로원에 계신 조부께서 의원을 그냥 돌려보냈다?”
“···예. 의원의 안색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 의원이 부친의 부고를 가장 먼저 알았다고 했지?”
“예. 일이 있었던 그날에도 의원과 의원의 수발 제자 둘이 원로원으로 들어갔고, 곧 부고가 전해졌습니다.”
호중은 뭔가 이상하드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부친의 죽음에 뭔가 기이한 연유가 있을 것 같은 직감이었다.
“무공이 절정에 이르는 부친이 중독으로 명을 달리하셨는데, 조부는 멀쩡하다?”
“······애초에 중독인지 아닌지도 검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 의원만 알고 있겠지요.”
“!”
“중독을 막으려 팔을 잘랐고 온 몸에 상처를 내 중독된 피를 빼내려고 했다고 들었지만···.”
강여홍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풀어냈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반대?”
“팔을 자르고 온 몸에 상처가 생길 정도의 일이 있었고, 이후 독에 중독되었다면···.”
“······.”
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호중도 공감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데 있었다.
“누가? 왜?”
“처음 원로원에서 의원을 찾았을 때는 그저 다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전부였고, 의원이 원로원에 들었지요. 이후에 태상가주께서도 몸이 좋지 않다는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두 분이 다투셨다면 가능한 일이지요.”
“!!”
“물론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고 추측일 뿐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가능성은 확실하군.”
‘하지만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가.’
비상한 머리를 가진 호중은 조부와 부친 사이에 있었을 일을 머리에 그릴 수 있었다.
‘조부의 성정은 불같고 부친은 지독한 면이 있지. 그 둘이 다투지 않고 지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호중도 둘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원로원의 둘이 다투게 될 일은 언제든 생길 수 있음이다.
‘처음 원로원에서 전해진 것은 분명 의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부였어. 하지만 곧 중독으로 바뀌었고, 곧장 부친의 부고가 전해졌다.’
그 사이에 조부는 의원으로부터 밖의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형은 맹주가 되었고, 진가장은 무림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또한···. 상승 무공! 그래! 상승 무공의 일은 진가장의 무인들 대부분이 알고 있으니 의원도 알았을 것이야. 모용가와 황실과의 관계 또한 전해졌겠지!’
“······.”
‘만약 둘의 싸움에서 부친이 상처를 입었다면, 조부는 훗날을 생각해서 후환을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조부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부친의 지독한 성정을 조부라고 모르겠는가. 호중은 어렸을 때부터 부친이 조부에게 맞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조부의 폭력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고, 부친의 지독한 성정도 이를 부채질했다.
‘조부가 바라는 것은···.’
부친이 죽은 대강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조부의 욕심도 읽을 수 있었다.
‘무림의 상승 무공 규제 철폐. 이것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면···. 마지막은 원로원!’
휙.
호중은 원로원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괴가 엉뚱한 꿈을 꾸고 있었군!’
“혹시 짐작 가는 바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내가 착각한 모양이야. 하지만 아무런 물증도 없이 조부를 의심할 수는 없는 일이네.”
‘부친은 이미 돌아가셨고, 그 죄를 조부께 뒤집어 씌워봐야 진가장의 이름에 먹칠하는 꼴만 될 것이다.’
“강 무사는 누구에게도 오늘의 일을 전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진가장의 명예와도 직결되는 일일세.”
“명심하겠습니다.”
“평소에도 원로원을 감시하느라 수고가 많네. 내 작은 정성을 보낼 터이니 앞으로도 수고해주게.”
“예. 제 입은 누구에게도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호성 도련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중이 보내 준다는 정성의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자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군.”
“앞으로 홀로 가주직을 수행하실 분께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호오. 거기까지 짐작하고 있었어?”
“이런 일은 아랫것들이 더 민감한 법이지요.”
“······.”
‘나름의 쓸모가 있겠어.’
호성을 치우려면 호성 근처에 있는 인물의 도움이 필요할 일도 있을 것이 아닌가.
“···자네 밑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나? 셋째에 속한 무사들 말일세.”
“중부전장에서 들어온 이들을 제외한 전부가 제 말을 듣습니다. 중부전장이 진가장의 무사들을 홀대하는 터라···.”
“······.”
‘쓸모 있는 정도가 아니라···. 월척이었군.’
호성을 내치는 일이 생각보다 더 쉬워지고 있었다.
“곧 가주의 수호신위를 둘 더 선발할 것인데, 강 무사가 그 자리에 적합하겠어.”
“······.”
‘내가 진호중의 밑에 들어가 있다면, 맹주님의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호현을 따르기로 결정한 강여홍의 내심을 어찌 호중이 짐작할 수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가주님.”
“물론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해주어야겠지만 말이야.”
“···여기까지 온 제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셋째 놈의 비위부터 찾아보게. 셋째에게 못 찾겠거든 그 어미의 비위를 찾으면 될 것이야.”
“예! 가주님!”
상을 치르는 진가장은 겉보기에만 침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물밑에선 야망을 향해 달리는 이들로 분주했다.
***
일단의 무리가 자장으로 진입했다. 이번에도 진가장으로 조문가는 무림인 일행이었다.
“그나마 서안에서 멀지 않아 다행이네.”
유도영은 수련관에서 열심히 무공을 익히다가 문주와 패방주에게 새로운 명령을 듣고 자장으로 출발했다. 본래 강소성 남경에 머물다 안휘, 하남을 거쳐 섬서까지 왔기에 섬서 내의 이동은 오히려 짧다고 느껴진 것이다.
“자장에 진입합니다. 단주님.”
“······.”
유도영은 자신 곁에 포진한 하오문의 무인들 중 하나의 말에 바짝 신경이 곤두섰다. 서안에서 오는 내내 가시방석이었다.
“···선배님. 그냥 편히 하시라니까요.”
수련관에 들고 얼마 지나지 않은 유도영에게 이미 수련관을 수료하고 하오문의 무인으로 일하는 이들은 감히 얼굴도 마주하기 어려운 대 선배였다.
“······임무는 수련관 기수와 상관도 없거니와 단주님은 아직 수료생도 아닙니다만?”
“에효.”
“또한 수련관 기수는 사석에서나 통용되는 기준입니다. 괘념치 마시고 무인들에게 편히 하십시오.”
“제가 졌습니다.”
유도영은 두 손을 들어 버렸다.
“이미 자장에 진입했으니, 저도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기로 하지요.”
“곧장 진가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유도영은 수련관 기수를 잊고 자신이 이들을 이끌고 있음에 집중했다.
“···이번 임무의 중요성은 이미 알고 있을 터. 문주님과 패방주께서 지시하신 일은 보안을 지켜야 하기에 자세한 사항을 다 설명할 수는 없으니, 혹여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겨도 나를 믿고 따라주길 바랍니다.”
““예! 단주님.””
***
진호현은 하오문에서 조문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마중 나왔다. 유도영은 진호현을 비롯한 무림의 인사들이 그려진 용모파기를 숙지하고 왔기에 진호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하오문의 유도영이라 하옵니다.”
“흠. 처음 뵙는 분이군요.”
하오문주가 직접 올 줄 알았는데, 유도영을 비롯해 일행 중에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문주님께서도 직접 오려 하셨지만, 많은 무림의 인사들과 불편한 일이 있었던 까닭에 저를 대신 보내셨습니다. 문주님은 일부러 걸음하지 않으셨으니, 부디 사과의 의미로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거기까지 배려하실 줄이야. 다음에 하오문주를 만나면 당시의 일을 다 잊었다 말씀드리겠소. 허허허.”
‘···당장은 웃어주지만,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오문주.’
진호현이 그날의 수치를 어찌 잊었겠는가. 진가장을 위해 하오문과 손을 잡기로 했지만, 훗날 모조리 갚아줄 각오였다.
‘···문주님의 말씀대로군.’
유도영은 진호현의 웃는 낯 속에 숨겨진 의뭉스러운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진호현의 성정에 관해서 듣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진호현의 적의를 깨닫기엔 충분했다.
[맹주 진호현은 언제나 호방하고 진중한 모습을 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 시커먼 놈이지. 유 단주는 녀석의 겉모습에 속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 문주님.’
진호현은 유도영이 하오문에서 높은 위치가 아님을 알고도 예를 거두지 않았다.
“그나저나 먼 길을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하오문 일행을 위해 따로 별채를 준비해두었습니다. 또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저는 실무를 진행하려 왔사옵니다. 맹주님과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지요. 바로 진가장의 총관님을 뵙고 상세한 일을 의논하겠습니다.”
‘하오문주가 바짝 숙이라고 아랫사람을 보낸 모양이군.’
진호현의 착각이었지만,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편하신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별채는 다른 무림 방파의 인사들과 마주하지 않도록 분리해 두었으니, 편히 쉬십시오. 진가장의 총관도 별채로 보내겠습니다.”
경매를 통해 조금 희석되긴 했지만, 그들이 거창하게 패배하고 배상금을 물어준 일은 여전히 이들의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그런 하오문과 맹주가 따로 만나 금전적인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맹주로서의 위신에도 금이 갈 일이었다.
무림맹의 주요 방파들 때문에 일부러 별채를 준비한 것이다.
유도영도 진호현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다.
“···되도록 외부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현명한 분이 오셔서 제 마음이 놓입니다.”
“그저 맹주님의 뜻에 따를 뿐이옵니다.”
“진가장의 무인을 따라가시면 될 것입니다.”
***
“여기가 하오문에 제공되는 별채입니다.”
“······.”
진가장의 무인이 안내해준 별채에 도착한 유도영은 별채라고 말하기 어려운 초라한 가옥을 마주했다.
“대부분의 별채가 붙어 있는 까닭에 남은 곳은 이곳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예전에 막내 도련님이 사용하시던 곳입니다.”
“!”
유도영은 진가장의 막내 도련님이라는 말에 눈을 치켜떴다.
‘이곳이 상방 방주님의 제자가 머물던 곳이구나!’
진호충이 하오문주와 동일인 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하오문의 삼도상단을 맡고 있는 방주와 그의 제자 진호충에 관한 것은 알고 있었다. 이는 외부에 알려진 일이라 정보단주인 유도영도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진가장에 살면서 오래도록 핍박 받았고, 화산파에도 들지 못해 결국 방주의 제자로 들였다고 했던가···.’
“고맙네. 그나마 청소는 해 두었군.”
“아무도 관여치 않다가 최근에서야 청소를 했지요.”
“···알았네. 그만 가보시게.”
유도영이 허름한 가옥으로 들어가 살피니 작은 앉은뱅이책상 하나와 책장에 꽂힌 서책들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본 하오문 무인들은 저마다 얼굴을 찌푸리며 한마디씩 했다.
“···해도 너무하는 군. 하오문 대접이 형편없어.”
“인원이 많지 않아 다행이지···.”
“단주님이 머물 방이 이 정도면 다른 방은 대체 얼마나 안 좋은 거야?”
“······.”
유도영의 눈엔 전혀 달리 보였다.
‘···익숙하다.’
과거를 준비했던 자신도 이와 같은 방에서 학문을 익히며 오랜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흐흡. 하아.”
방에서 나는 먹 향과 꿉꿉한 책 냄새조차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진 공자도 과거를 준비한 모양이구나.’
“그대들은 다른 방을 찾아서 얼른 짐을 풀고 임무에 충실하시게. 나는 여기서 머물지.”
“예. 단주님.”
무인들이 나서고 유도영은 책장의 서책을 한 권씩 꺼내봤다.
“방주의 제자가 학문을 깊이 익혔었군.”
그가 읽었던 성현의 책과 요약본을 보니 어디까지 학문을 익혔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무난하게 급제할 실력이로구나.”
하지만 학문의 깊이와 과거급제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자신만 같아도 깊이 학문을 익혔지만, 관부와 인맥이 없어 몇 번이나 낙방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
유도영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지우려 서둘러 책을 덮었다.
탁.
그리고 책장을 뒤로하고 자신의 짐을 풀기 시작했는데, 유도영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
후다닥.
짐을 놓고 돌아선 유도영의 손이 책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까 보았던 서책을 다시 들춰보기 시작했다.
“어, 어째서···.”
책을 뒤로 계속 넘기며 확인했지만 아까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같은 것이 있었다.
‘문주님의 필체가 왜 여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