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232)

삼백만

***

문제는 필체에 있었다. 성현의 글을 따라 쓴 서책의 필체는 하오문주의 필체와 너무나 똑같았다.

‘사람의 필체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게다가 과거를 공부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유려한 필체를 갖고 있다는 것도 이상할 일! 문주님의 필체가 왜 그리 아름다웠는지 이제야···.’

과거 유도영은 문주 송재호의 필체를 보고 상당한 수준의 서예를 익혔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서예를 따로 익히지 않고는 그런 정갈한 필체를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과거를 공부하는 학사들도 상당한 수준의 필체를 보이는데, 오래도록 명문을 읽고, 보고, 따라 쓰면서 저절로 익혀지는 것이었다.

‘···사중환 패방주, 옥비연 전 배방주와 현 배방주인 장위, 개방의 후개 말동···. 문주님의 배필이신 루방주···.’

유도영의 뇌리에 이들의 정보가 순식간에 떠올랐고 또 조합되었다.

‘이들은 이곳 자장 출신이다! 하오문의 중추가 대부분 자장출신인데, 자장에 본장을 둔 진가장의 막내가 우연한 기회에 상방주의 제자로 들어갈 확률은 얼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일부러 제자로 들이지 않는 이상···.’

지금 눈앞에 펼쳐진 서책의 필체는 분명 상방주 제자의 필체였고, 이는 문주의 필체이기도 했다.

‘그럼 진호충과 문주님이 동일인?’

나이부터가 완전히 달랐지만, 동일인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도 이상했다. 문주가 진가장의 막내와 동일인이라 가정하면 모든 의문이 맞아 떨어졌다.

‘하오문은 전 무림의 실전된 무공을 되찾아주었다. 무림에 알리지 않은 무공 중에 얼굴을 바꾸는 무공이 없었을까? 문주님의 무공은 천의무봉에 이를 정도가 아니었던가. 뭐든 빠르게 익히셨을 것이야.’

“······.”

탁.

다시 서책을 덮어 책장에 꼽은 유도영은 다시 짐을 풀기 시작했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진가장을 도모하는 주체는 분명 문주님이다. 이제 진가장은 문주님의 것이야!’

하오문이 왜 진가장을 집어 삼키려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확실하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오문의 중추만이 이 정보를 알고 있었겠구나.’

자신이 왜 몰라야 했는지도 이해했다. 누구도 몰라야할 하오문의 최대 비밀이었다.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진가장의 막내가 무림에서 가장 거대한 문파를 일으켰다?’

떠들고 다닌다 한들 누가 믿어주지도 않을 정보였다.

‘비밀은 지킨다. 대신! 진가장은 확실히 도모할 것이다.’

유도영의 눈빛이 달라졌다. 윗선에서 시키는 일만 하고 떠나려 했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안 탓이다.

***

여전히 진가장의 총관을 맡은 사마충은 진호현의 명에 하오문 일행을 만나러 왔다.

“반갑습니다. 총관 사마충이라 합니다.”

“하오문의 유도영이옵니다.”

“많은 분들이 진가장에 손을 내밀어주셨는데, 맹주님이 하오문의 손을 잡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

유도영은 진가장의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기에 사마충의 말이 허장성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진가장의 자금력은 완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고, 중부전장도 더 이상 진가장에 자금을 융통해주지 않겠다고 나선 판이었다.

물론 중부전장이 자금을 융통해줄 수도 있다는 정보도 흘렸는데, 거기엔 조건까지 걸려 있었다. 셋째 호성이 진가장의 단독 가주로 올려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렇겠지요. 무림의 지존이신 맹주님의 본가가 아닙니까. 진씨 세가와 연을 이어두고자하는 상단과 전장이 부지기수였겠지요.”

“허허허. 그렇습니다.”

“하오문도 진씨 세가의 저력을 잘 알고 있지요. 산서에 진출한 진가 무관과 섬서성 전역에 퍼진 진가의 상회와 표국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들만 잘 운영해도 진씨 세가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것입니다.”

“······허허.”

산서에 진출한 진가의 무관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고, 산서에 진출하느라 인원을 뺐던 섬서성의 상회와 표국도 지난날에 비해 저조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미 시장에서 신뢰를 잃은 탓이다.

“게다가 이번에 대단한 비급을 싸게 손에 넣으셨지요. 상승 무공과 섬서 땅에 가진 영향력을 더하고 마지막으로 무림맹의 맹주님까지 생각하면···. 어휴. 어째서 진가장이 저희 하오문의 손을 잡아주셨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지요. 진씨 세가의 저력은 정말···.”

‘더 이상은 원하지 않아!’

사마충은 유도영의 말을 끊어버렸다.

“···금칠은 충분히 하신 것 같소만, 이제 조금 더 생산적인 대화를 하도록 합시다.”

“예. 총관님.”

‘내가 이런 자들을 한두 번 겪어 봤을까.’

사마충은 일단 크게 지를 생각이었다.

“백만 냥. 하오문은 어렵지 않겠지요? 허허허.”

‘이보다 줄이려 하면 이율을 낮추거나 조건을 걸면 될 것이다.’

하오문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렇게 거대한 자금을 내주고 싶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하하. 농이 과하십니다. 하하하. 백만 냥이라니요.”

유도영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어렵겠소?”

“진가장은!!”

갑자기 터진 우렁찬 목소리에 사마충이 움찔했고, 유도영은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중원 무림을 대표하는 맹주님의 가문입니다! 고작 백만 냥 이라니요!! 삼백만 냥도 내드릴 수 있습니다!”

“!!”

“진가장에 얼마가 필요하건 하오문은 내드릴 요량입니다. 농으로라도 진가장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마충보다 유도영이 진가장의 인물로 보일 지경이었다.

“···정녕 진씨 가문에 삼백만 냥을 내줄 것이오?”

“하오문은 진가장이 가진 산서 지역의 땅과 무관을 제외하고 섬서성 내에서 진가장이 소유한 전답과 장원, 상회, 무관만을 담보로 필요한 자금을 내어드릴 것입니다. 융통한 자금에 대한 담보물은 매년 다시 검토할 것이나, 원금과 이자가 제 때 들어온다면 계속 이를 유지할 것입니다.”

이 조건은 이미 하오문에서 결정한 내용이었다.

“···흠.”

사마충도 남의 돈을 담보도 없이 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담보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산서에 새로 지은 무관을 제외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곳의 무관은 새로 지었기에 담보물의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산서를 제외한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가장이 산서진출에 공을 들인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곳의 무관은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담보로 잡는다면 진가장의 발목을 잡는 모양새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오문은 진심으로 진가장의 발전을 원합니다.”

문주가 산서의 진가장 무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했었다. 그곳이 마교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문주의 말이라면 콩이 밭이라고 해도 믿을 유도영이다.

사마충은 하오문을 향해 가졌던 경계심이 눈 녹듯이 사라짐을 느꼈다.

‘진정···. 진정 이 놈들은 호구로다.’

하오문을 만만하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허허. 하오문은 정녕 진가장을 위해주고 있었구려. 하오문주의 뜻을 잘 알겠소.”

“저는 진가장의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 무엇보다 저희가 진가장을 위하고 있다는 것만 맹주께 잘 말씀드려주십시오.”

“염려할 것 없소. 맹주님의 뜻은 곧 진가장의 뜻이 될 것이오.”

***

사마충은 곧장 진호현을 찾아갔고, 하오문이 제안한 내용을 전했다.

“······뭐라? 삼백만?”

중부전장에 진 이백만 냥의 빚보다 더 큰 금액이었다.

“예. 맹주님.”

“하하. 사마 총관이 유능한 것은 알고 있었네만···.”

사마충이 하오문에서 삼백만 냥을 얻어낸 성과를 모두 자신의 공으로 돌린 것이다.

“하오문에서 삼백만 냥을 융통하는데 들어가는 담보에서 산서의 무관을 빼기도 하였지요.”

“허! 산서에 새로 지은 무관들까지 제외했다?”

“연륜의 차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하하. 사마 총관이 쌓아온 연륜을 누가 당해내겠는가.”

사마 총관은 미소를 지으며 길게 읍했다.

“정말 대단한 성과로다. 사마 총관은 하오문의 멍청이가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얼른 확정해야 할 것이야.”

“예. 맹주님. 바로 가주의 수결을 진행하겠습니다.”

.

.

.

아직까지 진가장은 공동가주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하오문과의 금전 계약에 세 가주의 수결이 필요했다. 유도영은 잔뜩 긴장한 모양새로 세 가주를 마주했고, 어렵지 않게 수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형님들. 그럼 중부전장은···.”

마지막으로 수결한 호성은 이제 중부전장이 진씨 가문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는지를 물었고, 호현과 호중은 비웃음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네 어미의 참견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중부전장의 노괴도 더 이상 진가장에 간섭할 수 없겠지.”

“후우.”

호성은 자신의 수결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공동가주로 내세울 것은 중부전장 밖에 없었는데, 제 발로 자신의 가장 중요한 힘을 걷어찬 꼴이었다.

유도영은 수결한 서류를 품에 넣고 말했다.

“세 가주님들은 삼백만 냥의 채무에 각자 일백만 냥씩 보증을 서셨지만, 염려하실 일은 없으실 것입니다. 이미 담보로 설정한 진가장의 전답과 장원, 상회와 무관으로 충분할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첫째 호현과 셋째 호성의 일을 예상하여 채무 서류에 기입한 문구도 다시 거론했다.

“혹여 공동가주님 중에 몇 분이 공동가주에서 내려오는 일이 발생하면 남은 가주님께로 이 보증이 넘어간다는 사실도 기억해주십시오. 이미 맹주님께서는 가주가 아닌 무림맹의 맹주이시니 남은 두 분께로 보증이 넘어갈 것입니다. 대금을 보증할 수 있는 분이 진씨 세가의 가주님이 되시는 것이지요.”

호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호중과 호성은 서로를 의식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형이 아닌 내가 가주가 될 것이다.’

‘···네 목숨만은 살려주마.’

“상 중에 상주님들의 시간을 이리 빼앗는 것도 예의가 아닐 터. 저는 바로 하오문으로 돌아가 문주님께 말씀드리고 제 날짜에 대금을 보내드리지요.”

“어서 가보시게. 하오문주께 안부 전해주시고.”

“예. 맹주님. 부디 무난히 상을 치르시고 마음을 추스르시기 바랍니다.”

그냥 돌아서는가 싶었던 유도영이 잊은 것이 있다는 듯이 돌아섰다.

“아. 한 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말씀하시오.”

“제가 과거 학문을 익힌 터라, 별채의 서적들이 무척 탐이 났답니다. 별채의 서적이 필요 없으시다면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시게.”

“어차피 별채에 남겨둬 봐야 먼지만 쌓일 것이니···.”

“그 자리를 다른 용도로 써먹을 수 있겠습니다.”

학문과 거리가 먼 세 가주에게 성현의 서적들은 하등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유도영은 별채에 남은 서적을 모조리 챙겨 진가장을 나설 수 있었다.

‘이것이 가장 중하다.’

문주의 체취와 필체가 가득한 이 서적들은 앞으로 유도영의 보물이 될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진가장과 하오문 사이의 금전 계약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툭.

유도영은 자신의 품에 들어 있는 문서의 감촉을 확인하며 뿌듯함을 숨기지 못했다.

‘너희가 진가장의 가주로 얼마나 오래갈 것 같으냐?’

이후 진가장에서 일어날 일이 유도영의 머리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첫째 진호현은 무림맹으로 가며 가주직을 내려놓을 것이고, 셋째 진호성은 곧 둘째에 의해 내쳐질 것이다. 또한 둘째 진호중은 훗날 진가의 담보물을 재평가하며 내려갈 담보물의 가치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삼백만 냥의 담보가 백만 냥으로 떨어지면 남은 이백만 냥을 오롯이 갚아야 했는데, 진호중의 외가인 서문 세가가 도와도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백만 냥을 갚을 길이 없으니, 진가장이 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오문이 진가장을 망하게 하려고 일을 꾸미지 않았음이다.

‘남은 이가 진가장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

본래라면 남은 가주가 없어야 했다. 첫째와 셋째가 떨어져 나가고 둘째까지 하오문의 채무를 모르겠다고 한다면 대체 누가 남겠는가.

유도영은 답을 알고 있었다.

‘바로 문주님!’

진가의 세 가주가 수결한 서류 바로 밑에는 진호충의 이름도 있었다. 오늘 수결을 받지 못했지만, 엄연히 진가장의 공동가주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진가장에 수결할 문서에 진호충의 이름을 넣으라는 명을 문주에게 들었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전부 알 수 있었다.

‘문주님이 수결하고 책임을 지겠다며 나서면 둘째는 방법이 없을 터. 그럼 진가장의 일은 끝이다.’

진가장을 접수하고자 하는 호충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호충이 진가장을 차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유도영의 생각과 조금 다른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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