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232)

유람의 끝

***

좋은 말을 나무에 묶고 강가를 거니는 네 젊은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계곡의 물이 흐르는 것과 높은 산악을 돌아보며 걷고 있었는데, 부호의 자식들이 유람을 나온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넷 중 한 명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지?”

“이렇게 나왔는데, 그냥 갈 수야 있나. 세상 구경도 하고 벗과 술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

비연은 한천의 구김 없는 표정을 보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유람은 충분히 했잖아?”

비연의 한숨에 곁에 있던 두 여인도 한마디씩 했다.

“공자님. 저희와 유람하는 것이 싫으세요?”

“저희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기한 것들 천지라고요. 제갈가의 방구석에 갇혀있는 것보다 백배는 좋아요.”

“······.”

‘물론 그러시겠지.’

옥비연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이 시작된 때는 제갈가에 도착하고부터였다.

“진씨 세가의 전대가주가 죽어?”

“예. 가주님.”

제갈가에 도착한 제갈진은 진씨 세가의 전대가주 진원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움직였다. 삼도상단과의 계약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끝내고, 남궁가주와 함께 움직이겠다며 가버린 것이다. 계약을 마친 송 영감도 진가장의 부고 소식에 놀라 상단 일행을 이끌고 서안의 하오문 본단으로 출발해버렸다.

또한 제갈가주는 남은 비연의 일행에게 중원을 유람하라는 명을 내렸기에 비연이 이들을 이끌고 다녀야 했다.

물론 비연은 원치 않는 일이었다.

‘이것들을 어떻게 떼어 놓아야···.’

비연은 중원 유람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상방의 일을 인계받아야 했는데, 이들 때문에 하오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삼도상단과 하오문의 관계는 이들이 아직 알아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자님. 우리 조금만 더 놀아요.”

“맞아요.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겠어요.”

“···각자의 가문과 매달 방문하기로 약조 했습니다만?”

“······.”

“······.”

“이렇게 유람하다가 상단의 일은 대체 언제 진행하겠습니까? 두 가문에 납품할 물건들을 준비하자면 시일이 빠듯하단 말입니다.”

한천은 예나 지금이나 초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에이. 그걸 네가 왜 준비해? 네가 시키기만 하면 상단의 유능한 이들이 알아서 할 것을.”

소선도 한천을 거들며 말했다.

“맞아요! 그리고 상단주님이 먼저 가셨으니 알아서 하시겠지요.”

제갈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좀 늦어도 상관없답니다. 천천히 준비하셔요.”

“······.”

비연은 결국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이 핑계가 아니면 귀찮은 이들을 떼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외조부의 연세가 있으셔서 상단주 자리를 제게 물려주신다고 했단 말입니다.”

“뭐?”

“그, 그래요?”

“···벌써 상단주에 오르시다니.”

“이미 외조부께서 두 분 가주님과 말씀을 나누셨다 들었습니다. 하여 제 마음이 조급합니다. 어서 상단주께 가서 업무를 배우고 다음 상행을 준비해야 한단 말입니다. 게다가 하오문 영단으로 인해 중원의 모든 무림 방파가 삼도상단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상단주가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

“······.”

하나 같이 맞는 말이라 셋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여태 제갈가주님의 명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더 이상은 어렵습니다. 진정 유람을 더 하시려거든 여기 한천이 이끌어줄 터이니, 조금 더 유람을 즐기시지요.”

“···에이. 한천 오라버니와 같이 다니느니 혼자 다니고 말지.”

“맞아. 옥 공자님이 없으면 의미 없다고요.”

“왜? 내가 뭐 어때서?”

한천은 배를 내밀며 항변했지만, 날아든 소선의 주먹에 강제로 배를 집어넣어야 했다.

퍼억.

“꺽!”

“나서길 왜 나서?”

“이 녀석은 걸핏하면 오라버니를 때려?”

제갈미가 섭선을 꺼내 흔들며 말했다.

“···저도 참고 있답니다. 소선이 나서지 않으면 제가 나설 참이었어요.”

오래 유람한 만큼 제갈미와 상당한 친분을 쌓았지만, 말 그대로 친분이었지 남녀 간의 정은 아니었다. 한천에겐 소선과 같은 여동생이 하나 더 생긴 것과 같았다.

“이것들은 맨날 나만 갖고···.”

“됐고! 어쨌든 유람 끝! 각자 집으로 갑시다!”

비연의 말에 두 여인의 입 꼬리가 축 쳐졌다.

“히잉.”

“공자니임.”

둘이 우는 척하며 매달렸지만, 비연은 단호했다.

“더는 안 됩니다.”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진가장의 부고는 비연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장 가서 일의 경과를 듣고 싶었다.

비연의 단호한 답에 두 여인은 우는 연기를 멈췄고 소선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하세요.”

“약속?”

“옥 공자님은 저희 남궁가의 장원으로 먼저 오세요.”

“······.”

제갈미는 화들짝 놀라 반박했다.

“아뇨! 제갈가로 먼저 오셔야 해요!”

“······.”

‘이것들이 또 시작이네.’

“제 몸은 하나입니다. 제가 몸을 쪼개서 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비연의 말에 소선과 미가 서로를 노려봤다.

“너 아까 분명 늦게 와도 된다고 했잖아!”

“그건 그때 얘기지! 지금은 아냐!”

“으르릉.”

“캬흥!”

한천이 둘의 싸움을 효과적으로 말렸다.

“비연. 얘들 좀 봐. 크하하하. 웃기지 않냐?”

“오라버니가 더 미워!”

“맨날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아무리 서로 다투고 경쟁해도 가장 미움 받는 사람은 한천이었다.

두 여인이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자, 한천은 후다닥 도망치며 비연을 불렀다.

“야! 나 좀 살려줘!”

“···넌 평생 그러고 살아라.”

잠시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헤어질 시간은 다가왔다.

“···우리 또 언제 봐요.”

“히잉. 가기 싫다.”

“에이. 내 잘난 얼굴이 다 망가졌어.”

한천은 강가에서 얼굴을 비춰보며 두 여인에게 맞은 곳을 살피고 있었다.

“앞으로 자주 뵐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중엔 지겨우니 더 늦게 오라 하실 지도 모르지요.”

“그럴 일은 없을 걸요?”

“맞아요! 옥 공자님은 매일 봐도 새롭다고요.”

“······.”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귓등으로 들었구나.’

비연은 여인들에게 어떤 배우자를 만나야 할지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명했지만, 여인들의 관심은 비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얘길 할 때마다 눈이 초롱초롱해져서는 자신만 바라봤다.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생각보다 거칠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인은 언제나 이득을 위해 얼굴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의 제 모습도 거짓된 모습이지요.”

비연은 자신을 깎아 내리며 강조했지만, 이미 이들의 마음엔 다른 누군가가 들어올 빈틈도 존재하지 않았다.

“솔직하기도 하셔라. 남자는 거친 맛도 있어야죠.”

“오히려 상인으로선 올바른 처세라고 할 수 있지요. 착해서 손해만 보면 그게 더 문제라고요.”

“······.”

비연은 더 이상 얘기해봐야 자신의 입만 아프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천을 불렀다.

“한천!”

“왜!”

“난 간다. 말은 네가 알아서 제갈가에 돌려줘.”

“말을? 그럼 넌 어떻게 돌아가려고?”

“튼튼한 두 다리가 있다.”

“서안까지 달려간다고? 미쳤어?”

비연은 한천의 말에 답하지 않고 여인들이 붙잡기 전에 얼른 걸음을 떼며 말했다.

“다들 또 봅시다. 그럼 갑니다!”

파앙!

“······.”

“······.”

“······.”

비연의 신형이 주욱 늘어나며 멀어지는 모습에 셋은 멍하니 바라만 봤다.

셋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한천이었다.

“···저렇게 가면 서안까지 금방이겠네. 휘유.”

왜 말을 타지 않고 뛰어가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달리기를 오래 잘하면···.”

“밤에도 오래오래···.”

두 여인은 엉뚱한 상상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어머! 넌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왜! 너도 나랑 같은 생각 아니었어?”

“나, 난 그냥 무공이 상당하겠구나 했었다고!”

“거짓말! 너도 분명 그 생각을···.”

“어린 것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오라버니도 말 타지 말고 뛰어 오세욧!”

“내가 왜!”

“나중에 새언니 될 사람을 위해서라고욧!”

한천은 정말 달리기가 그 일과 관련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거 진짜야?”

.

.

.

비연이 떠난 이후 세 명이 된 일행의 모습은 볼만했다.

두 여인이 한 마리씩 말을 끌고 가는 동안 한천은 곁에서 숨을 헉헉거리며 뛰고 있었다.

“허억. 허억. 언제까지···. 허억. 뛰어?”

“······.”

“······.”

두 여인은 답도 없이 멍하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마음속엔 여전히 비연이 남아 함께 말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야! 이제 말도 안 하냐? 같이 가! 허억.”

떠난 줄 알았던 비연은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잘 가라. 또 보자.”

홀로 일행의 뒷모습을 지켜본 비연은 그제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까완 다른 느릿한 걸음이었다. 그러다가도 다시 뒤로 돌아 일행이 간 방향을 돌아보기도 했다.

‘···걱정이 되서 그러지. 걱정이!’

***

옥비연이 서안으로 출발하기 전 송 영감이 이끄는 삼도상단이 서안의 하오문 본단에 도착했고 문주 호충은 내실에서 송 영감을 마주했다.

“다 늙어서 고생이 많네.”

“문주님. 이 늙은이에겐 하루하루가 새로운 경험이고 자극이옵니다.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입니다.”

호충에게 무공을 선물 받은 때부터 지금까지 새롭지 않은 날이 없었다. 종복으로 살던 과거와 상단주와 문주로서 무림의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금은 상전벽해라는 말이 잘 어울릴 거대한 변화가 아니겠는가.

“남궁가에서 대우 좀 받으셨나봐? 하하하.”

“······.”

호충의 말이 사실이라 송 영감은 고개만 숙였다.

“비연은 어쩌고 혼자 왔어?”

“두 가문의 아이들과 친분을 나누라 하였습니다. 두 가주들이 하도 성화라···.”

“얼씨구. 다들 바빠 죽겠는데, 그 녀석만 놀고 자빠졌어?”

“비연도 바라지 않았을 일이옵니다. 그저 문주께서 맺어두신 인연 덕분이지요.”

“···남궁곤 가주와 제갈진 가주가 정말로 여식과 비연을 이어주려고 해?”

“예. 문주께서 하오문의 이름을 중원에 드높이셨고, 그 와중에 황금전장과 삼도상단에 영단의 판매를 일임하셨지 않습니까. 삼도상단의 이름도 하오문과 함께 중원전역에 퍼지고 있습니다. 삼도상단의 후계자인 비연이 탐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삼도상단의 이름만으로 대접받은 것이 아니었다.

“또한 화산파 제자들과 만나 월하답보를 보이신 까닭에 저도 일신의 무공도 선보였습니다. 삼도상단의 재력과 월하검문, 여기에 비연의 무공도 심상치 않으니, 두 가문 입장에서는 놓치고 싶지 않은 사윗감일 것입니다.”

“크하하. 걔들 입이 쩍 벌어졌지? 뒈진 놈은 없었고?”

“홀로 연무장에서 만월강림을 선보인 것이 전부입니다. 자칫 세가의 가주를 다치게 하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만월강림이라···.”

월하답보의 후반부는 만월강림부터 월광난무, 만천광신, 월성천하, 윌하귀천까지 이어지는데 그나마 만월강림이 외부에 보이기에 적절한 수준의 검공이었기 때문이다.

“실력의 삼 푼을 감추라고 했더니, 삼 할을 숨겼어?”

만월강림 이후의 후반부 초식이 가진 힘을 생각하면 절반을 숨겼다고 해도 옳은 말일 것이다.

“···만월강림만으로 세 문파의 종주가 저를 무림의 첫 손가락에 꼽아주었습니다. 민망한 마음도 있었으나, 뿌듯함이 더 컸습니다.”

“우리 송 영감이 고수가 아니면 누가 고수겠어? 하하하.”

이후 송 영감은 남궁가와 같은 조건으로 제갈가와 거래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과 화산파와도 곧 거래가 시작될 수 있음을 전했고, 호충은 상방의 일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에 크게 기뻐했다.

“하하하. 앞으로 삼도상단이 꾸준하게 이익을 낼 수 있겠어.”

“다만 한 가지···. 문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결정한 일이 있습니다.”

“응? 뭔데?”

“삼도상단의 상단주에 이 천한 것을 올려주셨는데···.”

“에헤이. 이제 송 영감은 내 종복이 아니잖아. 관부의 일처리까지 끝난 일을 왜 또 거론하나?”

호충은 하오문이 성장하는 동안 마음에 걸렸던 송 영감의 면천을 실행에 옮겼고, 관부에 고개를 숙여가며 면천에 성공했다. 이제 송 영감은 호충의 종복이 아니라 양민 신분이었다.

“면천한 것으로 문주님께 충성해야 하건만, 자꾸만 욕심이 커지는 모양입니다.”

“그거 좋은 거네. 뭐든 허락이야.”

송 영감은 짐작했던 답을 들었음에도 오히려 이유를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끝도 없는 신뢰와 호의로 가득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거든? 영감이 결정한 일이 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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