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투
***
송 영감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상단주 자리를 비연에게 넘기려 합니다. 저는 세 문파의 수장과 따로 사종(四宗)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였습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하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림의 일에 관여하고자···.”
송 영감이 무림의 일에 관여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상단주 자리에서 내려온다는 결정을 할 줄은 몰랐다.
‘벌써?’
나중에 바꾸긴 했을 것이나, 이렇게 급하게 또한 직접 결정할 줄은 몰랐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인으로서 당연한 일. 송 영감에게 괜한 말을 할 필요는 없어.’
“······.”
호충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송 영감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삼도상단이 무림의 관심을 받고 있어 진가장의 아들들과 마주할 일이 생길 것 같았사옵니다. 제가 상단주라고 나서면 이들과 문제가 생길 것 같았지요. 그나마 비연은 자장에서 진가장의 아들들과 마주하지 않았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옥비연이 삼도상단을 맡고 또 진가와 마주할 수 있다는 말에 루방에서 들었던 정보가 다시 떠올랐다. 여차피 진가장과 비연의 인연은 진하게 이어져 있었다.
“인연이 이렇게 또 이어지나? 어차피 비연 녀석은 진가장과 일전을 치러야 하니···.”
“인연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이신지···.”
“음···. 아직 얘기할 단계는 아닌데 말이야.”
호충은 송 영감을 신뢰하고 있었기에 못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송 영감도 비연이 어미의 성을 따른 것은 알지?”
“예. 기루에서 일하는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비연의 아비는 누구일까?”
“···안 그래도 비연이 아비를 궁금해 했습니다.”
“비연이 아비를 마음에 두고 있었어?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친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니었지요. 오히려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친모가 기루에서 고생하며 자신을 키웠으니, 부친의 빈자리에 그리움이 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다행이로군.”
“혹시···. 비연의 친부를 찾으셨습니까?”
호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찾았지. 루방에서 고생 좀 했어.”
“아!”
“문제는 비연의 아비가 바로······.”
“!!!”
송 영감은 비연도 모르는 출생의 비밀을 듣고 아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비연이 어째서 진가장과 인연이 있는지, 앞으로 진가장과 일전을 앞두고 있다고 했는지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그럼 비연이···.”
“나중에라도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아갈 거야. 비연에겐 내가 설명할 테니 송 영감은 가만있어.”
“후우.”
“그나저나 비연이 놈은 너무 늦잖아? 이러다가 애까지 만들어오는 거 아냐?”
“···비연은 혼인에 뜻이 없다고 했습니다. 녀석이 살아온 환경이 그리 만든 것이지요.”
“지가 중이야, 도사야? 제갈가 여식이나 남궁가 여식이나 어디 가서 빠지는 애들이 아니던데···.”
“문주님이 명하시면 따른다 하였으니, 참고하시지요.”
“그렇다고 내가 혼인을 강요할 순 없잖아. 알면서 왜 그런담?”
“허허. 비연도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문주님이 그럴 분이 아니시지요.”
“확 혼인하라고 할까보다.”
“하하하. 혼인해서 잘 살면 문주님께 절을 하겠지요.”
“큭. 어쨌든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 많았어. 송 영감은 한동안 푹 쉬고 사종인가 오종인가 잘 챙겨봐.”
“···그런데 진가장엔 안 가십니까?”
어려서부터 아비로 알고 지낸 진원우가 죽었는데, 진호충이 문상도 가지 않는 것이 마음이 걸린 것이다.
“하오문에서 거액을 융통해주고 목줄을 옭아매자면 내가 없는 편이 나아. 진호현 그 새끼가 나한테 악감정이 남았을 건데 내가 뭐 하러 가서 초를 쳐?”
“헌데···. 누가 전대 가주를 죽였는지는 아십니까?”
무공을 익힌 송 영감이다. 무림인이 병환으로 죽지 않는 것은 아니나, 멀쩡하던 무림인이 급사하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분명 누군가 진원우를 죽였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또한 하오문의 정보력이면 이를 알아냈으리라 여긴 것이다.
“···원로원에 함께 있던 진원우의 아비가 손을 썼을 거야.”
“!”
“송 영감도 그 집안 잘 알잖아?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야.”
“······아찔한 집안이었지요. 하지만 아비가 아들을 죽일 줄이야···.”
“사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이야······.”
호충은 진무검이 왜 진원우를 죽였는지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루방을 통해 확보한 정보를 진가장 원로원에 전한 숨겨진 내막이었다.
“······.”
“나도 진무검이 진원우를 죽이기까지 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어. 그저 예전처럼 성질을 부려 어디 한 군데 부러지겠거니 싶었지. 하지만 수 십 년이 지난 일인데, 그리 원한이 남았을 줄은···.”
“문주님은 그 집안과 상종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황실의 핏줄인 호충이 그런 더러운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사실부터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가장은 깨끗하게 잊으시고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안 그래도 그러려고.”
지금도 진가장을 도모하고 있지만, 이는 어미인 북궁초연의 원한 때문이지 남아 있는 진가장을 탐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비연의 일은 진가장의 모든 것을 가진 다음에 풀어야 할 일. 아직 멀었다.’
“그리고 한 가지 일정이 새로 생겼습니다. 화산파 장문인인 무환의 일입니다.”
“···무환 장문인이 왜?”
호충의 기억에 화산파는 푸근함으로 남아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기다리던 현인과 현 자 배의 도인들,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어 했던 현진과 순진했던 삼대제자 백준, 마냥 호구 같았던 전대 장문인 청진. 자신을 시기한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호충의 기억에 화산은 따스함만 남겨져 있었다.
“문주님을 호충으로 기억하는 이들입니다. 월하검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니 얼굴을 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거길 또 가라고?”
그저 좋은 기억으로만 남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좋은 기억에 괜한 불순물을 허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오문의 문주가 아니라 월하검문의 후계자로 가셔야 합니다. 잠시 하오문주 자리에서 벗어나 유람하신다고 생각하시지요.”
“괜히 아는 척을 해서 일만 복잡해지네.”
여정 중에 화산파 제자를 만난 반가움을 표한 것이 문제였다. 간단하게 지나갔을 일인데, 호충이 송 영감의 얼굴을 한 것부터가 일의 시작이었다. 덕분에 월하검문이라는 있지도 않은 문파를 만들었고, 송 영감을 월하검문의 문주로 만들기까지 했다. 작은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아직 진가장의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시일을 두고 가는 편이 좋겠어. 조금 늦어도 되겠지?”
“예. 그리하시지요.”
“비연이 오면 녀석만 보고 떠날 생각이야. 화산파는 다녀와서 가는 걸로 하지.”
“···그 분의 일로 가십니까?”
송 영감은 호충이 친부의 일을 위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응. 그 일은 마땅히 맡길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가야 해.”
“그럼 왕호를 꼭 챙겨 가십시오.”
하지만 호충은 왕호를 하오문에 남겨둘 생각이었다.
“나도 없는데 녀석은 하오문을 지켜야지.”
“하오문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패방주와 루방주도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특히 녀석은 문주님과 있어야 관리가 될 녀석이라···.”
“예전의 왕호가 아니야. 녀석도 한 사람 몫은 해.”
“흠···.”
송 영감이 여전히 못미더운 눈치였지만, 겪어보면 알 일이었다.
“가서 왕호 녀석이나 만나봐.”
“같이 가시지요.”
“아직 업무가 남았어. 내일 같이 보기로 하지.”
“예. 문주님. 그럼 이번 상행의 성과는 따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호충은 송 영감을 내보내고, 남은 하오문 업무에 집중했다. 사중환에게 하오문을 맡겨둘 생각이라 그 전에 굵직굵직한 일들을 미리 확인해 결정하려는 것이다.
‘여산(驪山)에 지을 신규 수련관의 예산은···.’
여산에 땅을 확보하고 새로운 무관을 짓자면 상당한 예산을 빼둬야 했다.
‘개방의 거지들을 먹여 살리려면 루방에 추가 예산을 집행해야 하고···.’
가장 많은 자금이 소요되는 것은 역시 개방의 거지들이었다. 이들이 제 몫을 해내기 전까지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삼도상단과 황금전장에 보낼 영단의 수량은 천천히 조금씩 늘리고···.’
영단을 갑작스럽게 풀면 많은 영단을 갖고 장난을 친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었기에 부족하지 않으면서 과하지도 않게 적절한 물량을 풀어야 했다.
‘진가장에 보낼 자금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것이고···.’
유도영에게 전권을 맡겨 두었지만, 세세한 사항은 이미 지시해두었기에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태자의 혼인은···.’
“······.”
자신의 배다른 동생일 가능성이 구 할에 이르는 태자였지만, 호충이 황실의 일에 끼어들 자격은 없었다.
‘나나 하오문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그나마 자신에게 부정을 보여준 진휘평의 아들이라 잠시라도 녀석을 생각했지만, 동생 녀석과 정이 생길 일조차 없었다. 오히려 작은 악감정이 남을 일을 겪었으니, 둘의 관계는 남보다 조금 못한 수준이었다.
‘멍청한 새끼. 제 면상이 황제를 닮지 않았으면 최소한 의심은 해봤어야지 새끼야.’
어차피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똥 멍청이였다.
이후에도 호충은 문서로 올라온 하오문의 대소사를 두루 살피며 최종 서류에 지시를 남겼다.
그렇게 서안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
“하암···. 이제 거의 끝냈나?”
깊은 밤이 되어서야 문주의 집무실을 나선 호충은 빛나는 별을 등불 삼아 거처로 돌아갔다.
저벅.
적막한 서안의 하오문 본단을 보는 호충의 마음은 송 영감처럼 매일이 새로웠다. 송 영감이 천출에서 양민이 되고 무림인이 되며 느낀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조폭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자신이 이제는 거대한 단체의 수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원 전역에 퍼진 하오문의 문도들을 떠올리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여기에 자신을 진실로 믿고 따르는 수하들이 있었고, 미래를 약속한 연인도 있었다. 부친의 일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하오문을 통해 하나씩 해결해 가면 될 일이었다.
“이번에 경매로 모은 자금이면 진가장을 도모하고 하오문을 이끌어 가기에 부족함이······.”
호충은 자금을 떠올리며 경매로 모은 전표를 모아둔 하오문의 심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검은 인형이 휙 하고 전각에서 빠져나와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녀석의 가벼운 움직임은 분명 경공의 발현이었다. 호충은 잠시 놀랐지만, 곧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저런 놈이 하오문에 들어올 동안 지키는 놈들은 대체 뭘 한 거야?’
하오문에 도둑질을 하는 놈이 있으리라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도둑들도 하오문 소속이었다.
‘아! 개방도는 낮에만 하오문을 지키는구나. 제길!’
호충은 이미 일을 마치고 떠나가는 검은 인형을 소리 없이 뒤쫓기 시작했다.
‘넌 뒈졌어 새끼야.’
휘익.
호충의 신형은 검은 그림자에 숨어 도둑의 뒤로 따라붙었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고절한 은형술과 경공의 결합이었다.
.
.
.
하오문을 빠져나온 검은 복면인은 소리 없이 경공을 발현하며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날 막을 것이냐. 흐흐.’
그는 자신만만했다. 지금까지 잡힌 적도 없었고, 누가 발견하고 쫓아와도 자신의 경공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도신투의 명성에 누가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고대 무림부터 이어온 대도신투의 전인이었다.
사락.
신투는 서안 근처의 깊은 산으로 향했다. 사통팔달 교통이 발전한 서안은 중원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관도가 이어져 있었기에 과거부터 신투의 안가로 사용되고 있었다. 생로(生路)와 사로(死路)가 얽힌 진법까지 마련된 신투의 안가는 보통 사람이 접근할 수도 없이 방비되어 있었다.
호충의 신형은 신투의 걸음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만, 신투는 따르는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진법을 통과해 안가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다 왔다.’
진법이 끝난 곳에 검은 동혈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신투는 서안에 하오문 본단이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전부터 노리고 있었는데, 이번 무림맹의 경매로 큰돈을 벌었다는 소식에 바로 실행에 옮겼다. 거사를 실행하고 안가로 돌아오기까지 자신을 알아채지도 못했으니, 완벽한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역시 하오문 본단에 모든 것이 모여 있었어.”
검은 복면인은 자신이 챙겨 나온 전표와 금원보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가장 큰 성과는 역시 비급! 하오문이 경매에 출품한 비급은 일부일 뿐이었어. 전부 짐작하고 있었지!”
전표와 금원보를 꺼낸 보자기 바닥에는 비급이 몇 권 들어 있었는데, 하오문에서 경매에 선보이지 않았던 비급이었다. 신투는 비급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안가의 책장에 진열했다. 책장에는 이미 전부터 모아온 비급들이 상당했고, 주변에는 막대한 양의 금원보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또한 유명한 이들의 시서화도 가득 쌓여있었다. 이곳이 과거부터 쌓아온 신투의 보물창고였다.
신투는 복면을 벗고 호피로 장식한 의자에 털썩 앉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의자 뒤에서 호충이 은형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신투의 뒤통수가 손에 닿을 거리였다.
“······.”
호충은 이놈을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다가 손날을 높이 들었다.
‘···이번엔 왕 다람쥐네.’
녀석의 머리를 바수고 안가의 물건을 챙기면 끝날 일이었다.
‘여기 재물을 챙기면 앞으로 한참은 걱정할 일이 없겠어.’
조만간 하오문을 나서야 했는데, 재물이 알아서 굴러들어왔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었어. 내일도 모르면 또 털어볼까? 신투가 털지 못할 곳이 어디 있을까!”
호충은 신투라는 말에 들었던 손을 멈췄다.
‘신투. 신투라···.’
호충도 신투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호충이 들었던 손날을 신투의 머리에 덮었다.
턱.
“!!”
신투는 온 몸의 털이 곤두섰고, 등줄기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재미있었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