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 (158/232)

진가장의 핏줄

***

비연은 문주의 말을 듣고서야 두 여인이 다른 남자와 함께하는 모습을 상상을 할 수 있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두 여인이 다른 남자를 향해 달려가 안기는 모습이었다.

“!”

‘···왜 기분이 나쁘지?’

기이할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너무 화가 나서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 둘은 딴 놈 주는 거다?”

“······.”

하지만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왜 비연이 고생하는 걸 모르겠어. 나도 그 고통 잘 알지. 그러니까···.”

“자, 잠시만···.”

‘어째서···. 내가 분노를 느끼는 것이냐.’

비연은 차분히 자신을 돌아봤고, 혼란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그녀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은 날···.’

항상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던 소선은 화사한 봄날의 꽃처럼 각인되어 있었고, 미는 흐르는 강물에 비춘 햇살처럼 반짝였다. 두 여인과 함께했던 며칠간의 기억이 연이어 떠올랐다.

‘소선···. 미···.’

까르르 웃는 두 여인 곁에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문주님···.”

“왜? 비연에게서 두 여자를 떼어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호충의 말에 비연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어휴. 아냐. 아냐. 내가 비연의 혼례까지 마음대로 하진 않아. 하오문은 하오문이고 비연은 비연이지.”

“하지만 제가 아니면···.”

“어째서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냥 비연은 편한 대로 하면 돼.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 상단의 일은 어떻게든 흘러 갈 테니까 일부러 싫은 여인까지 떠맡을 필요 없어.”

“제가 맡겠습니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충성심에도 정도가 있는 거야. 하오문과 삼도상단이 뭐라고 비연의 미래까지 모두 내던져? 내가 비연보다 더 잘생긴 놈으로 붙여 볼 테니까···.”

비연은 확실히 답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이러한 대화가 반복되어야 할 것 같았다.

“문주님. 제 자의로 그녀들을 책임지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니? 어디서 헛소리가 들리나?”

호충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듯이 귀를 후비며 다시 비연의 답을 다시 요구하고 있었다.

“제가 그녀들을 책임지겠습니다. 문주님. 제 의지와 선택으로 결정한 일입니다. 하오문과 상방을 위해 선택한 일이 아닙니다.”

“풉. 너 제 정신이야?”

“···제 정신은 어느 때보다 명료합니다.”

“하여간 젊은 녀석들은 잠깐만 붙여 놔도 불꽃이 튀어. 쯧쯧.”

“······.”

문주 호충이 자신보다 훨씬 더 어리지 않던가.

“기껏 생각해서 해결책을 만들어주려 했더니···. 루방주가 괜히 알아봤잖아? 그 사이 없던 정이라도 생겼어?”

“···그런 모양입니다. 저도 제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습니다.”

호충은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푸흐하하. 네가 마음을 먹은 것 까지는 좋아. 좋다 이거야.”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그 이상이 문제였다.

“그런데 둘을 다 네 품에 챙기겠다고?”

“예? 그럼 안 됩니까?”

호충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쪽은 안휘성을 지배하는 남궁가! 한쪽은 산동성의 제갈가! 그 두 집안과 동시에 연을 맺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아?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

애초에 둘과 맺어지지 않을 생각이라 여기까지 고민해보지 못한 것이다.

“그럼 문주님은 둘이 안 된다는 말씀···.”

“언제 내가 안 된다고 하든? 두 세가의 가주들이 반대할 거라는 얘기지. 네가 딸이 있다고 해봐라. 너 같으면 다른 집 여식이랑 같은 놈한테 보내고 싶어? 그것도 무림에 이름 높은 두 세가에서?”

비연도 현실로 돌아와 두 가문의 가주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봤다.

‘한 남자가 두 부인을 맞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 그런데 세가의 금지옥엽을 고작 나 같은 놈에게?’

“맙소사···.”

“그래. 당연히 주기 싫지. 네가 그들과 같은 급이 되지 않는 한 힘든 일이야.”

호충은 일부러 같은 급이라는 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비연에게 해줄 말이 있었는데, 이번 일과 그 일을 연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네가 맡아야 할 일인데, 이젠 해야만 할 이유까지 생겼구나.’

“삼도상단이 아무리 성장해도 무림의 세가인 두 가문이 딸을 가져다 바칠 정도는 아니야. 애초에 삼도상단이 하오문의 것이니 네 것이라고 할 수도 없지. 하지만 네가 서로 동등한 무림 방파를 갖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 진가장의 전대가주만 해도 모용가와 서문가의 두 부인을 얻었잖아.”

“···제가 무슨 수로 무림 방파를 일으키겠습니까?”

“방법이 있다면?”

“···해야지요.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심도 깊은 대화가 필요하겠네?”

비연은 자세를 바로하고 호충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하오문은 진가장을 도모하고 있어. 진씨 세가의 세 가주에게 거금을 빌려주고 가문 소유의 전답과 상회, 무관을 담보로 잡았지. 아마 내일쯤이면 도착할 거야. 서찰이 먼저 도착했거든.”

“진씨 세가는 저와 상관없습니다만···.”

진씨 가문은 문주의 가문이지 자신의 가문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상관있을 예정이야.”

“···말씀하십시오.”

“우선 세 공동 가주 중에 진호현 맹주는 가주직을 내려놓을 것이고, 셋째 진호성은 둘째 호중에게 축출 당할 예정이야. 남은 것은···.”

“둘째 호중이군요. 그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가 빠졌잖아.”

호충이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자 그제야 비연도 깨달았다.

“아! 맞습니다. 명목상 진가의 공동가주는 넷이니까요.”

“진씨 세가가 섬서성의 전답과 상회, 무관을 담보로 하오문에 빌린 자금은 무려 삼백만 냥.”

“헙!”

옥비연은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가산을 담보로 걸었다지만, 이 거대한 금액을 담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담보로는 어림없는 금액이지. 산서에 새로 지은 무관을 더해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하오문은 내년 이맘때 진씨 세가의 담보물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고 부족한 부분을 갚으라고 독촉할 예정이야. 일부러 담보에 포함하지 않은 진가의 철광산은 아무리 녀석들이 우겨도 담보에 넣어주지 않을 것이고, 소금 밀매 사업은 담보로 잡을 수도 없는 일이니 당연히 제외하고···.”

“그럼 둘째 진호중은···.”

“녀석이 빚을 갚지 못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아. 이미 셋째 호성을 내쳤으니 중부전장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고, 서문가와 모용가의 유용자금도 바짝 말랐지. 무력도 하오문이 우위에 있고, 인적 자원도 하오문이 우위에 있으며, 진가장에 내세울 명분과 나라의 법리를 따져도 하오문이 우세다. 마지막으로 녀석이 선택할 수단은 단 하나다.”

“···녀석은 책임을 문주님께 떠넘기겠군요.”

“그렇지! 녀석은 마지막에 가서야 모든 책임을 내게 떠넘길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삼도상단이 나서면 어떻게 될까?”

“!”

“삼도상단의 상단주가 진가장을 사버리는 거야. 모든 책임을 떠맡은 내가 진가장을 삼도상단에 넘기는 거지.”

“하지만 빚더미에 오른 진가장을 삼도상단이 책임질 필요가 있을까요? 애초에 진가장을 도모하는데 이런 어려운 방법을 쓰는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아예 진가장을 폭삭 무너뜨리고 다른 방파를 세우는 편이···.”

“당장 네가 무림 방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니까? 어느 세월에 다시 세워?”

“···문주님. 진가장은 씨족이 중심이 되는 세가입니다. 보통의 무림 방파와 다르지 않습니까. 진씨 세가의 방계부터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호충이 여기까지 대화를 끌고 온 이유를 바로 드러냈다.

“네가 진짜 진가장의 핏줄이다. 비연.”

“우리가 아무리 우겨도 진가장의 인물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기자는 말이 아니야. 네 아비에 관한 정보다.”

“······.”

비연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호충의 말을 기다렸다.

“네가 태어났던 시기에 네 모친과 연결점이 있는 인물을 찾아냈다. 중원 전역의 기루를 루방으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과거 자장의 홍루에서 일했던 기녀를 찾아냈고, 그녀의 입을 통해 일의 전말을 확인할 수 있었지.”

“···그가 누구입니까.”

호충은 곧장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진무검. 이름은 들어봤지?”

“!”

“진가장의 전전대 가주인 그가 바로 네 친부였다. 너는 옥비연이 아니라 진비연이다. 당시 진무검은 네 모친의 태중에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듣고도 진가장에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예 발길을 끊고 모른척했다고 들었지.”

“진무검. 전대가주 진원우의 윗대···.”

비연은 조금 놀랐을 뿐이다. 자신의 친부가 누구든 달라질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부고를 전한 진원우는 네 배다른 형이 되겠구나. 지금이라도 가보겠느냐?”

“저는 그런 형을 둔적 없습니다. 아비라는 놈도 그렇습니다. 저는 옥비연이지 진비연이 아닙니다.”

“···네가 친부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은 송 영감에게 들었다. 나는 네가 진무검을 친부로 인정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진가의 모든 것을 네가 가져야 한다고 알려주는 거야.”

“그런데···. 지금 어디서 족보 꼬이는 소리가 들리진 않으십니까? 조카님?”

자신이 전전대 가주 진무검의 친아들이라면 진원우의 아들인 문주는 손아랫사람인 조카라고 불러야 맞았다.

“푸흡! 내가 네 조카라고?”

“문주님 말씀대로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도 문주님은 영원히 제 문주님이시지요.”

“풋. 내 친부는 진원우가 아니다. 내가 왜 진가장에서 그리 홀대를 받았겠느냐. 이 사실은 진원우와 진무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진원우는 자신이 친아들이 아님을 아는 눈치였고, 진무검의 경우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가장과 호충 사이에 아무런 연결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꼬인 족보는 간단하게 풀었고···.”

“···정말입니다. 농담이었습니다.”

“됐다니까요. 숙부님?”

“······.”

“어쨌든. 비연. 진씨 세가를 가져보겠느냐?”

“······.”

비연에게 중요한 것은 진가장을 갖는 것보다 다른데 있었다. 이글거리는 비연의 눈은 단 한 가지만 노리고 있었다.

“···이걸로 그에게 복수가 되겠습니까? 제가 진가장을 차지하면 녀석은 어떻게 됩니까?”

자신의 어미를 버린 진무검에 대한 복수였다.

“진무검은 원로원에 감금되어 있지만, 여전히 무림에 마음을 갖고 있다. 이번에 진원우를 죽인 것도 바로 그다.”

“!!”

“황실이 상승 무공 규제를 철폐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원로원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무림 복귀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아들을 거리낌 없이 치워버렸지. 녀석이 밖으로 나오면 남은 진가의 형제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 와중에 네가 등장해 진가장을 차지하면? 당연히 녀석에게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다.”

이후 호충의 입에서 진가장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상세하게 흘러나왔다.

“······.”

“참 대단한 집안이지?”

“그 집안은 어째서 하나 같이 다 그 모양이랍니까? 아비가 아들을 죽이고, 자식들은 저마다 이기심으로 그득하고···.”

“네가 모친을 닮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너까지 그들을 닮았다면 볼만했을 것이다.”

“제가 진가장을 차지하는 것이 녀석에게 복수가 된다면···. 문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것입니다.”

“진무검은 어찌 처리하겠느냐.”

“단전을 폐하고 목숨만 붙여놓겠습니다.”

무인에게 단전을 폐하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한 고통일 것이다.

“그나마 목숨은 붙여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거든.”

“루방의 정보력으로도 알아내지 못한 일이 있습니까?”

“···진가장에 머물렀던 내 모친의 사고에 관한 것이다. 이 일은 진원우와 진무검이 잘 알고 있을 거야. 진원우가 죽었으니 남은 것은 진무검 하나. 녀석을 통해서 내 의문을 풀고 싶다. 그 이후엔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대로 해라.”

호충도 진가장에 남은 것은 비연과 같았다. 오로지 악연으로만 이어진 인연이었다.

“······그 녀석들의 심성이면 문주님의 모친이 겪은 사고에 관여되어 있을 가능성이 십 할이지요. 그의 목숨을 꼭 붙여 놓겠습니다.”

“그보다···. 내 아비가 누구인지는 궁금하지 않느냐?”

“···때가 되면 말씀하시겠지요.”

“안 그래도 당장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때가되면 일러주마.”

“···어르신은 알고 계시지요?”

“···영감은 알아야지.”

“그렇다면 하나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답해주마.”

“···만나셨습니까?”

“그래. 만났다. 진가장의 잡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부정(父情)이 가득한 분이셨다.”

“다행입니다. 문주님이라도 그리되셨으면 정말 다행이지요.”

“그 얘긴 이제 됐고···. 진가장을 네가 차지하면 제갈가와 남궁가도 여식을 네게 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진씨 세가의 가주이자 삼도상단의 상단주를 사위로 들이는 일이 되니까.”

“······.”

그녀들을 떠올리니 전과는 다른 푸근한 감정이 샘솟았다.

‘이제 그녀들을 내 품에···.’

하지만 아직까지 깊은 관계가 아닌지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후우. 앞으로 그녀들의 얼굴을 어찌 봐야할지 모르겠군.’

“저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주시니 어찌 감사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문주님을 만난 그날부터 제게 다른 세상이 펼쳐졌고, 이제는 자장에서 우러러보던 진가장까지···.”

“공치사는 네가 진씨 세가의 주인이 된 다음에 받겠다. 너는 우선 상단의 일이나 인계받아. 송 영감이 준비하고 있어. 아. 영감도 네 아비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해 했지만, 네게 먼저 얘기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네가 알아서 설명해.”

“···예. 문주님.”

호충은 비연을 내보내고 후련한 마음이었다.

“입 간지러워서 혼났네.”

비연이 진가장의 핏줄이라는 정보를 알고부터 언제 터트려야 하나 시기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내일 진가장에서 돌아오는 유 단주만 만나면 큰일은 대충 마무리 되는군.”

세상일이라는 것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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