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마한로
***
다음날 호충이 기다리던 유도영이 문주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어라?”
다른 보고 사항은 이미 서찰로 확인했기에 따로 살피지 않아도 되었으나, 진가장에서 챙겨온 물건이 문제였다. 자신이 진가장에서 보던 서책이 수레 한 가득이었다.
“······.”
호충은 하오문에 복귀한 유도영이 수레 가득 챙겨온 책자를 살피고 있었다. 이 책자를 가져왔다는 것은 송재호로 알려진 자신과 진호충 사이에 뭔가의 연결고리가 밝혀졌다는 뜻이었다.
“···모두 나가고 유 단주만 남도록.”
““예! 문주님.””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유 단주는 뭔가를 아는 눈빛이었다.
“지금까지 유 단주가 들은 것이 있다면 읊어봐. 이거 왜 갖고 왔어?”
“···중요한 물건 같았습니다.”
“물건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내막을 아는 놈들이 있다면 그것이 문제다. 넌 뭘 알고 있느냐?”
“···진가장의 막내 호충은 문주님이셨습니다.”
“······.”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누가 알려줬나?”
진가장은 물론이고 무림과 마교, 황궁의 일까지 얽혀 있었다.
“이 서책은 누가 챙겨줬고?”
“···오직 저만 알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들은 것이 아닙니다. 서책도 제가 일부러 챙겨왔습니다.”
“엉?”
그럼 어떻게 송재호와 진호충의 연결점을 찾았단 말인가.
“제가 가져온 서책이 문주님께서 찾으시는 원인입니다.”
“···이 서책?”
서책에 뭔가를 적을 때는 자신이 하오문을 개파하기도 전이라 그 어떤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필체. 서책의 필체와 문주님의 필체가 같았습니다.”
“!”
“누군가 알아볼까 싶어 모두 챙겨왔습니다. 제가 잘 보관하겠습니다. 문주님.”
“큭. 괜히 찔려서 다 불어버렸군. 딱 잡아 뗄 걸.”
필체 외에 아무것도 없다면 모르는 척해도 됐을 것이다.
“이왕 알았으니, 내 본 모습도 기억하고 있어.”
호충은 송재호의 얼굴을 다시 본래대로 바꿔 본 모습을 보였다.
우드득.
“!”
“좀 젊은 얼굴이지?”
“옥 방주는 여인처럼 고운 얼굴이라 정이 가질 않았습니다. 헌데, 문주님은 날카로운 남아의 기상이 가득한 수려한 용모라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큭. 하여간 먹물 새끼들 입 놀리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우드득.
호충은 얼른 다시 송재호의 얼굴로 돌아왔고, 유도영은 다른 부분을 거론했다.
“남경에서 문주님의 필체를 보고 상당히 오랜 시간 서예를 익히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준비하셨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과거를 준비했던 서생의 입이 그렇게 거친 말들을 쏟아 내리라 예상하지 못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다 옛날 얘기지. 과거 시험은 다 아는 놈들끼리 해먹는 판이잖아.”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래도 잘 하면 말석 관직이라도 노려볼 수 있었을 테지만, 용의 꼬리보다 뱀 머리가 낫지 않아? 크흐흐.”
관직에 나가서 말단 관인이 되는 것보다 하오문의 문주로 사는 게 더 좋다는 의미였지만, 유도영은 자신의 문주가 용의 머리가 되었으면 싶었다.
“······.”
하지만 일전에 들은 말이 있어서 함부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역천의 역자도 꺼내지 말라고 했는데, 그 중심에 문주를 세우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역천을 주도자하는 왕야를 치우고 그 자리에 문주를 세운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유도영은 남경에서 정보단이 감시하던 대상을 정확히 인지했고, 이들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이 파악하고 있었다. 진휘평이 돌아와 역천을 행하고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유 단주. 네 눈빛이 조금 위험했다? 너 또 내가 하지 말라는 생각했지.”
“···예. 더 위험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곤 눈을 딱 감고 속마음을 보였다.
“저는 문주님께서 직접 나라를 다스리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유도영은 크게 혼날 각오로 뱉은 말이었다.
‘···설마 죽이진 않으시겠지.’
“하다하다 거기까지 갔느냐? 하여튼 칼 잡은 놈들보다 먹물이 더 위험하다니까?”
“···저를 나무라지 않으십니까?”
“푸흐흐. 하여튼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잠시 유도영을 보며 고민한 호충은 앞으로 정보단을 활용할 일이 많을 것 같아 일부러 말을 흘렸다. 이미 자신의 본 모습까지 보인 인물이었다.
“···네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려라. 네가 원하는 일은 언젠가 이뤄질 것이다.”
“!!!”
“큭. 이것도 괜히 말해줬나 보군.”
“무, 문주님. 지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이신지···.”
자신의 허황된 상상일 뿐이었는데, 긍정의 확답이 돌아올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나머지는 네 추측에 맡기마.”
“이렇게 말을 하다마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네 놈이 자꾸만 앞서나간 벌이다. 더는 내 입이 열리지 않을 터이니, 수련관에나 다시 들어가.”
“자, 잠시만···. 문주님! 문주님!!”
“일 망치려거든 입 열든가. 너와 나는 물론이고 하오문의 모든 문도까지 모조리 목이 잘리겠지?”
“······.”
“한동안 자리를 비울 것이다. 대계를 위함이니 너는 수련관을 어서 돌파하고 방주들을 도와 하오문 정보단을 키워보아라. 특히 루방의 방주와 긴밀히 협조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유도영의 눈빛이 전과 완전히 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충! 명을 받듭니다.”
“얼씨구? 같이 죽자고?”
“···조심하겠습니다. 문주님.”
“정 답답하거든 송 영감을 찾아가라. 그가 나에 관해서 가장 많이 아는 인물이다.”
“예. 문주님.”
.
.
.
여기까지는 일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유도영이 나간 다음 갑자기 들어온 사중환에 의해 경유지가 생기고 말았다.
“또 뭔데 그래?”
“문주님. 호북성 죽산(竹山)에서 들어온 정보가 있습니다.”
“죽산? 거긴 무당파 근처 아니었나?”
무당파가 자리 잡은 지역이었지만, 무당의 속가제자들을 파견한 곳은 그 옆 방현이라 죽산에 하오문 소속 흑패가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무당파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무당파와는 전혀 관련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놈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놈이 나타나? 누구?”
호충은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문주께서 사천 성도에서 바꾼 얼굴 말입니다.”
“사천 성도라면···. 마한로?”
마한로는 누가 쫓는 줄도 모르고 무당산 근처로 이동했고, 그의 행적은 마교와 하오문에 모두 걸려들고 있었다.
“예. 죽산흑패에 방문했던 자장 출신의 하오문도가 마한로를 알아봤습니다. 녀석은 후줄근한 마한로의 모습을 보고 모른 척 지나치려고 했는데, 뒤에 녀석을 미행하는 녀석이 하나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문주님께서 사천에서 행하신 일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당연히 마교도겠지.”
마교의 고위직인 장로를 죽였으니, 마교가 쫓는 것이 당연했다. 또한 마교가 마한로의 용모파기를 그려두었을 거라는 점은 예상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만약 마한로가 마교에 붙잡혀 모든 것을 토설하면 마교는 당시의 일에 의문을 가질 겁니다.”
“안 그래도 하오문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터인데, 그 일까지 더할 수는 없어.”
“미행하는 인물은 당장 어찌할 생각이 없어보였다고 합니다. 마교의 장로를 죽인 인물이라 극도로 조심하고 있겠지요.”
“마교의 무력단이 급파되었을 것이다. 당장 가서 녀석을 구해야겠군.”
“혼자 가시겠습니까?”
문주 혼자라도 얼마든지 마인들을 처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여명단과 황혼단도 같이 갈 것이다. 마교의 무력단 하나를 지워버릴 기회다. 또한 녀석들에게 제대로 된 상대를 붙여줄 기회이기도 하지.”
“왕호를 부르지요.”
“패방주는 아쉬워도 참아. 어차피 마교는 이곳 하오문 본단에도 숨어들 테니까.”
“준비하고 있습니다. 흠양신 녀석도 회복 중이고요.”
남의 집에 드나드는데 귀신같은 놈이라 도둑 잡는 실력만큼은 믿을 수 있었다.
“크크. 그 놈은 약점 확실하게 잡아놔.”
“물론입니다.”
약점을 잡으라고 했지만, 둘이 따로 나눈 대화에서 흠양신을 끌어들일 계획을 실행 중이었다. 강요에 의한 충성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성은 다른 법이었다.
“그나마 멀지 않아 다행이야.”
섬서 서안에서 호북 죽산까지는 경공으로 달리면 금방이었다.
“천리길은 아니지만 충분히 먼 길입니다.”
“겸사겸사 흑림방 녀석들 단련도 시킬 수 있겠어.”
***
호충은 곧장 흑림방을 소집했다.
“문주님. 여명단 단주와 부단주 포함 삼십이 명, 황혼단도 단주와 부단주 포함 삼십이 명이며 방주인 저까지 총 육십오 명 집결 완료했습니다.”
“빠르게 이동할 것이다. 뒤쳐지는 놈은 알아서 해.”
“······.”
왕호가 두 단주를 노려봤고, 단주들은 다시 각자의 부단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
단원들은 침만 꿀꺽 삼키며 윗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수련관의 최고기수에 근접한 고수들이었지만, 여기서는 말단 단원에 불과했다.
‘딴 데 갔으면 내가 최고참인데···.’
‘괜히 이리로 와서는···.’
호충은 집결한 흑림방 단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마교와 붙으러 간다. 자신 없는 놈은 지금 빠져도 좋다.”
호충의 말에 단원들은 저마다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역시 하오문의 최전방. 이래서 내가 여길 온 거지!’
‘이번엔 제대로 된 상대로구나!’
수련관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보인 이들 중 상위에 있는 이들을 골라냈고 또 무공에 흠뻑 빠진 이들만을 고르고 골라 조직한 흑림방이다. 이들 중 마교라는 이름에 겁먹을 인물은 없었다.
이들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연히 보이니, 호충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 왕 방주.”
“예. 문주님.”
“우리 흑림방은 정신교육이 확실하네? 마교를 상대한다는데 겁먹는 놈이 없어?”
“큼. 흑림방은 하오문 최고의 무력을 자랑합니다. 누구와 붙어도 자신 있습니다.”
“앞으로 흑림방의 단련은 왕 방주에게 맡겨도 되겠어.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군.”
“수련관을 나온 녀석들 중에 흑림방에 들어오고자 하는 놈들이 상당하지만, 가려 받을 예정입니다.”
“오오. 좋아. 좋아. 정예는 괜히 정예가 아닌 법이지.”
호충은 하나씩 갖춰져 나가는 하오문의 힘이 기꺼웠다. 하지만 육십오 인에 불과한 하오문의 현 무력단은 계속해서 수를 늘려나가야 했다.
“정예로만 삼천.”
“!”
“향후 왕 방주가 흑림방 휘하에 둘 방도들의 수야. 알았지?”
“···충!”
호충은 아직 단원에 불과한 이들에게도 말했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단원이지만 너희가 언제까지 단원이겠느냐. 너희도 금방 단주가 되어 단원들을 이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단원들의 눈에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끄럽지 않은 단주가 되어야겠지?”
““옙!!!!!””
어느 때보다 우렁찬 대답이었다.
“하하하. 가자!”
호충은 흑림방과 함께 길을 나섰다. 경매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하오문의 첫 무림출도라고 봐도 무방했다.
***
호북(湖北) 죽산(竹山)은 섬서성과 관도로 연결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거쳐 가는 곳이었다. 이곳을 지나 방현을 통해 무당산으로 가는 이들도 많았고, 특히 호수로 유명한 동호(東湖)에 유람하러 가는 이들도 상당했다.
“씨펄. 나만 빼고 다 잘 사네.”
관도를 지나는 사람들의 행색과 자신은 너무도 달랐다. 꼬질꼬질한 옷가지에 가진 것도 하나 없는 자신은 누가 봐도 거지였다.
“내가 예전엔···. 에효.”
바로 마한로였다. 소야를 산에 던져두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갈 곳이 없었던 마한로는 차마 섬서 자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나마 근방이라고 할 수 있는 호북으로 건너온 것이다.
마한로는 실제로 관도에 깨진 바가지를 하나 꺼내 놓기도 했다.
“······.”
하지만 지나가는 이들 중 자신의 바가지에 적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색은 초라하지만, 우락부락한 얼굴과 커다란 몸집이 위협적으로 보인 탓이다.
하지만 바로 옆 호리호리한 늙은 거지의 바가지는 구리 동전이 쌓이고 있었다.
달그락.
“어이쿠. 감사합니다. 대인. 길이길이 복 받으시고 장수하십시오. 천지신명께서 대인을 보살필 것입니다.”
“허허. 적선하는데 이런 소리를 또 처음 듣는군.”
“제가 해드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요. 제 작은 바람이라도 하늘이 들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요.”
“그럼 내 그냥 갈 수가 없지 않은가.”
땡그랑.
이번엔 은전이 바가지에 올라갔다.
“대인! 하늘이 대인을 도울 것입니다. 대인께서 만수무강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길 하늘에 간절히 기원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적선한 인물이 사라지고 나서 마한로가 일어나 거지 앞에 섰다. 그 모습에 거지는 바가지의 동전들을 긁어 품으로 가져갔다.
“X같은 놈들이 이젠 거지도 가려가면서 적선을 하네? 야. 너 방금 품에 넣은 것 좀 꺼내봐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