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232)

일기(一期)

***

“X같은 놈들이 이젠 거지도 가려가면서 적선을 하네? 야. 너 방금 품에 넣은 것 좀 꺼내봐라..”

“······.”

거지는 눈만 굴리며 답하지 않았다.

“하다하다 이젠 거지도 날 무시해?”

“내가 언제 당신을 무시했소?”

“···방금 품에 넣은 것 꺼내 보라고 새끼야. 어르신이 말씀하시면 바로바로 행동에 옮겨야 하지 않냐? 답을 안 하면 무시하겠다는 거잖아.”

“남들 보는 눈도 있는데···. 거참. 그럼 이리 오시오.”

거지는 동냥 바가지를 챙겨 골목으로 들어갔다.

“큭. 진즉에 말을 들어먹을 것이지.”

마한로는 빙긋 웃으며 거지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지가 손에 들고 가는 짧은 봉을 무시할 일이 아니었다.

마한로가 골목 모퉁이를 돌자마자 본 것은 눈앞에 들이닥친 봉이었다.

퍼억!

“끄악! 너, 너 이 새끼!”

그나마 고개를 비틀었음에도 어깨를 맞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피해? 한 수 재간은 있었냐?”

“뭐?”

퉤엣.

손바닥에 침을 뱉고 단봉을 고쳐 잡은 거지가 다시 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오늘 비루먹은 개 한 마리 잡아봐?”

부웅.

마한로는 얼른 단봉을 피하며 몸을 굴렸지만, 단봉은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너 이 X새끼. 이리왓!”

빠악.

“크윽.”

등짝에 날아든 단봉을 피하지 못한 다음부터는 일방적인 타작이었다. 타구봉법의 기묘한 흐름을 마한로가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도끼만 있었어도 너는!”

빠박. 퍼억.

“끄악.”

“듣도 보도 못한 새끼가 이 어르신의 동냥을 가로채려고 해? 너 이 새끼 어디 소속이야!”

질문을 던지면서도 단봉은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빠악.

“으악!”

대답할 시간조차 없는 일방적인 구타였다.

.

.

.

한참을 얻어터진 마한로는 퉁퉁 부은 얼굴로 거지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소속.”

“···없습니다.”

“없어? 그럼 개방도가 아니야?”

“개방이요? 개 같은 방이라는 뜻입니까?”

“쓰펄. 이 새끼가 정신이 빠졌네. 너 거지면서 개방도 몰라?”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된 터라···.”

“하. 허우대만 멀쩡했지 정신이 빠졌구만.”

“헤헤.”

거지는 유심히 마한로의 얼굴을 보다가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물었다.

“이름.”

“···마한로라고 합니다요.”

“···마한로?”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곳 죽산흑패에 잠시 방문했던 하오문 고위급 인물이 흑패주와 개방에 단단히 이르고 갔던 인물이었다.

[마한로라는 자가 죽산에 머무르고 있다. 녀석이 조금 무례한 일을 하더라도 날 봐서 조금 봐주길 바란다. 나와 과거 잠시 인연이 있었던 인물이니···.]

아직 하오문에선 이렇다 할 정보가 전해지지 않았고, 그저 마한로와 인연이 있었던 인물이 당부한 말이 전부였다.

“···너 어디 출신이냐?”

“자장 흑패에서 패주로 군림한 때도 했었지요. 지금은 다리가 이 모양이라···.”

짧은 바짓단으로 보이는 칼자국이 녀석이 왜 자신의 단봉을 제대로 피하지 못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한 지역의 패주로 군림했다는 말은 거짓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패주였다면 하오문에 들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죽였으면 죽였지, 저렇게 멀쩡하게 살려 두진 않으니까.’

“지금은 많이 나았습니다.”

“···흐음.”

“근방에서 다시 구걸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에효. 너도 기구한 인생이다.”

거지는 품에서 동전하나를 꺼내 마한로 앞에 던져 놨다.

“가서 뭐라도 사먹고 앞으로 동냥질을 해도 내 옆에서 해라. 다른 데 가서 동냥하면 오늘처럼 가볍게 넘어가지 않는다.”

“······.”

“진짜야! 이 새끼야! 딴 놈한테 걸렸으면 넌 오늘 뒈졌어!”

“옙. 옙!”

이후 마한로는 늙은 거지 곁에서 동냥을 시작했고, 늙은 거지가 마한로를 편히 대하는 모습 때문인지 마한로의 동냥 바가지에도 가끔 동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헤헤.”

“좋냐?”

며칠 사이 마한로는 늙은 거지 밑에서 동냥질 하는데 맛 들려 있었다.

“일 안 해도 돈을 주지 않습니까. 헤헤.”

“···너는 천성이 거지로구나. 너 같은 놈이 하오문에 갔어야 하는데 말이야.”

“···저도 하오문에 들 수 있습니까?”

“네 다리가 그 모양이라···.”

“그래도 이젠 힘이 좀 붙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멀쩡히 걸어 다닐 것 같고요.”

“그래? 네가 다 나으면 내가 힘을 좀 써보지.”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하지만 이들의 동행은 오래지 않아 끝을 고하게 됐다. 골목에서 마주한 시커먼 복장의 인물들 때문이었다.

“······이것들은 뭐야? 야. 너 얘들 알아?”

“아, 아뇨.”

그나마 무공을 익힌 자신이 나서야 했다.

“어디서 나오셨소?”

“······.”

물음에도 아무런 답을 하지 않던 이들이 한쪽으로 물러섰고, 곧 이들의 우두머리가 나섰다.

“···저 놈만 잡아간다. 나머지는 필요 없다.”

“옛!”

흑의인들이 다가오자 늙은 거지는 마한로를 뒤에 두고 앞으로 나섰다.

“제길. 숫자가 너무 많은데···.”

단봉을 들고 나서긴했지만, 홀로 감당하기 벅찬 숫자였다.

“어, 어르신 그러지 말고 도망갑시다.”

“···넌 네 뒤도 안 봤냐?”

마한로가 뒤를 돌아보자 골목 입구를 막아선 시커먼 복장의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넌 틈이 생기면 바로 죽산흑패로 달려가서 여기 일을 고해라.”

마한로는 늙은 거지가 조용히 전한 말에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사이 흑의인들이 뛰어들었고, 단봉이 춤을 추었다.

파박. 휘잉.

일부러 빈틈을 보이다가 급작스럽게 출수하였음에도 상대는 단봉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무공을 익혔나?”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이가 내렸던 명령을 수정했다.

“저 놈도 같이 잡는다! 데려가 심문할 것이다.”

교의 장로를 죽인 인물 뒤에 단체가 있을 수 있다 판단한 것이다.

흑의인들의 그물망은 더욱 촘촘해졌고, 빠져나갈 틈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새끼들···.”

“···여기서 끌려가면 죽을 것이다. 녀석들은 사람목숨을 가볍게 보고 있다.”

“······.”

마한로는 허탈한 심경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신의 손은 적수공권이었고, 적들은 저마다 날카로운 검과 도로 무장했으니, 무인들이 분명했다. 늙은 거지와 자신만으론 대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마한로의 눈에 하늘에서 새가 날아드는 모습이 들어왔다.

“!”

새는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럿이었고, 또한 새도 아니었다.

타닥. 탁.

일단의 인물들이 흑의인이 가득한 골목 한 가운데로 날아든 것이다.

“멈춰라!”

흑의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 잠시 뒤로 물러섰고, 정체불명의 인물은 거지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한로를 향해서는 눈길 한번을 주지 않은 채였다.

“너 몇 기냐?”

거지의 손에 든 것이 타구봉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늙은 거지는 급하게 답했다.

“이십팔기(二十八期)! 만정소라합니다.”

“······나는 일기(一期) 위지승이다.”

거지 만정소의 얼굴에 더없이 환한 미소가 새로이 생겨났다.

‘일기(一期)···. 일기(一期)라니···.’

만정소는 일기(一期)라는 말이 이렇게 달콤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살았다!’

만정소는 위지승의 등판이 얼마나 든든한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불안했던 마음이 푹 놓였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십팔기는 뭐고 일기는 또 뭡니까?”

마한로는 이들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하오문 수련관 기수를 마한로가 어찌 알겠는가.

“잠자코 있어라. 이제 우린 살았다.”

위지승은 둘을 뒤로하고 흑의인들을 노려봤다.

“그대들은 누군가? 어찌하여 죄 없는 거지들을 핍박 하는가!”

“······.”

흑의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너희도 저들과 한 패인가?”

골목 중앙으로 날아든 인물은 넷.

날랜 경공술을 보아 무공을 익힌 것이 확실했지만,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내 후배가 여기 있어서 말이야.”

“···그럼 같이 죽어야겠군.”

“흐흐. 좋군. 좋아. 하하하.”

“웃음이 나나?”

위지승은 웃음을 멈추고 살기어린 눈빛을 날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이쪽도 너희를 살려 보낼 생각은 없었다.”

위지승이 손을 번쩍 들자 골목 너머 담장에서 많은 이들이 모습을 보였다.

타닥. 탁.

저마다 가볍게 담장위로 올라서며 깊이 무공을 익혔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

‘언제 이렇게 많은 놈들이!’

이번 일에 함께하는 혈무단이 이십(二十)이었는데, 저마다 일당백을 자랑하는 마공의 고수였다. 헌데 혈무단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도 이들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대들의 이름이라도 남기는 것이 어떤가?”

“······.”

혈무단주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위지승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럼 너희 비석에 새겨줄 말은 없겠어. 그래도 괜찮은가?”

“···너희는 지금 누굴 상대하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위지승은 이미 문주를 통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큭. 크크.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떤가. 크하하하.”

“······.”

위지승의 웃음은 혈무단주의 경각심을 일으켰다. 녀석의 웃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주변에 포진한 놈들의 태도가 문제였다.

‘저 녀석 외에 아무도 웃질 않는다.’

놈의 통솔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나, 보통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무력 단체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이끄는 혈무단도 마찬가지였다.

“큭큭. 괜히 입방정을 떨까 싶으니, 이만 입을 다물도록 하지.”

혈무단주는 오늘 일이 쉽지 않을 수 있음을 짐작하고 단원들에게 명령했다.

“···숨김없이 실력을 발휘하라. ···살아남아라.”

“!”

혈무단은 저마다 마공을 일으켰고 곧 사이한 기운을 풍기기 시작했다.

“······.”

위지승의 시선이 멀찍이 떨어진 가옥 지붕의 두 인물을 향했다가 떨어졌다.

바로 문주와 방주가 지켜보는 곳이었다.

“살(殺)!!”

황혼단주인 위지승의 명령에 여명단주도 이어서 입을 열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두 무리가 충돌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챙! 챙챙!

“으악!”

벌써부터 바닥에 몸을 누이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황혼단과 여명단은 숫자에 우위가 있는 만큼 셋씩 짝을 지어 마교도를 상대하고 있었기에 첫 사상자는 마교 쪽에서 나왔다.

“품(品)자 대형을 유지하라! 서로를 지켜라!”

하오문 수련관의 초기 수료생인 이들이라도 오랜 시간 마공을 연성한 이들과 일대일로 대적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흑림방은 숫자의 우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품자 대형으로 마교를 상대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하네?”

“미리 숫자를 파악해둔 덕입니다.”

호충과 왕호일행은 마한로와 만정소를 먼저 발견하고 마교에서 접근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마교도의 무위와 숫자를 파악할 수 있었고, 품(品)자 대형으로 상대한다는 계획까지 세울 수 있었다.

“흑림방 애들이 좀 서운하겠어. 저마다 마교도를 상대한다는 기대가 있었을 텐데 말이야.”

“오늘 충돌은 무림인으로서의 대결이 아니라 전쟁입니다.”

“그렇지. 무공의 우위를 가리기위한 대련이 아니라 목숨을 빼앗고 빼앗기는 전쟁이지.”

“저기 저 놈은 단주들이 상대하긴 좀 버거워 보입니다만···.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마교인 하나를 상대로 여명단주와 황혼단주가 합공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조금씩 뒤로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녀석의 무위가 심상치 않았다.

“전쟁이라며? 호승심이라도 생겼어? 둘이 나름 잘 하고 있잖아.”

“간만에 저와 어울리는 상대를 만난 터라···.”

“얼굴 가리고 대월천룡권을 쓰지 않는다면 보내주지.”

“천수흑패 녀석들 가르치느라 파산도법(破散刀法)을 완벽하게 익혔습니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가봐.”

“예. 문주님.”

왕호는 천을 꺼내 얼굴을 가린 다음 지붕을 박차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타앗.

왕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도를 발로 차 올려 잡고, 두 단주가 상대하는 마교인을 향해 쇄도했다.

“너는 내 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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