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주 위에 방주, 방주 위에 문주
***
“너는 내 몫이다!!”
채앵!
“으윽!”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선 혈무단주는 본래 자신이 막고 있던 두 놈이 다른 이들을 상대하러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둘은 품자 대형을 이룬 적을 상대하는 자신의 부하들의 뒤로 다가가 가볍게 칼질하며 숫자를 줄여나갔다.
샤악.
“꺼억!”
샤각. 샥.
“으악!”
“네 이놈들!! 멈춰라!!”
“어허. 넌 내 몫이라니까.”
부하들을 구하러 가고 싶었지만, 얼굴을 가린 놈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저리 비켜!”
혈무단주는 가장 자신 있는 자신의 도법을 펼쳐냈다.
[혈도참(血途斬))]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혈무단주의 도가 네 방위를 점하며 왕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풍도(風刀)]
챙!
바람처럼 빠른 왕호의 도였지만, 파산도법(破散刀法) 일식인 풍도(風刀)로 막아내긴 어려웠다.
[천도(川刀), 횡도(橫刀), 섬전도(閃電刀)]
따다다당.
왕호는 파산도법의 초식을 연달아 펼치고 나서야 상대의 도를 막아낼 수 있었다.
“역시. 상대할 맛이 나는 군.”
“···네가 이들을 이끌고 있었나?”
조금 전 상대하던 둘보다 뛰어난 무위를 갖춘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진짜 유언은 안 남길 생각이야?”
“이익!”
혈무단주는 말을 돌리는 상대에게 자신의 도를 들어 화답했다.
“하앗!”
따당. 챙!
“하하. 문답무용이라 좋지!”
.
.
.
둘이 어울리는 동안 호충은 모습을 감추고 전장 가까이 다가갔다.
“······.”
그리고 두 무리의 충돌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품에서 가볍게 유엽비도를 발출했다.
슈악.
황혼단원은 미간으로 날아드는 검에 당하기 직전에 들린 소리를 똑똑히 확인했다.
따앙. 쑤욱.
상대의 검은 위로 불쑥 들려 올라갔고, 크게 드러난 빈틈으로 자신의 도를 밀어 넣었다.
푸욱.
“꺽!”
문주가 비도를 날려 자신을 도왔음을 알 수 있었지만, 한가하게 인사할 시간은 없었다.
“하앗!”
날아드는 다른 칼로부터 주변의 단원을 보호하고 녀석들을 상대해야 했다.
“······.”
호충의 눈은 전장 전체를 담고 있었고, 품에 넣은 손에 잡힌 유엽비도를 한시도 떼지 않았다.
‘너희를 단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
.
혈무단주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상대를 향해 마공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도를 빠르게 내려치고 있었다. 상대의 무기를 부러뜨리는 수법이었다.
“하아아!”
[혈파참(血破斬)]
따앙. 땡그랑.
“읏!”
혈마단주의 눈에 왕호의 도가 부러지며 드러난 빈틈이 크게 들어왔다.
“끝이다!”
“!”
왕호는 자신의 심장 어림으로 날아드는 도를 보며 팔을 들어 올렸다. 항상 손목에 차고 다니는 문주의 선물인 흑주(黑紬)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팅.
“!”
피잇.
날아든 도는 왕호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고, 이 상처가 왕호의 본능을 일깨우고 말았다. 보통사람이 부지불식간에 눈앞에 무언가 들이닥치면 손을 휘젓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왕호는 대월천룡권을 자다가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매일같이 연습했고 지금은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까지 대월천룡권의 초식을 따르고 있었다.
[천룡출두(天龍出頭)]
왕호의 신형이 혈마단주와 얽혀들었다.
어깨에서 시작한 천룡출두(天龍出頭)의 고(柧)가 혈무단주의 오른쪽 팔뚝을 쳤다.
쿵. 우득.
천룡출두는 뚝뚝 끊어지는 초식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연달아 단숨에 펼치는 초식이었다.
퍼버벅. 으드득. 뻐억! 뻑!
“꺼걱!”
왕호의 고(柧)는 혈무단주의 팔을 타고 올라가며 몸을 두드렸고, 순식간에 뼈를 바수어 버렸다. 혈무단주가 방비할 수 없었던 이유 또한 간단했다. 도를 쓰던 상대가 갑자기 펼친 수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연속으로 들어왔는데 그 무공의 수준 또한 고절하기 짝이 없었다. 혈무단주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부리부리한 상대의 두 눈이었다.
파삭.
“······.”
혈무단주는 눈에 초점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몸을 누였다.
쿵.
특히 마지막에 왕호의 머리와 서로 단단함을 겨뤘던 혈무단주의 이마는 깊이 함몰되어 있었기에 소생 가능성은 전무(全無)했다.
하지만 왕호는 상대를 이겼다는 희열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제길.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오히려 긴장만 가득했다.
‘문주님과 분명 안 쓰기로···.’
왕호는 불안한 눈빛으로 얼른 주변을 돌아봤다. 문주가 자신이 대월천룡권을 쓰는 모습을 봤는지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초식을 끝냈으니 못 보셨을 수도 있지.’
“!”
자신을 보던 호충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한 왕호였다. 호충은 검지를 들어 왕호를 겨누고 있었다. 그리곤 자신의 손가락을 두 개 펼쳐 자신의 눈을 가리키고 다시 검지로 왕호를 가리켰다. 전부 봤다는 뜻이었다.
“···헤헤.”
“으이그.”
민망한 얼굴의 왕호는 얼른 몸을 전장으로 돌렸다. 왕호까지 뛰어들자 안 그래도 우세를 점하던 전장이 한쪽으로 완벽히 쏠리기 시작했다.
“몰아쳐라! 단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와아악!””
혈무단주가 땅바닥에 몸을 누인 그 순간부터 승부는 정해져 있었다.
***
두 무리의 충돌이 시작하고 이내 끝을 고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 단원들은 저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이겼다.”
단원들이 승리의 기쁨을 맛볼 시간은 없었다. 황혼단주와 여명단주가 급하게 정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신 바짝 차려! 다친 동료를 살펴라!”
“주변에 의심스러운 놈이 있는지 찾아봐!”
왕호는 슬그머니 빠져서 한참 떨어진 호충 곁으로 다가왔다. 차마 얼굴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
“할 말 없어?”
“···죄, 죄송···.”
“방주라는 놈이 어깨에 칼침까지 맞고? 엉? 안 쓴다는 진신무공까지 대놓고 쓰고? 쟤들한테 안 부끄럽냐?”
왕호는 잔뜩 굳어서 호충의 꾸중을 듣고 있었고, 혈무단주의 도에 입은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
호충은 왕호의 어깨에 입은 상처 부위를 얄밉게 눌러주었다.
꾸욱.
“···으갸갹.”
“엄살? 지금 흑림방 방주가 엄살을 부렸어? 내가 잘 못 들었나?”
“무, 물론 잘 못 들으셨지요. 하나도 안 아픕니다. 그저 하품이 나와서. 하아음.”
안 아프다는 놈이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으휴. 다친 단원들이나 잘 챙기라고 해. 죽산흑패에 근방의 의원들 데려오라 하고.”
“옙.”
“그리고 저기 눈치만 보는 새끼는 죽산흑패로 못 들어온다. 알지?”
호리호리한 만정소 뒤에 커다란 몸을 숨기고 눈만 굴리는 인물은 마한로였다. 마한로는 무지막지한 무림인들의 칼부림을 보고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아. 너무 잘 숨어 있어서 보이질 않았습니다.”
“풉. 농담할 기운이 있는 걸 보니 살만한가 보네. 안 보여도 감시는 계속해.”
“예. 문주님.”
“너도 얼른 의원에게 가서 보여. 피는 멎게 했지만, 덧나면 골 아프다. 깊이도 베였네. 에잉.”
왕호는 문주가 왜 자신의 상처를 눌러봤는지 깨달았다.
‘왜 그렇게 아팠나 했더니···.’
자신이 얼마나 크게 다쳤는지 확인하고 지혈을 위해 일부러 상처에 내기를 흘려 넣은 것이었다.
“······충.”
“이 새끼는 맨날 말로만 충이래. 빨리 안 움직여?”
호충은 발을 들어 뭉그적거리는 왕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쩍.
“으억! 아프다고요!”
***
만정소는 자신과 함께했던 마한로도 함께 죽산흑패로 가서 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불가라는 답만 돌아왔다.
“이 녀석도 갈 곳이 없는데···.”
“아까 보니 녀석들이 이놈을 노리고 있는 것 같던데, 왜 우리가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
“이미 목숨을 구해준 것으로 충분한 호의를 보였다. 더는 안 될 일이야.”
“그럼 죽산 임시 분타에라도···.”
마한로를 하오문 휘하 개방에 들이려고 한 말이었지만, 이것마저도 불가였다.
“이봐. 이십팔기(二十八期) 만정소.”
“옙! 일기(一期) 대선배님!”
“우리가 상대한 놈들은 아직 정체도 확인하지 못했어. 마침 우리가 길을 지나는 길이라 참견할 수 있었지만, 이미 우린 녀석들과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지.”
“···예.”
“언제 다시 올지 모르지만, 앞으로 녀석들과의 사이에 남은 것은 피와 죽음뿐이다. 문도 하나를 살리기 위한 행사치고 상당히 과한 감이 없지 않은데, 알 수 없는 놈까지 보호해달라?”
“······.”
“그마저도 이번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놈은 바로 저 녀석이야. 저 녀석 때문에 죽산 분타 개방도와 죽산흑패까지 다 죽었으면 좋겠어?”
“······.”
위지승은 일부러 마한로를 향해 물었다.
“너! 누구와 원한을 맺을 일이 있었나?”
“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림인들이 널 찾아와? 그것도 고수들이 무더기로?”
“···과거 흑패에 몸담기는 했으나, 무림인들과는 안면이 없습니다요.”
“그럼 그놈들은 뭔데?”
“······.”
길바닥에 주검으로 변한 무림인들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몸이 떨려왔다.
“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 이십팔기(二十八期)는 날 따라오도록.”
“옙!”
만정소는 죽산흑패의 전각으로 들어가 사열한 하오문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흑의인들을 상대로 마음껏 무공을 뽐내던 고수들이 지금은 바짝 자세를 잡고 있었다.
‘역시 일기(一期) 선배의 위용은···.’
만정소는 이들이 사열하고 기다리는 인물이 자신 옆에서 걷고 있는 위지승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위지승이 구석에서 팔에 붕대를 감은 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방주님. 황혼단 위지승. 개방도 만정소를 데려왔습니다.”
“어. 수고했어.”
왕호가 위지승의 인사를 받는 모습과 방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만정소는 등골이 쭈뼛했다.
‘바, 방주급 인물이 죽산에 행차하시다니···.’
아직 놀라기엔 한참 일렀다. 왕호가 마당에서 안채를 향해 고하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문주님. 데려왔습니다.”
“!”
끼이익.
호충이 문을 열고 나오자 만정소는 풀썩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헙!”
“···다쳤나? 왕 방주. 문도가 다쳤으면 의원한테 먼저 보냈어야지.”
“제가 알기로 다치진 않았는데···.”
만정소는 뒤로 넘어간 몸을 앞으로 숙였다.
“개방의 만정소가 문주님을 뵙습니다.”
“···안 다쳤네?”
“문주님 덕분에 오늘 비루한 생을 보존하였습니다요.”
“비루하기는···. 하오문도 하나를 살리는 일보다 더 보람찬 일이 어디 있겠나.”
“아아.”
“그리고 왕 방주.”
“예. 문주님.”
“애들은 왜 세워둬? 들어가서 쉬라고 해.”
“예! 다들 들었지. 오늘 수고했다 하신다! 해산!”
“충!”
호충이 아무런 치하도 하지 않았지만, 단원들은 알고 있었다.
‘문주님이 우릴 얼마나 아끼시는데!’
‘오늘 문주님이 아니셨으면 난 죽었어!’
마당에 꿇어앉은 만정소는 이들의 단단한 결속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들이 하오문의 정예 무사들···.’
“개방의 하오문도는 왕 방주와 같이 들어오도록.”
“···예.”
하오문의 문주와 최정예 무인들을 거느린 방주가 자신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앉지?”
“제, 제가 어찌···.”
왕호가 얼른 나섰다.
“문주님은 두 번 얘기하시는 거 싫어하신다. 앉으라면 그냥 앉아.”
“옙!”
착.
만정소가 자리에 앉아 호충은 그간의 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 알고 묻는 것이기에 사실확인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대와 함께하던 인물은 누구인가.”
“성명은 마한로, 본인 입으로 자장 흑패의 패주로 군림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어 보입니다요. 두 다리의 발목에 난 칼자국을 보면 어디서 도둑질이라도 하다 보복을 당했나 싶습니다.”
“······.”
호충 본인이 직접 자른 힘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