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신투의 비급
***
“녀석의 발은 계속 나아지고 있습니다. 어디서 좋은 의원을 만난 모양입니다.”
“···나아져?”
잘린 힘줄을 붙여준다는 의원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의원이 있다면 신의(神醫)라 불리며 중원 무림에서 유명세를 탔을 것이다.
“아직 다 나은 것은 아니지만, 곧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서 기연이라도 만났던가?”
“예?”
“아니다. 그보다 왜 녀석과 함께했지? 녀석이 먼저 접근했나?”
“아닙니다. 동냥질을 하다가 시비가 붙었사온데, 나중에 사정을 들어보니 조금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거둘 마음이었지요.”
만정소는 마한로에 관해 묻는 이유를 짐작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녀석도 왜 자신이 무인들에게 노려지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흉포한 성정을 갖고 있으나, 저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바로 꼬리를 내립니다. 이런 녀석은 무인들과 드잡이할 일도 없습니다. 또한 죽산흑패에 들렀던 하오문 본단 소속 문도께서 녀석과 작은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요. 그 때문에 녀석을 챙겨주고 있습지요.”
“그건 나도 들었어. 대단한 인연은 아니더군. 그 외에 그대가 아는 것이 없다는 뜻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나?”
“예···.”
“그럼 더 알아봐야겠지?”
“하명하십시오.”
“오늘 확인했듯이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녀석을 노리고 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터. 하지만 여기 왕 방주와 하오문의 무인들이 죽산에 상주하며 그들을 기다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너는······.”
만정소가 들은 명령을 요약하자면 마한로와 함께 서안으로 이동하라는 것과 마한로에 관하여 파악하라는 내용이었다.
“···마한로를 데리고 가버려도 이곳은 여전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마한로를 데리고 가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이곳으로 올지 모를 정체불명의 적이 죽산흑패와 죽산의 개방 분타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염려였다. 하오문의 정예 무인들이 빠져나가면 그들을 상대할 전력이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녀석들의 행사를 보아하니, 마한로를 쉽게 놓칠 것 같지 않았다. 너는 마한로를 드러내며 길을 떠나라. 그래야 녀석들을 서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문주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마한로를 위해 하오문이 수고하고 있음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무림을 활보한다면 결국 하오문에도 해가 될 것이다. 참초제근(斬草除根)을 노리는 것이니 마음 쓸 것 없다.”
“······.”
만정소는 감격하여 흐느끼며 포권지례를 보였고, 곧 왕호와 함께 밖으로 빠져나갔다.
죽산흑패의 전각을 빠져나가기 직전 왕호가 전낭 하나를 건넸다.
“이건 가는 길에 노자나 하시게.”
“이렇게까지···.”
“그대가 처음 맡은 임무가 아닌가. 이제 자네의 일이 아니라 하오문의 일일세.”
“···명을 받들어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
“아. 문주님 녀석에게 챙겨주라고 하신 물건이 있었는데 깜빡했어. 기다려보게.”
왕호는 얼른 커다란 도끼를 들고 다시 나왔다.
“녀석은 몸집이 커서 이런 도끼가 어울릴 것 같다고 하시더군.”
“···허허.”
밖으로 나오자 멀리 골목 구석에서 눈만 내밀고 있는 마한로를 찾을 수 있었다.
‘저런 녀석이 원한을 만들어봤자 얼마나 만들었을까···.’
만정소가 손짓하여 부르자 쪼르르 달려와 앞에서는 마한로였다.
“어르신. 안에서 별고 없으셨습니까?”
“이거나 받아.”
턱.
“······.”
마한로는 오랜만에 잡는 자루의 감촉에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은 도끼로 시전을 주름잡았던 때도 떠올랐다.
“어때? 쓸 수 있겠어?”
“···쓰다 뿐입니까.”
부웅. 우웅.
마한로의 손에서 가볍게 회전하던 도끼가 울음을 토해냈다. 다리가 다친 것이지 팔이 다친 것은 아니었다.
“패주시절 제 독문병기였습지요.”
“허허. 역시···.”
‘문주님은 녀석이 쓰던 무기까지 짐작하고 계셨어.’
“결론만 말하마. 네가 하오문에 드는 것은 불가야. 네 살길은 알아서 찾으라 하신다.”
“······.”
“그러니 나와 서안으로 가자.”
“!”
“하오문 본단이 있는 그곳에서 있다 보면 다시 기회가 올 것이다.”
“정말 저도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오문은 하류 인생을 귀히 여긴다. 그래서 하오문이다.”
“···따르겠습니다. 어르신.”
“허허. 우선 먼 길을 떠날 준비부터 하자.”
만정소는 마한로를 데리고 일부러 죽산의 대로(大路)를 따라 이동했다. 당장 이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 자신들을 확인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
흑림방의 행사가 있었던 골목.
처참한 몰골의 시신으로 가득한 곳에 한 인물이 들어섰다.
“······.”
그는 주검을 살피다가 마지막으로 이마가 함몰되어 죽은 혈무단주를 찾을 수 있었다.
“!”
‘무당파에 혈무단주를 상대할 무인이 있었던가!’
무당산 근처라 무당파의 인물을 의심했지만, 주검에 남겨진 흔적은 무당을 부인하고 있었다.
‘팔과 몸통에 이어 머리까지 단번에···. 무당파의 무공이 아니다. 절대로 도문의 무공이 아냐.’
다른 주검도 후다닥 살폈지만, 같은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혈무단이 전멸.’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며 조심스럽게 몸을 빼낸 그는 담을 훌쩍 뛰어넘어 사라졌고, 다음날 다른 곳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
‘저놈들이 멀쩡하게 돌아다니다니···.’
그가 대로를 통해 이동하는 만정소와 마한로를 지켜보고 있음이다. 본래 혈무단이 오기 전 마한로를 추적해온 인물이었다. 만정소와 마한로의 용모파기를 눈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혈무단을 살해한 놈들을 찾을 열쇠도 바로 저들이 갖고 있을 것이다.’
***
만정소와 마한로를 보내고 다음 날, 호충은 왕호를 불러 이후의 일을 맡겼다.
“···알지? 오늘 출발하라고 했으니, 녀석들 모르게 따라가. 놈들이 또 오거든 바로 모가지 따서 묻어버리고.”
왕호는 마한로의 일보다 문주가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곳에서 헤어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말 저희 없이 가시렵니까?”
이제 아버지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흑림방을 대동할 수도 있지만, 마교의 공세가 하오문으로 집중될 것이 뻔한 상황이라 이들을 빼낼 수 없었다. 어차피 호충에겐 무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긴밀히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역의 루방 정보원이면 충분했다.
“간간이 소식을 보내마.”
“그러지 마시고 지금 누워있는 단원들이 회복하면 같이 가시지요. 어차피 녀석들은 저희와 같이 하오문으로 출발하지 못합니다.”
마교인들을 상대하며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입은 단원이 없지는 않았다. 왕호보다 더 중한 상처를 입은 이들도 십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우선 회복에 힘쓰고 이후 하오문으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네 형수 못 믿냐?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또 언제나 내게 달려올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호충이 무림맹에서 경매 행사를 치르고 하오문 본단에 돌아와 업무를 보는 동안 호충의 연인 화진은 잠깐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소식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언제든 호충이 부르면 루방을 뒤로하고 오겠다는 서찰을 꾸준히 보내고 있었다.
“···누가 형수를 못 믿는답니까? 아쉬워서 그러지요.”
“재미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너를 부르지.”
“약조하셨습니다.”
“그래. 가서 패방주, 상방주랑 싸우지 말고 잘 지내.”
“본단에 어르신이 계신데···. 감히 그럴 일은 없습니다.”
“특히 패방주가 시키는 일은 발 벗고 나서서 도와. 하오문에서 흑림방의 무력이 가장 뛰어날지 몰라도 실질적으로 하오문을 운영하는 것은 그다.”
“안 그래도 그러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신투의 물건을 운반하는 일을 돕다가 문주님께 불려나왔지 않습니까.”
“아. 너도 신투를 만나봤어?”
“패방주가 녀석에게 무력을 보이라고 해서 잠시 얼굴은 봤습니다.”
“큭. 그 새끼 얼굴이 어떻게 변하든?”
“그다지 변화는 없었습니다. 허공에 권기를 날렸는데도 멍하니 보고만 있었으니까요.”
“그거면 됐어. 패방주가 무력을 보이라 부탁한 이유가 있었다. 제 놈이 무공 좀 익혔다고 태도가 뻣뻣했거든.”
“진즉에 말씀하시지요. 제가 처리했을 것인데···. 권기를 허공에 날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알차게 써먹어야 할 놈이야. 이대로 성장하면 나 외에 누구도 녀석을 잡지 못할 것이다.”
아직 대도신투의 무공을 대성하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상당한 신위를 보인 녀석이었다.
“충성을 심어야 할 놈에게 폭력을 가하면 어찌 되겠어? 나한테 맞은 칼침도 아직 다 아물지 못했는데 너한테 또 맞으면···.”
“그 칼침을 문주님이 놓으셨습니까? 어휴. 어디서 그렇게 다리를 다쳤나 했더니···.”
“그 새끼가 다른 보물창고 위치를 안 불잖아. 후유증 안 남게 조심히 찔렀어.”
“그래도 그렇지···.”
“그 새끼 마누라가 스물이 넘고, 자식은 육십이 넘는다더라. 중원의 성마다 마누라 만들어 놓고 이름까지 바꿔가면서 사는 놈이야 그 녀석이.”
아직 혼인하지 못한 왕호의 심기를 거스르는 정보였다.
“···거시기부터 자르셨어야죠.”
“안 그래도 말 안 들으면 자른다고 했다.”
“저 시키십시오. 제가 싹둑 잘라드리지요.”
“······이제 너도 기루 끊고 착실한 여인을 만나야지 않겠냐?”
혼인을 생각해보라는 말이었다.
“누구는 한꺼번에 둘이나 갖겠다고 난리더만···.”
“비연이 얘깁니까?”
“처음엔 싫다고 하더니 결국 그리되더라.”
“크크. 두 가문의 가주를 장인으로 모시고 살려면 녀석도 고생 좀 하겠습니다.”
“푸흐흐. 비연은 거기까지 생각도 못 하고 있을걸? 눈이 휙 뒤집혔어.”
“하하하. 스스로 무덤에 걸어 들어가고 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후 가벼운 신변잡기를 끝으로 대화를 마친 왕호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부디···. 무운을 빕니다.”
“내 앞을 가로막을 적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편이 나을 것 같다만?”
“하하하. 옳은 말씀이십니다.”
이후 왕호는 만정소와 마한로의 뒤를 쫓겠다며 단원들을 대동하고 나섰고, 호충은 죽산흑패에 남아 치료 중인 흑림방의 단원들을 살폈다. 그곳에는 위지승이 남아 다친 단원들을 지키고 있었다.
“위 단주가 남았네?”
“예. 중하게 다친 놈들 대부분이 황혼단인지라···. 면목 없습니다.”
급하게 길을 떠날 수 없는 단원들 대부분이 황혼단에 속해 있었던 덕분에 위지승이 이들을 통솔해 돌아가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많이 다쳤다는 것은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전력으로 녀석들을 상대했다는 증거이고 또 자신이 다치며 주변의 동료를 지켜냈다는 의미야.”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고 하는 말이었다.
“마교 녀석들을 정파의 무림인들과 비교하지 마. 우리 흑림방 단원들은 어제 정말 잘 싸웠어.”
“예. 문주님.”
“어제의 피 튀기는 경험은 내일 한 걸음 더 나아갈 힘으로 돌아올 것이야. 앞으로 하오문 본단에서도 녀석들을 상대해야 할 터. 무리하지 말고 몸을 완전히 회복한 다음에 움직여. 하오문의 정예 무인을 아껴야지.”
“···명심하겠습니다. 문주님.”
“······.”
“······.”
“······.”
차마 염치가 없어 잠든 척하고 있었던 문도들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꾹 감아버렸다.
‘문주님이 우릴···.’
‘···인정해주셨다.’
호충은 품에서 묵직한 전낭을 꺼내 위지승의 품에 넣었다.
쩔렁.
“상처 빨리 아물려면 고기가 최고다. 잔뜩 사 먹여. 남으면 뒈진다? 엉? 이것저것 맛있는 건 전부 사 먹어.”
“···예.”
호충은 부하들을 치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
호충의 여정이 다시 시작됐다. 홀가분하게 홀로 떠나는 여정이었다.
등에는 등짐을 이고 있었고 손에는 서책 하나를 들고 읽으며 가는 모습이 꼭 과거를 보러 가는 서생으로 보였다.
호충이 아버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때 하오문 본단에 머물던 신투 흠양신이 사중환과 함께 텅 빈 동혈로 들어서고 있었다.
흠양신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다리 덕분에 목발을 단단히 쥐고 걸음을 옮겼는데, 텅 비어있는 동혈은 그 목발을 놓칠 만큼 큰 충격을 주었다.
텅. 터엉.
빈 동혈이 작은 소리를 메아리로 만들고 있었다.
“······.”
사중환은 흠양신의 절망에 빠진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보면 모르고 온 줄 알겠다?”
“···끄윽. 먼지까지 다 털어내셨습니다. 그려.”
“너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모르느냐? 아직 하나 남았잖아.”
흠양신은 사중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었고, 거기서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
자신이 대도신투의 무공 비급을 숨겨둔 곳이었다.
“내가 밧줄도 챙겨왔다? 잘했지?”
흠양신은 미워죽겠다는 듯이 사중환을 노려봤지만, 그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고수였다. 패방주가 전부도 아니었다. 나이 먹은 노인과 다른 방주의 무위도 엄청났고, 아직 약관에 이르지 못한 개방의 후개도 결코 자신의 아래라고 볼 수 없었다.
“···자, 잘하셨소.”
“뭐하니? 얼른 이리 와.”
“옙!”
사중환은 밧줄 한쪽을 흠양신의 몸에 묶고 중간에 묵직한 쇠고리 하나를 끼워 넣었다. 그리곤 작은 동혈 밑으로 가서 위를 노려보며 잠룡진을 풀어냈다.
후우웅. 우웅.
‘썅! 저건 매번 봐도 적응이 안 돼!’
내공의 흔적도 찾을 수 없던 상대가 갑자기 무지막지한 내공을 드러낸다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하오문 고수들의 이런 특수성 때문에 흠양신은 하오문의 고수가 몇이나 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수인줄 알고 함부로 했다간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릴 수도 있는 곳이었다.
사중환은 묵직한 쇠고리를 잡은 손을 등 뒤로 잔뜩 잡아당겼다가 동혈 천장으로 쏘아냈다.
“으라차!”
쏴아악!
밧줄을 매단 쇠고리가 마치 지상 최고의 무기라도 되는 양 기를 가득 머금고 천장을 파고들었다.
콰앙. 꽈드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