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 난 다람쥐
***
밧줄을 매단 쇠고리가 마치 지상 최고의 무기라도 되는 양 기를 가득 머금고 천장을 파고들었다.
콰앙. 꽈드득.
“······.”
흠양신은 저 쇠고리가 마치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것 같아 몸을 움찔거렸다.
“이제 올라간다?”
“···얼른 가지고 내려오겠습니다.”
사중환이 밧줄을 한 번씩 잡아당길 때마다 흠양신은 위로 쑥쑥 올라갔고 작은 굴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래 걸리냐?”
“아닙니다! 손에 닿는 곳에 있어서 금방···.”
손에 닿는 곳에 있기는 하지만, 중간에 걸쳐둔 미세한 굵기의 천잠사를 건드리면 온갖 기관장치가 발동해 침입자를 벌집으로 만들어 버리는 구조였다. 천잠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얇았기에 누구든 쉽게 걸려들 것이라 자신했지만, 이제 자신이 걸려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내 손으로 이걸 또 꺼낼 줄이야···.’
“······.”
하지만 흠양신은 작은 굴에 넣으려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굴 안을 보고만 있었다.
“빨리 안 꺼내!”
“······.”
밑에서 사중환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도, 흠양신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 이 새끼 진짜 자른다!!!”
그제야 흠양신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 하냐! 왜 안 꺼내!”
“아···.”
다시 작은 굴을 들여다본 흠양신이 팔을 축 늘어트렸다.
“내려주십시오.”
“···뭐야?”
사중환은 흠양신의 말에 우선 밧줄을 풀어 땅에 발이 닿게 해주었다. 사중환은 흠양신의 말을 듣고서야 왜 녀석이 크게 실망한 표정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벌써 가져가 놓고 왜 저를 여기까지 올려주신 겁니까?”
“···없어?”
“오자마자 쎄 했습니다. 이렇게 다 비워놓고 그것만 안 챙겼을 리가···”
“진짜 안 건드렸거든?”
사중환은 답답한 마음이었다.
“저기에 비급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래!”
“패방주님은 아니라고 해도 영감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하! 어르신이 뭐가 부족해서 네 무공을 노리냐!”
“대도신투의 지고한 무공입니다만?”
“···어르신께서 배우신 무공은 우리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다. 어르신이 대도신투의 무공을 뭐하러 탐내겠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지요.”
“이 개구리 새끼가 사람 말을 알아듣질 못하네.”
우물 안 개구리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대도신투의 무공 말고도 더 대단한 무공이 수두룩했다.
“그럼 대도신투의 무공이 당가의 뇌룡심법보다 대단해?”
“···그, 그건.”
뇌룡심법은 범용적이고 위력적인 당가의 심법이었다. 대도신투의 무공과 비교하기 쉽지 않았다.
“남궁의 제왕검형에 비하면?”
“······.”
남궁가의 제왕검형은 과거 중원 무림에 군림했던 검왕의 무공으로 극성까지 익히면 누구도 상대할 수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대도신투의 무공도 만만치 않았다.
“이번엔 확실하게 답해. 화산의 자하신공.”
“!!”
화산의 자하신공은 확실히 무리였다. 대도신투 본인도 화산에는 차마 도둑질을 할 수 없었다고 기록에 남겨두었다. 자하신공을 극성으로 익힌 상대에 걸리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이유였다.
“이것보다는 못한 모양이네?”
“하오문에 자하신공도 있었습니까? 그럼 왜 경매에 내놓지 않으시고···”
“문주님이 맛있는 건 아껴먹자는 주의라···.”
“하!”
“어쨌든 네 무공보다 더 나은 무공이 하오문 비급 창고에 가득해. 그런데 어르신이 왜 네 비급을 훔쳐!”
“사람 욕심이···.”
“무엇보다 넌 우리 문주님을 모르지.”
“문주님과 개인의 욕심이 무슨 상관이랍니까.”
“문주님은 어르신이 뭘 요구하셔도 다 주실 분이다. 어르신은 하오문의 웃어른이나 다름없거든. 네 무공을 달라고 하셔도 그냥 내줄 분이란 말이다!”
“그럼 내 비급은 대체 누가 가져갔단 말입니까!”
“···혹시 우리 오기도 전에 도둑맞은 거 아니냐?”
“!!!”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듣고 나선 그 외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 내가 도둑을 맞아?! 대도신투의 전인인 나 흠양신이!!’
“큭. 대도신투의 전인이라는 놈도 도둑을 맞는구나. 이거 미치겠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없다며?”
“어, 없기는 한데···.”
“기관장치는 발동했고?”
“···아뇨.”
깔끔하게 비급만 사라졌다.
“그럼 비급만 귀신같이 빼갔다고?”
“······.”
“녀석이 신투의 안가에 들어와서 다른 보물은 건드리지도 않는 용의주도함까지 갖췄다는 말이네? 대체 언제 도둑을 맞은 거야?”
흔적도 남기지 않고 터는 방식은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수법이라 이젠 도둑맞은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끄윽. 죽어서 선조들을 대체 어떻게 뵈어야 할지···.”
신투는 도둑질을 해야지 도둑을 맞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아.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신투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사중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젠 도둑놈까지 가문 타령이네.’
또한 사중환은 흠양신에게 간단한 해결책을 일러줬다.
“야. 도로 찾아오면 될 것을 왜 그리 심각해?”
휙.
도로 찾아온다는 말에 흠양신의 눈빛이 달라졌다.
“하오문 문도는 지금도 계속 늘고 있다. 우리가 찾자면 중원 전역에 못 찾을 것이 없지.”
“···뭐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방주님.”
“하긴 뭘 해? 우선 본단으로 가서 어르신께 상의를 드려봐야지.”
“그럼 저도···.”
“어허. 말단 문도가 어딜 끼냐? 나중에 부르거든 와서 들어.”
“옙!”
흠양신은 아직 다 보지 못한 대도신투 비급의 후반부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아직 후반부는 외우지 못했다고!’
대도신투의 진전을 모두 잇기 위해서라도 비급은 꼭 필요했다.
.
.
.
“이거 상당히 재미있네.”
호충이 손가락에 침을 발라 한 장씩 넘기는 서책은 흠양신이 그토록 찾고자 하는 대도신투의 비급이었다.
“아. 내가 말하고 왔던가?”
잠시 멈춰서 생각해봤지만, 누군가에게 비급을 챙겨 나왔다고 말을 해준 것 같지 않았다.
“에이. 모르면 어때. 어차피 녀석도 다 기억하고 있을 텐데···.”
호충은 느긋하게 비급을 읽으며 산에 오르고 있었다. 무당산이 아닌 반대쪽으로 향했기에 수풀이 우거지고 인적도 드문 곳이었다.
***
호충은 대도신투의 비급에 푹 빠져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높은 산으로 향하는 고갯길이었는데, 이 고개를 지나는 표국에선 표사를 많이 대동했고 상인들도 상당한 수의 무인들을 대동하곤 했다.
“흐흐흐. 손님이 왔구나.”
“생각 없는 문사 놈입니다. 다만, 가진 것은 별거 없겠습니다. 채주님.”
바로 이 고개에서 출몰하는 산적들 때문이었다. 근방은 높은 산만 가득한 곳이었기에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고, 길목에서 산적을 만나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오히려 저런 놈의 전낭이 묵직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저놈은 아직도 못 본 모양입니다.”
우락부락한 산적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문사는 서책에 빠져 산적들의 바로 코앞까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곤 앞에 무언가 있음을 알고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겼고, 채주라고 불린 인물은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걸음을 옮겨 앞을 막았다.
그럼에도 문사는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채주는 다시 그쪽으로 가서 길을 막았다. 그제야 문사의 고개가 들렸고, 채주와 눈을 마주쳤다.
“이봐. 문사 양반 앞을 제대로 보고 가셔야···.”
“헛!”
호충은 깊이 비급에 빠졌다가 갑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놀라 저도 모르게 발이 먼저 나갔다.
슉.
가볍게 뻗어나간 발이었는데, 호충의 발바닥이 채주의 몸에 닿자 기이한 반탄력이 발휘되었다.
탁. 부우웅.
“으아아아!”
호충의 발바닥에 맞은 채주는 족히 십장이 넘는 거리를 날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뒤로 데굴데굴 굴러 더 멀어지고 있었다.
“······.”
“······.”
“······.”
곁에 있던 산적들은 채주가 날아간 방향을 돌아보며 황망해 했고, 여전히 비급을 들고 발을 뻗은 자세로 굳었던 호충도 난감한 얼굴이었다.
“···거기 괜찮소?”
“끄으으.”
나름 강골이었는지 그렇게 멀리 날아갔음에도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갑자기 등장하면 내가 놀라지 않겠소.”
대도신투의 비급에 나왔던 대로 발바닥 용천혈에 내기를 집중하고 있었던 터였다. 덕분에 슬쩍 밀어내려고 했던 호충의 발이 거대한 힘을 발휘한 것이었다.
“너 이 새끼. 감히!!”
“···잘 안 들리는데 가까이 오시지.”
이마에 핏대를 올린 녀석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달려왔다. 산채의 부하들 앞에서 크게 망신을 당했다고 여긴 것이다.
“꼼짝 말고 기다려 새끼야!!”
챙!
달려오며 허리춤의 박도를 꺼내드는 녀석이다.
“어휴. 무서라.”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얼굴로 하는 말이었다.
“네 놈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가까이 달려오며 박도를 치켜든 녀석은 거리낌 없이 박도를 아래로 내리그었다. 사람의 몸을 양단하겠다는 살기로 가득한 수법이었다.
샤악.
깔끔한 내려치기라 호충은 절로 입이 열렸다.
“훌륭한 직도황룡(直道黃龍)이로다.”
파박.
거대한 힘으로 내려친 박도가 땅바닥에 박혀 들어가며 돌과 흙을 옆으로 튀기고 있었고, 호충의 신형은 도가 지나는 길에서 한걸음 옆으로 물러서서 도격을 평가하고 있었다.
“네 이노오옴!!!”
화가 머리끝까지 치달은 녀석은 상대가 어떻게 자신의 도를 피했는지 생각지도 않고 다시 옆으로 도를 날렸다.
부우웅.
“이번 횡소천군(橫掃千軍)은 조금 아쉽구나. 어깨에 힘이 들어갔어.”
호충은 철판교의 수법으로 몸을 뒤로 누이며 위로 흘러가는 도를 보고 있었다.
“뒈져! 뒈지라고!!!”
여덟 곳의 방위을 점하며 도가 날아들고 있었지만, 호충은 도격 하나하나를 가볍게 피해내며 입을 열고 있었다.
“팔방풍우(八方風雨)에 빈틈이 너무 많네. 휘몰아쳐야 하는 것은 네 박도지 가슴이 아니야. 심상이 혼란하면 손에 든 무기도 흔들리는 법. 그 어떤 순간에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평소 수련관에서 하던 버릇 때문에 나오는 진심어린 충고였지만 녀석의 귀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허억. 허억. 뭣들 해! 당장 녀석을 잡아 꿇려라!”
““예!””
호충의 앞뒤로 둘러싼 산적들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들고 달려들었다.
“그럼···. 가볍게 움직여 볼까?”
호충의 신형은 물속을 노니는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산적들의 도(刀)와 창(槍), 부(斧)는 애초에 그리로 가야하는 것처럼 호충의 몸을 피해 움직였고, 호충의 신형은 그 사이를 여유롭게 파고들며 권과 퇴를 날렸다.
뻐벅. 퍽. 우드득.
“······.”
“······.”
“······.”
호충에게 맞은 산적 중 누구도 비명을 지르는 이가 없었다. 맷집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쿵. 쿠궁.
모두 그 자리에서 기절했기 때문이다. 호충은 녀석들이 물러설 시간도 주지 않고 착실하게 수를 줄여나갔다.
뻐버벅. 퍽. 퍽.
산적들은 마치 가을날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과 같이 고이 바닥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으휴. 약골 새끼들. 한 대를 못 견디네.”
“감히 내 부하들을···.”
채주는 뒤로 물러서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잠깐 사이에 모두 당해버렸다. 주변을 돌아보니 남은 것은 자신뿐이었다. 상황파악이 된 채주는 뒤로 한걸음씩 물러섰다.
까딱까딱.
“어딜 도망가려고? 이리와 새끼야.”
“······.”
호충은 땅에 놓인 창 하나를 발끝으로 쳐 올려 손에 들었다.
뚝.
창의 중간 부분을 부러뜨려 단봉으로 만든 호충이 봉을 손 안에서 굴리며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와 같았다.
부웅. 붕.
“오라니까 자꾸 뒤로 가? 청개구리새끼였나?”
“자, 잠시만···.”
“기다리면 뾰족한 수라도 생기냐?”
“······.”
뾰족한 수가 생길 일은 없었다. 이곳은 인적이 드문 산길이었다.
“네가 채주라고? 네 밑에 애들은 여기 있는 놈들이 전부야?”
“제, 제가 고인을 몰라 뵙고···.”
“하여튼 이 새끼들은 얻어맞지를 않으면 꼭 두 번씩 말하게 만들어.”
단봉은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고, 단봉의 움직임에 맞춰 구슬픈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뻐억.
“우억!”
퍽. 퍽.
“끅. 크악!”
두두두.
“으아! 악!”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린 녀석에게로 단봉이 작렬하고 있었다.
“사람이!”
퍼억.
“으악!”
“말을 하면!”
쩌억.
“꺽.”
“들어 처먹어야지!”
빠악. 빡.
“끄아악!”
호충의 타작이 끝난 시점에 녀석은 바닥에 엎어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
“어휴. 개운하다.”
호충은 기절한 산적 둘을 데려다가 예쁘게 포개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아직 기절하지 않은 채주라는 놈을 단봉으로 푹푹 찌르며 말했다.
“정신 차리고 있는 거 알거든? 내가 힘 조절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바닥을 짚고 허리를 세운 녀석이 힘겹게 엎드렸다.
“끄으···. 하명···. 하십···.”
“얘들 말고 더 있냐고 아까 물었잖아 새끼야!”
“다, 다섯···. 산채에 다섯이 더 있습니다.”
“흐음. 여기서 얼마나 오래 활동했냐?”
이후 호충의 질문들에 충실한 답변이 이어졌다.
“족히 십년은 넘었···.”
“저는 채주 우고라 합니다.”
“외석산 깊은 곳에 저희 산채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은 답변하지 못했다.
“녹림십팔채는 어디에 있는지 전혀···.”
“그래도 아는 놈은 있을 거 아냐?”
“······.”
“몰라?”
“가끔 저희 산채에 들러서 상납을 받아가긴 하지만···.”
“···애들 깨워라. 안 그래도 전낭이 가벼워서 보충할 참이었지.”
대놓고 산적을 털어먹겠단다.
호충의 본래 성정이 어디가지 않는다.
“많이 모아놨냐? 수염 난 다람쥐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