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이 아닌가?
***
“······.”
“왜? 아쉬웠어? 몸 좀 더 풀어볼까?”
“아, 아닙니다. 가시지요. 일어나! 새끼들아!”
채주 우고는 지금까지 맞은 화풀이라도 하듯이 부하들을 두드려 패며 깨웠다.
.
.
.
“이야. 산채가 번듯하네.”
“······.”
보통 때라면 잘 꾸며둔 산채에 어깨가 으쓱했을 테지만, 산채를 털어 먹으려는 무림 고수가 하는 말이라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아이고. 겉만 번지르르 합니다. 근래 하도 손님이 없어서 근근이 입에 풀칠만···.”
“또 시작이다. 설마 내가 너희들 입으로 들어갈 양식까지 탐낼까.”
호충은 산채의 채주와 일행이 돌아오는 걸 확인한 부하들이 활짝 열어준 문을 통해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자아. 이제 채주가 머무는 곳으로 가보자.”
우고는 앞장서라는 듯이 자신을 보는 눈빛에 얼른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고, 곧 산채 안에 있던 놈들이 다가왔다.
“채주님. 저 놈은 뭡니까?”
“어쩌자고 안까지 들이십니까?”
“···말시키지 마라. 그간의 일은 뒤에 가서 물어.”
“···예.”
사정을 모르던 내부의 산적들은 채주의 뒤를 따르던 동료들에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무림 고수라고?”
“···우리가 전부 덤벼들었는데,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어. 녹림의 사자 보다 더 하다.”
“······.”
“너도 죽기 싫으면 잠자코 있어. 나서면 본보기가 될 수도 있다.”
채주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질 산적은 없었는지 호충은 편하게 채주의 거처까지 갈 수 있었다.
우고는 산채의 졸개들을 돌려보내고 호충을 푹신한 채주의 자리로 안내했다.
“어휴. 편하다. 며칠 놀다 갈까?”
“!”
“그런데 할 일이 너무 많아···.”
“공사다망하실 터인데, 이런 깊은 산중에 오래계시면 아니 될 말씀이시지요.”
“이제 수금할 시간이네?”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지만, 불만은 흔적도 없이 감춰야 했다.
‘불만을 표했다가는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럼 창고로 안내할깝쇼?”
“에이. 창고는 무슨···. 거긴 부피가 크고 들고 가기 힘든 것들만 가득일 텐데 뭐 하러 가나?”
지금까지 호충이 상대한 흑패주의 숫자는 손가락 발가락을 모두 더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이들이 어디에 자신의 자금을 감추는지도 뻔히 알고 있었다.
“어디보자···.”
우고의 거처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호충은 탁자 바닥에 깔린 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정석을 달리는구나.”
“······.”
호충의 시선이 바닥을 향한 순간부터 우고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저긴 안 되는데······.’
“더럽진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네.”
뒷간에 숨겨둔 놈들의 자금은 꺼내기도 역했지만, 꺼내고 나서도 냄새가 나기 일쑤였다.
“어디보자.”
촤악.
호충은 천을 휙 걷어냈고, 그 바람에 탁자도 뒤집어졌다.
쿠당탕.
우고의 눈은 부서진 탁자로 향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바닥에 깔린 천 아래에 드러난 작은 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너무 자비가 넘쳐서 다른 건 안 건드리고 이것만 챙겨가려고.”
“······.”
녹림의 사자가 와도 철저하게 감췄던 자금이었다.
“날 막아서고 싶거든 지금 막아라.”
“!”
막아서도 되는 것인가 싶을 때 다시 말이 들려왔다.
“내 물건에 피가 튀기는 건 싫어서 말이야.”
꿀꺽.
막아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 저 문을 열기 전에 피를 보겠다는 뜻이었다.
“생존 본능은 확실하네. 너 장수하겠다.”
“···별말씀을.”
호충은 힘으로 문을 잡아 뜯어버렸고, 내부가 훤히 드러난 금고를 살폈다.
금원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금자와 은자도 가득했다.
“이정도면 꽝은 아니네.”
그간 흑패주들이 숨겼던 물건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일 것이다. 들고 갈 수도 없을 만큼 많았던 녀석들의 비자금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룰루루~.”
“······.”
튼튼한 천을 깔고 그 위에 금원보와 금자부터 챙겨서 올려두었고, 은자도 빠짐없이 챙겨서 단단하게 보자기를 여몄다. 그리고 창을 부러뜨려 만든 단봉에 보자기를 걸고 어깨에 걸쳤다.
“어휴. 묵직하네.”
“······.”
‘내가 평생 산적질로 모은 자금이···.’
평생의 노력이 한 순간에 허공으로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릴 찰나에 원수의 입이 다시 열렸다.
“우고야.”
“···예. 대인.”
“가서 꼭 녹림에 일러야 한다. 알았지?”
“예?”
“내가 나중에 녹림왕을 꼭 만나볼 생각이거든. 그러니···. 네가 소식을 전해주었으면 해.”
“저는 대인의 별호도 모릅니다만···.”
별호뿐이겠는가. 얼굴만 알지 나머지는 깜깜이었다.
‘말만 해라. 네 신상을 모조리 녹림에 일러바칠 것이야!’
“마땅히 별호는 없고···.”
오래전 번권이라는 별호를 얻은 적도 있지만, 자장에서만 잠시 통용되던 별호였다.
그렇다고 하오문주의 이름을 꺼내 녹림과 척을 질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사천 성도에서 진호현을 찾아가.”
“···진호현이라는 분이 여럿이면 어떻게 합니까. 이름만 갖고는 찾기도 어렵고요.”
“진 맹주 몰라? 진가장의 진호현이 바로 무림맹주야.”
자신도 녹림에 속한 무림인의 하나였다. 어떻게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무림맹주의 이름을 몰랐겠는가.
“무림맹주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녹림이 맹주를 찾아가면 무림맹에서 가만있겠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
‘진짜 네가 누군지 말하란 말이다!’
“그 사람이 내 큰형이거든.”
“!!!!”
본래 녹림과 무림맹은 원수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만약 정말로 녹림 세력이 맹주를 노린다면 하오문을 통해 정보가 전해질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내가 집을 나와서 마땅히 거처가 없어서 말이지. 형한테 가있으면 내가 꼭 찾아갈게. 녹림왕에게 꼭 전해주기다. 알았지?”
우고는 급하게 태도를 바꿔 공손한 자세로 인사했다.
“······사, 살펴 가십시오.”
“오냐. 나중에 시간 나면 또 올 테니까 돈 많이 벌어 놔라. 사람은 되도록 죽이지 말고. 알았지?”
“······.”
우고는 진지하게 산채의 이사를 고민했다.
***
“잠깐···.”
호충이 떠나고 한참 뒤에야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 새끼가 맹주의 동생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맹주의 동생이라는 것은 본인의 주장일 뿐이었다. 아까는 너무 당당하게 맹주의 동생이라 주장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 어처구니없이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썩을 놈.”
‘녀석이 맹주의 동생이라는 건 거짓이 분명해.’
하지만 보여준 무위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도 욱신거리는 온몸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으윽. 그나저나···. 이사는 어디로 가지?”
녀석이 맹주의 동생이든 아니든 산채 이사는 필수였다.
***
평범한 이들은 산적을 만나는 일이 횡액일 것이고, 무림인에겐 자신의 영웅행에 한 줄을 보탤 사건이 될 것이다. 호충에겐 즐거운 유흥이었다.
“유후~. 횡재했네.”
묵직한 보자기를 단봉에 걸고 산을 오르는 호충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뜻하지 않게 산적을 만나 여비를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돈만 잔뜩 벌어가는 건 아닌가 몰라.”
중원 전역에 산적들이 출몰한다지만, 사실 자주 보기는 힘들었다. 지나는 길목마다 산적을 만난다면 표국은 어찌 운영하고 상단은 어떻게 물류를 이동하겠는가. 그 정도로 산적이 많다면 관부의 현령들부터 가만있지 않을 일이었다.
호충은 적막이 흐르는 깊은 산중까지 다시 비급을 읽으며 들어갔고, 마지막장을 덮은 다음 몸을 풀었다.
“이제 슬슬 속도를 내볼까?”
대도신투의 비급에 적혀있던 독특한 경공을 시험해보고 싶던 참이었다.
용천혈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퉁. 퉁.
호충의 신형이 제 자리에서 반장이나 위로 솟구쳤다.
대도신투의 경공은 적은 내공으로 상당한 반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호오. 이거라면 달포를 뛰어도 지치지 않겠어.”
이미 산적을 통해 확인하기도 했지만, 신투의 비급에 기록된 경공 효율은 일품이었다.
“비도술은 기존에 익힌 것이 더 좋으니 빼고, 신투는 은형술도 상당하단 말이지···.”
대도신투의 무공에서 좋은 부분만 골라내고 있었다.
“섞어볼까?”
그간 중원 전역을 돌아다닌 터라 처음 호충이 익혔던 경공은 많은 변화를 이룬 다음이었기에 서로 다른 경공을 재조합하는 것도 거리낌이 없었다.
슈욱. 탁.
단 한번 발을 굴렀는데, 호충의 신형은 한참 떨어진 나무 아래에 도착해 있었다. 일전의 경공과 다른 효율과 신위를 보였음에도 호충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조금 불안정 한 듯? 비관과 신맥이 부조화를 이루는데?”
무림인이 지켜보고 있었다면 경악할 일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쌓이고 쌓인 경험과 고수의 고뇌가 담긴 무공의 이치는 새로운 비급을 이제 막 익히기 시작한 이가 손댈 수 없는 수준이어야 했다. 최소 수 십년 간 익히고 연구해야 개선 가능성을 점칠 수 있을 정도였다.
“주화입마 들기 딱이네.”
실제로 호충의 다리 혈도 일부가 조금 부풀어 있었는데, 내공의 충돌이 빚어낸 결과였다. 괜히 주화입마를 거론한 것이 아니다.
파라락. 부르르.
하지만 호충의 혈도는 금방 충돌을 이겨내고 회복하고 있었다.
그저 양쪽 다리를 한 번씩 털어낸 것으로 끝이었다.
“이번엔 내기를 음곡으로 보내볼까?”
파앙!
“어휴. 이건 너무 과했다.”
아까와 같은 한걸음이었는데 전보다 두 배는 멀리 이동한 호충이다.
“이번엔 은백, 대도, 태백혈을 복합해서 활용해보자.”
호충은 한걸음 한걸음을 이동하며 계속해서 경공을 수정했고, 다음 산을 넘는 시점에선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쑤앙!
“몸에 부담이 너무 큰데?”
그 다음 산을 넘을 때는 오히려 느릿한 모습이었지만,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슈우욱.
“···이건 답답하네.”
그 다음 산을 넘을 때는 바람이 스쳐가는 듯 했다.
사악.
“오오. 이번 건 나쁘지 않아.”
.
.
.
하루가 지나고 노숙을 끝낸 호충이 다음 산을 넘을 때는 호충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
새로운 경공에 신투의 은형술을 더해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은 것이다.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노친네들은 내가 뭘 배우기만 하면 못 죽여서 안달이야. 에잉.”
어제 평소와 같이 심상대련을 통해 다시 사부들을 만난 것이다. 호충은 사부들을 통해 자신의 경공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쪽이 맞나? 이 산이 아닌가?”
잠시 멈춰 서서 지도를 다시 확인한 호충은 방향을 틀어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사악!
***
문주가 없는 서안 하오문 본단에 방주들이 모여들었다. 상석에 앉은 이는 없었다. 문주의 자리를 비우고 모두가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하오문에서 문주 호충 다음으로 평가받는 삼도상단의 상방주 송동석과 곧 상방을 이어받을 옥비연, 패방을 대표하는 사중환, 얼마 전 죽산에 갔다가 돌아온 흑림방주 왕호, 개방의 후개 말동, 그리고 중원 전역의 기루를 관리하느라 바빴던 루방의 황화진, 옥비연을 대신해 배방을 맡고 있는 장위까지 모든 방주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송동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하오문의 형제들을 소집한 것은 긴히 전할 얘기가 있기 때문이오.”
“···어르신. 다른 방주들은 그렇다 치는데, 여기 유 단주는 아직 이르지 않습니까?”
사중환이 송동석 뒤에 시립한 유도영을 보며 하는 말이었다.
“유 단주가 날 찾아와 물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모두 불러 모았소. 유 단주뿐 아니라 모든 방주가 알아야 하기 때문이오. 유 단주도 문주의 진실한 모습을 알고 있으니, 들어야 할 것이오. 앞으로 루방과 더불어 하오문의 정보단을 맡아야 할 인물이오.”
유도영은 하오문의 최고위급 인물들 앞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유도영입니다. 문주께서 저를 하오문에 인도하셔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모두가 유도영의 모습을 훑어본 다음 송동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가장 전대가주의 부고를 들어 알고 있을 것이오. 문주께서는 그 소식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으셨소. 그 이유부터 말씀드리리다.”
방주 중 일부는 알고 일부는 모르는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