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성의 서천량
***
“대인께서 군부와 함께 계시면 앞으로의 일이 수월하실 것입니다.”
“앞으로의 일보다는 당장 밖의 인부들이 걱정이로군. 우리야 마차를 타고 편히 가지만, 저들은 흙먼지를 먹으며 가야하지 않는가.”
마차 밖에서 인부들 틈에 섞여있는 호충을 걱정하는 진휘평이다.
“대인을 위한 노고는 오히려 기쁨일 것입니다.”
“잠시 나가서 확인을···.”
동시에 호충의 전음도 들려왔다.
[누군가는 밖에서 상황을 지켜봐야 합니다. 도착할 때까지 마차의 속도를 줄이지 않을 것이니, 안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하여튼 저 녀석은 걱정이 너무 많아.”
“호호. 그 걱정들로 인해 일문의 수장이 되셨음에도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답니다. 언제나 아랫것들을 살피시고, 문도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처럼 해결하신답니다.”
“나름 인망은 얻고 있는 모양이군.”
“······.”
그 인망이 얼마나 두터운지 문주를 황제로 세우고자 하는 문도까지 있었다.
“그럼 그간의 얘기나 들어볼 수 있겠나? 어찌 그리 짧은 시간에 문을 크게 부흥시킬 수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다네.”
“대인께서 궁금해 하시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지요. 하오문은 자장의 작은 흑패에서 시작했사옵니다.”
화진은 다른 이들을 고려해 문주가 진가장의 막내였다는 사실만을 제외하고 그간의 일들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뒷골목을 행패를 보다 못해 나선 하오문주의 일대기였다.
“처음 문주님을 뵌 날이었지요. 무뢰배의 강압에 큰 위기에 처해있던 저를 위해 나선 문주님은······.”
호충은 화진의 입에서 넘치는 정의감에 자비가 가득한 인물로 포장되었고 많은 문도들이 자발적으로 문주로 추대할 만큼 대단한 인망을 쌓았다고 했다.
곁에 듣고 있던 루방의 기녀들이 참지 못하고 덧붙이다가 입을 다물기도 했다.
“문주님이 얼마나 멋지신지 하오문 내에서도 인기가 정말 많으세···.”
“맞아요. 문주님께서 짝이 없으셨다면 누구라도···.”
“넓고 단단한 품에 한 번이라도 안겨 봤으면···.”
루방의 방주가 지켜보는 와중에 할 말은 아니었다. 고개 숙인 화진은 진휘평의 눈을 피해 살벌한 경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이것들이 못하는 말이 없어?’
“······.”
“······.”
“딸꾹!”
“허허. 하오문주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군.”
또한 당사자가 밖에서 듣고 있다는 점이 문제일 것이다.
“어휴. 내가 언제 그렇게 자비로웠다고···.”
오로지 주먹으로 모든 걸 해결해온 자신이다. 흑패를 접수하며 죽인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녀석들의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 수위를 결정하긴 했지만, 많은 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에효. 난 저것들이나 따돌려야겠어.”
호충은 마교의 무리가 멀리서 마차를 따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호충은 아버지가 전에 벗어두었던 옷가지를 챙기고 옆에 있던 루방 방도에게 일렀다.
“자은. 녀석들을 따돌리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울 것이다. 그대로 계속 가고 있으면 금방 다시 합류하지.”
“예. 방주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냐. 방주는 괜히 걱정만하니 그냥 둬.”
“······.”
“다 죽일 수 있는데, 따돌리기만 한다니까? 보고 안 해도 돼.”
“···저녁까지 오지 않으시면 보고 드리지요.”
“식사 전에 돌아오겠다.”
호충은 슬쩍 일행에서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곧 관도 옆으로 몸을 날렸다.
***
마승단의 조장급 마인 둘이 멀리서 말을 타고 마차를 쫓으며 대화했다.
“아무래도 수상해. 나만 수상하다고 생각해?”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국경의 장군들은 현 황제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 작은 일도 조심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부대가 주둔한 곳으로 기녀들을 부른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단주님이 계셨으면 분명 저들을 끝까지 미행해서 마지막 확인까지 하셨을 것입니다. 현명한 결정이셨습니다.”
“그걸 알면 마차를 제대로 뒤졌어야지!”
“이것도 제대로 못해서 일을 키우나?”
“···죄송합니다.”
“누굴 탓하겠어? 우리가 조금 늦은 것이지.”
“에잉.”
마차가 통과하고 나서 도착한 둘은 일단의 마차가 군부로 갔다는 말에 곧장 미행을 결정한 것이다.
한참 마차를 미행하던 마승단은 후미에서 전해진 정보에 전부 걸음을 멈춰야 했다.
“삼(三)조장님. 오(五)조장님. 누군가 사람을 들쳐 업고 가는 것을 본 단원이 있습니다! 업힌 이가 비단옷을 입은 걸로 봐서는···.”
“!!”
“어디야!!”
“저기 산서성 방향의 산을 오르는 것을 확실히 봤다고 합니다. 하지만 금방 너머로 사라졌기에···.”
“제길! 모두 멈춰!”
히이잉.
마승(馬乘)단은 모두 기마(騎馬)무사로 이루어진 마교의 무력단체였다. 향후 역천에서 중요한 일을 맡기기 위해 일찍부터 기마술을 익힌 무사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빠른 기동력이 발군이었다.
“나는 산 좌측으로 말을 달리지. 오(五)조장은 정면으로 가고, 일부는 우측으로 보내.”
삼(三)조장의 말에 오(五)조장은 방금 말을 전한 마승단원에게 명령했다.
“너는 당장 남쪽의 단주님께 가서 이 일을 알려라.”
“예!”
마승단이 탄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랴!”
.
.
.
“······.”
호충은 멀리서 질주해 달려오는 인마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야 움직여? 이 새끼들 너무 굼뜬 거 아냐?’
한참 전부터 지푸라기에 옷을 입히고 산기슭을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지금은 은형술을 펼치고 높은 나무에 올라 이곳으로 달려오는 마교의 무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 산은 저쪽인가?’
호충은 밑에 대충 던져둔 인형을 다시 들고 경공을 펼쳤다.
타앗!
호충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승단은 몇 개의 산을 더 올라도 자신들이 쫓는 상대의 엉덩이밖에 볼 수 없을 터였다.
***
호충은 약속한 대로 저녁이 되기 전 일행에 합류할 수 있었다.
“아직 얘기 안 했지?”
“오셨습니까. 더 늦으시면 보고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녀석들이 잘 쫓아와서 조금 더 다녀왔어.”
중간에 남쪽의 마교 무리까지 합류하는 바람에 신나서 유인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호충은 소오태산까지 갔고 절벽 근방에서 모습을 감춰버렸기에 녀석들은 지금 거기서 수색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후에 마차를 따르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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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노숙하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일행은 군부가 있는 국경선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위장에 위치한 거대한 성곽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차가 성곽 아래까지 가면 마교의 무리도 진휘평의 방문을 파악할 수 있었기에 내부와 따로 합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높은 성곽을 넘을 수 있는 고수가 다녀와야 했고, 합당한 인물은 하나밖에 없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서천량 대장군이 기거하는 위치는 기억하고 있지?”
“위장성의 심처가 아닌 병사들의 막사 근처라고 하셨지요.”
보통 군부의 대장군이면 화려한 전각에 머물러도 될 것이나, 서천량 대장군은 병사들과 같이 숙식하고 있다고 했다. 병사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서 대장군은 나라의 병사들을 지극히 아끼는 인물이다. 실수로라도 병사들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예.”
“또한 서 대장군은 나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그에게 무례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또한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라. 가서 이 서찰을 전해라.”
호충은 진휘평이 내미는 서찰을 받아 품에 넣고 읍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네 몸이 우선이다. 혹여 일이 틀어지거든 지금까지 한 얘기는 모두 무시하고 네 안위를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이야.”
이것이 진휘평의 반복된 말들이 잔소리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였다. 부정 가득한 아비의 말이 어찌 잔소리로 들릴 수 있겠는가.
“······.”
“나도 나이를 먹었나보다. 자꾸 걱정만 느는 구나.”
“아직 젊으십니다. 아버지는 천년만년 사실 겁니다.”
“······.”
진휘평도 아들의 마음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마.”
“예. 대장군이 다른 이들과 함께 있으면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애초에 늦는다 생각하시고 마음 편히 기다리십시오.”
“그래. 그래···.”
호충은 진휘평을 두고 돌아섰지만, 얼마 안가 다시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이 아비가 네게 마음의 짐까지 지우는구나.’
‘남은 영단이 몇 개나 되지?’
호충은 아버지 진휘평에게 영단이라도 가져다 먹여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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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충이 인사할 사람은 진휘평으로 끝이 아니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화진이 걸음을 함께 옮기며 호충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화진이는 미리 방도들에게 상황 설명하고 성곽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투입시킬 수 있도록 해줘.”
“곧 루방의 중요 간부들도 도착할 거예요. 이들이 있어야 왕야를 제대로 모실 수 있어요.”
“유 단주가 운영할 하오문의 정보단도 이곳으로 불러야 할 거야.”
“명심할게요.”
“그리고 유 단주 부를 때 영단도 하나 챙겨오라고 해줘. 남은 것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안 그래도 왕야를 뵐 것 같아서 어르신께 받아 왔답니다.”
“헐. 아예 챙겨왔어?”
“서찰로 지시하신 일들도 모두 루방에 하달했어요. 앞으로 왕야의 곁을 철통같이 지키고 누구도 모르게 할 것입니다.”
“하여튼 화진은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
“제가 누구의 연인인데요.”
화진을 바라보는 호충의 눈은 깊은 애정을 담고 있었다.
“여유가 조금만 더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호충은 화진을 잠시 품에 안아주고 떨어졌다.
“이곳은 제가 맡고 있을게요.”
“빨리 가서 일을 끝내야겠어. 다녀올게.”
헤어짐이 빠를수록 만남의 시간도 빨리 돌아오는 법이었다.
호충이 크게 한 걸음 내딛었고, 화진은 멈춰서 연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다시 한 걸음 멀어졌을 때 호충의 신형이 조금 흐릿해졌다.
“!”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내딛었을 때 더 이상 호충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눈은 물론이고 기감으로도 찾을 수 없었다.
‘또 성장하셨구나.’
자신의 연인에겐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기다릴게요.”
***
호충은 높은 성곽 바로 앞까지 달려왔음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훗차.”
뒷짐을 진 모습 그대로 발끝을 성곽의 벽돌에 걸치고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타앗! 타닥.
한번 발을 디딜 때마다 몇 장이나 솟구친 호충은 금방 성곽의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성곽 내부로 자유 낙하했다.
휘이잉.
성곽을 경계하던 병사들은 그저 바람이 스쳐지나갔나 하며 창을 들고 여전히 성곽 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저 쪽인가?’
호충의 시선에 군졸들의 막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 들어왔다. 무공을 익힌 무림인도 알아차리기 힘든 호충의 은형술이 병사들을 상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호충은 무인지경으로 막사를 오가며 서천량 대장군을 찾기 시작했다.
“······.”
문제는 서천량 대장군이 너무 소탈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군막도 병사들과 같은 걸 쓰는 거야?’
대장군 급의 장수라 조금 더 큰 막사를 쓸 것이라 생각했지만, 병사들의 막사 사이에서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하려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서천량을 찾던 호충은 군례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충!”
“대장군께서는 아직이신가?”
“예. 사흘째 막사에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알겠네. 가보게.”
“충.”
호충은 군례를 받은 군부의 장수를 따르기 시작했다.
“일이 일이니 만큼 심려가 크시겠지.”
“······.”
호충은 장수가 뱉은 말을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 대장군이 심려할만한 일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자도 역천에 관해서 아는 모양이군.’
호충은 장수를 유심히 지켜보며 계속 따랐고, 결국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
막사를 돌던 장수는 구석의 막사를 보며 깊은 눈을 감추지 않았고, 곧 가슴에 주먹을 대고 조용히 군례를 올린다음 다른 곳으로 멀어졌다.
‘찾았다!’
호충은 군막 근처로 가서야 서천량의 거처를 쉽게 찾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이 덕지덕지 기워진 막사는 다른 병사들의 막사보다 더 허름했기 때문이다.
‘자객은 확실히 피할 수 있겠네.’
내부 사정에 능통한 이가 아니고는 서천량의 거처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어디 들어가 보실까?’
호충은 막사의 천에 조용히 장을 날렸고, 곧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막사의 입구 천이 펄럭거렸다.
휘익.
호충은 그 사이에 막사 내부로 잠입했다.
막사 안은 어두웠지만, 호충은 내부를 훤히 보고 있었다. 대장군의 갑옷을 그대로 갖춰 입은 거대한 형체의 인형이 작은 탁상을 앞에 두고 고요히 좌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대장군의 무위는 일류 끝자락. 황실에 충성한 이가 아니면 무공도 내려주지 않음이던가?’
“······.”
호충은 대장군이 기침하길 기다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호충의 고민을 알았는지 서천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객인가?”
“!”
‘고작 저 정도 무위로 날 어떻게 감지했지?’
놀란 호충이 답하기 전에 거구의 몸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 검병에 손을 가져갔다.
“···답하라. 자객이더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