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70/232)

무신(武神)과 전신(戰神)

***

호충은 얼른 은형술을 풀면서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냄새.”

“아!”

오래 막사에 머물었을 것이니 다른 사람의 냄새에 크게 민감한 상태였을 것이다. 특히나 호충은 군부가 아닌 여인들이 많은 곳에서 머물다 왔고, 화진을 품에 안기까지 했으니 여인의 분내가 났을 것이다.

“···체향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대장군님.”

“예의 갖출 것 없다. 네가 자객이라면 여기서 죽음을 맞이할 뿐.”

“···간자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 잠입했습니다. 부디 저의 변을 들어주십시오. 대장군.”

“우선 네가 어찌 위장성에 잠입했는지 들어야겠다. 위장성 어디에 구멍이 있었더냐? 너 같은 놈이 들어올 때까지 대체 병졸들은 무얼 한 것이야!”

‘이 와중에 군이 경계에 실패한 것이 우선이란 말인가.’

“···저는 무림인입니다. 대장군께서 냄새로 저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바람이 통하지 않는 막사였기 때문이지요. 성곽 위의 병졸들이 경계에 실패한 것이 아니오니 부디 헤아려주소서.”

“자객인 네가 병졸들을 생각해주느냐?”

“진 대인으로부터 대장군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병사들을 아끼시지만, 엄하게 군법을 지키신다 하셨지요.”

“···그 분이 보내셨나?”

“대인의 서찰을 전하러 왔습니다.”

호충은 조심스럽게 품에서 서찰을 꺼내 탁자에 올리고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서천량은 자리에 앉아 서찰을 손에 들고 물었다.

“안에 뭐가 적혀 있는지 아는가?”

“대인께서 서찰을 봉하셨는데, 어찌 감히 살필 수 있겠습니까.”

“대인을 따르는 이들이 신신당부하였다. 이와 같은 서찰이 오거든 읽지 말고 태워버리라고 말이야. 교묘한 언변을 가진 간자가 숨어들 수 있다는 정보도 전해주었지.”

“······.”

마교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예측했다는 뜻이었다.

‘아버지가 서찰을 보낼 수 있음을 짐작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

만약 서천량이 이대로 서찰을 읽지 않고 자신을 적대하면 일이 크게 틀어지고 말 것이다.

“서찰은 읽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응? 대인의 서찰인데 말이냐?”

서찰을 읽을 생각이 없어 보였던 서천량이지만, 이젠 서찰의 내용이 조금 궁금해졌다.

“대장군께서 직접 대인께 들으셔도 되니 말입니다.”

“!”

“근방에 와계십니다.”

“···그런데 왜 대인을 따르는 이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지? 대인께서 오셨다면 그들이 전해주지 않았을 리 없다.”

“그들은 대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감시를 위해 곁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군이 아니었습니다.”

“!!”

“대인께서 과거 오랜 시간 은인자중 하셨던 것은 녀석들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기 때문이며, 며칠 전에서야 녀석들을 따돌리고 자유를 얻으셨습니다. 대인께서는 지금 대장군께 몸을 의탁하려 성곽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녀석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겨우 예까지 오셨지요.”

서천량 대장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당장 모시러 가겠···.”

바로 나갈 것 같았던 대장군의 가슴에 또다시 의심이 가득 피어올랐다.

“···교묘하군. 실로 교묘해. 그대의 당당한 언변에 내가 감쪽같이 속았어. 그들의 말대로야.”

“하아. 쉽게 풀리는 일이 없어 난감할 따름이옵니다.”

“역시 너는 자객이로구나. 그도 아니면 세외의 간자겠지.”

“우선 대장군께서 움직이시면 아니 된다는 것부터 말씀드리지요.”

“···날 밖으로 꾀어내려는 것이 아니었나?”

서천량은 호충의 속내를 간파하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대인을 감시하던 놈들은 지금 대인을 잃고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중입니다. 겨우 녀석들의 손에서 빼냈는데, 또 녀석들 손에 넘겨주시렵니까?”

“계속해보아라.”

“······.”

호충은 자신의 말이 아무리 이어져봐야 대장군의 귀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서천량 대장군이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대인께서 보내신 서찰을 읽으시지요. 저도 대인께서 대장군께 전할 말씀은 모르니 말입니다.”

“서찰에 독이라도 발라두었으면?”

‘의심도 이 정도면 병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심덕분에 지금까지 크고 작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참자. 참아···. 서천량은 전신(戰神)으로 추앙받는 나라의 대장군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무림인입니다. 그것도 중원에서 저와 비등한 상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고수지요. 이런 제가 대장군께 독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스스로 고수라고 칭하기엔 너무 젊지 않나? 그대는 내 아들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군.”

“······.”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네 뜻대로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스스릉.

서천량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내 호충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호충은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검첨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인께서 대장군께 예를 지키라 하셨는데 도무지 지킬 방도가 보이지 않아 답답합니다.”

“너는 이 검이 두렵지 않으냐?”

“백만 대군이 저를 둘러싸도 몸 하나 빼낼 능력은 됩니다. 하물며 대장군 홀로 저를 상대하고 계시는데 제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겠습니까.”

“···네 혓바닥이 얼마나 교묘한지 자꾸만 네 말이 진실로 들린단 말이지.”

“······.”

호충은 항복하듯 양손을 들었고, 비어있던 양손에 작은 비도가 한 자루씩 나타났다.

“!”

투둑.

하지만 손에 잡힌 비도를 놓아버리는 바람에 비도는 막사 바닥에 내던져졌다.

“?”

의문어린 서천량의 얼굴에 답을 하듯 호충은 또 비어있던 손에 또 다른 비도를 나타나게 했다.

“!”

‘비도가 대체 어디서 나오는···.’

비도는 다시 바닥으로 향했고, 그 때마다 호충의 손에 새로운 비도가 나타났다. 그렇게 여섯 번을 반복한 호충의 주변엔 열두 자루의 유엽비도들이 고이 놓여 있었다.

“···같잖은 술수로군.”

“작은 재주를 재미있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왜 비도를 들고 반항하지 않았지?”

“하하. 왜 제가 반항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지금 너는 내 검 앞에 있음을 잊었더냐? 당장이라도 네 목을 자를 수 있다.”

“제 비도 앞에도 대장군께서 계십니다만?”

“비도라니···.”

바닥에 놓였던 열두 자루의 비도는 어느새 둥실 떠서 서천량의 모든 방위를 겨누고 있었다.

“!!!”

서천량은 바닥에 놓였던 비도가 사라진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한 상태였다.

‘진정 무림의 고수였던가. 기공으로 비도를 움직일 정도의 경지라니···.’

“십이(十二) 대 일(一)로 제가 한참 앞서는 군요. 하지만 검의 크기가 차이가 나니 동률이라 치겠습니다.”

“허.”

스윽.

서천량이 대검을 아래로 내리자 호충은 품을 열어 날아드는 비도를 받았다.

슈슈슉.

비도는 제 집을 찾아가듯이 호충의 품에 착착 꽂히고 있었다.

‘저 비도가 내게 날아들었다면 절반 이상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비사는 처음 보는 군.”

“제발 대인의 서찰을 읽어주십시오. 대장군과 나눌 말이 많은데 도무지 진전이 없어 답답합니다.”

“···그대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음을 믿어도 되겠나?”

“사내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습니다.”

“허!”

“또한 대장군께서 제게 무례하셨던 일은 모두 잊겠습니다.”

“흥!”

서천량은 코웃음을 치며 서찰의 봉인을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부욱.

그리곤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서찰을 살피기 시작했다.

[월량. 이제 와서야 진실을 전할 수 있음에 무척이나 민망하다네.]

“!”

월량이라는 칭호는 과거 진휘평과 막역하던 시절에 칭하던 아호였다.

‘이 아호는 오직 왕야만이···.’

서찰을 대하는 서천량의 태도가 진중해졌다.

[그대에게만은 진실을 전하고 싶었지만,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네. 이제나마 사실을 전할 수 있음이 어찌나 다행인지···.]

이후 서찰의 내용은 서찰을 가져온 이가 전한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서찰엔 지금까지 진휘평을 감금한 단체의 명까지 선명히 적혀 있었다.

“···마교? 그 잡것들이 여태 설치고 있었단 말인가?”

“······.”

호충은 서천량이 서찰을 끝까지 보길 기다렸다. 서찰 마지막 부분에 적힌 것을 얼핏 봤기 때문이다.

[난리 중에 내자를 잃었다는 것은 그대에게 말했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네. 당시 그녀가 나의 아이를 회임하고 있었다는 것이네. 그리고 타지에서 아들을 낳아 길렀다네.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소중한 아들을 남겨주었네.]

‘왕야께 손이 있으셨단 말인가!’

[월량에게 서찰을 전하러 간 녀석이 바로 내 아들이라네. 어떤가? 그대라면 한 눈에 알아봤겠지? 나를 무척이나 닮지 않았는가.]

“!!”

서천량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리고 유심히 호충의 얼굴을 뜯어봤다. 젊은 시절의 진휘평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저렇게 닮았는데 왜 못 알아봤단 말인가!’

다시 보니 알아보지 못한 것이 기이할 정도였다. 그리고 호충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대장군. 진호충이라 합니다.”

“···그, 그럼.”

“아버지께서는 대장군을 무척이나 신뢰하십니다.”

“······.”

“그리고 무례는 모두 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마땅히 의심하고 경계할 일이었습니다.”

“···신 서천량이 황실의 손을 뵈옵니다.”

“우리는 이제야 대화가 가능해졌군요.”

“미리 말씀을 하셨다면···.”

“대장군께서 믿지 않으실 것 같아 입을 뗄 수 없었답니다. 또한 제가 지금까지 거짓을 입에 올린 적도 없지요.”

“······.”

서찰을 보기 전이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대장군. 부디 대인의 입성을 허락해주십시오.”

“허락이라니요. 제가 뫼시러 가겠습니다.”

“대장군께서 움직이시면 위장성의 모두가 알게 됩니다. 그저 성으로 마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마교의 간자를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대인의 수족으로 알고 녀석들을 군부에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군부에 처음보는 마차가 들어오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대장군. 대인께서 타고오시는 마차는 그냥 마차가 아니랍니다.”

“그럼···.”

.

.

.

그날 위장성 병졸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연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위장성의 병졸들은 저마다 그 소식을 전하며 소란을 이어갔다.

“우리 위장성에 기녀들이 온다는 소식 들었어?”

“뭣! 연회에 기녀들까지 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칼날 같은 성정의 대장군께서 허락하실 일이 아니잖아. 군기 풀어진다고 술도 함부로 못 먹게 하시는 분인데, 기녀라니···.”

“맞아. 누군가 그런 소리를 했으면 당장에 불호령부터 떨어졌을 걸?”

“···대장군께서 직접 휘하 장수들에게 하달하신 말씀이야. 바로 오늘 도착한다고 하던데?”

“!!”

“!!”

“!!”

“!!”

“어차피 우리야 기녀들의 꽁무니도 보지 못할 것이니, 성곽 입구에서 구경해야지~. 아휴. 야들야들한 기녀들을 대체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네. 오늘 보초가 내 차례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를 걸세. 허허허.”

평소 늦게까지 성곽을 감시하는 초병 당번은 기피대상 일 순위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이보게. 오늘 보초는 내가 대신 서주지.”

“전에 나와 보초를 바꿔주지 않았던가. 이번에 내가 그 보답으로 대신···.”

“나는 일전에 자네가 내게 빌린 돈을 탕감해주겠네!”

오늘 성곽 보초 당번이었던 병졸의 손은 마지막에 빚을 탕감해주겠다는 병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네 그 말이 농은 아니겠지? 연회가 열리면 술도 먹을 수 있을 텐데?”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상관없네. 그저 그녀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을 뿐이네.”

“좋아. 계약 성립!”

.

.

.

위장성에 진짜로 마차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오, 온다!”

“어디, 어디!”

“진짜다. 진짜 온다!”

성곽의 위에서 망을 봐야할 병졸들은 저마다 성곽 출입구 근방에 모여 구경하기 여념이 없었다. 망루에 올라 있던 서천량은 병졸들의 흐트러진 모습에 무척 심기가 나빠지고 있었다.

‘저것들이 그렇게 말을 해도···.’

병졸들만 탓할 것이 아니었다.

“대장군. 성문을 열고 해자를 건널 다리를 내리겠습니다.”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미쳤어?”

“······.”

“이 새끼 모가지를 당장 잘라버릴까?”

서천량이 혼잣말처럼 무시무시한 말을 뱉자 대장군 곁에 있던 부관이 조용히 말했다.

“대장군. 다 들립니다.”

“이 새끼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

“······.”

“기다려 이놈들아. 일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야.”

“충!”

“충!”

휘하의 장수들마저 기녀들을 본다는 기대감으로 가득해 있었다.

‘왕야 덕분에 위장성 군사들의 기강이 다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서천량은 곧 망루 아래까지 다가온 마차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대장군의 눈치를 보고 얼른 망루 앞으로 나선 장수 하나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대들은 위장성에 온 목적을 밝혀라!!”

“······.”

마부들은 마차를 돌아봤고, 곧 아리따운 기녀들이 밖으로 나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멋진 장군님~ 저희가 왔답니다~.”

“오라버니~ 문 열어주세요~”

“아잉. 밖은 너무 무섭다고요.”

기녀들의 애교에 병사들이 난리였다.

“문 안 열고 뭐하냐!”

“열어라! 열어!!”

병졸들이 당장이라도 들고일어날 것 같았다.

“······.”

서천량은 울컥울컥 올라오는 화를 애써 눌러야 했다.

‘차라리 그냥 열어줄걸 그랬군.’

“······다리를 내리고 성문을 열어라.”

“추우웅!!!”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목소리로 군례를 올린 장수가 아래를 향해 다시 소리쳤다.

“다리를 내리고 성문을 열라하셨다!!!”

““우아아아아!!!””

쿵쿵쿵쿵.

병사들이 창으로 바닥을 치며 한껏 기세를 드높였다.

“훗.”

‘그래도 군의 사기 진작은 확실하겠군.’

곧 다리가 해자를 가로지르며 내려왔고, 반장 두께의 두꺼운 성문도 활짝 열렸다.

끼이이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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