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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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인이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가가께 하오문에 관해서 듣지 못하셨습니까?”
“하오문?”
호충이 무림인이라는 것만 확인했지 자세한 일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대화가 길어지겠습니다. 아버님. 술을 내올까요?”
“그게 좋겠어. 이참에 아들까지 불러들여야겠군.”
“제가 모셔옵지요.”
화진이 나가서 호충과 함께 다시 성주전으로 들었고, 호충은 소반에 술과 잔을 받쳐 들고 있었다.
“주문하신 명주가 왔습니다.”
“마침 술이 필요한 참이었다.”
“제가 호사를 누립니다.”
왕야의 아들이 술을 나르고 있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간 전장에서 무수한 공을 세우셨음에도 아무런 상급도 받지 못하셨지요. 오늘은 황상을 대신해 아버지께서 술을 내리시는 겁니다.”
“······.”
현 황실에서 아무런 상급을 내리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무수한 전공을 세운 것도 사실이었다.
진휘평은 잔에 술을 따라 서천량에게 건넸다.
“나라를 지키느라 무수하게 피를 흘린 군사들의 노고를 내 모르지 않네. 서천량 대장군. 진정 수고하였네. 그대 덕분에 나라의 무고한 백성들은 전쟁의 화마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네.”
담백한 치하였지만, 서천량이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이기도 했다.
“······.”
서천량은 진휘평이 내미는 술을 단숨에 받아 마시고 입을 열었다.
“···신 서천량. 명을 바쳐 왕야의 대업을 완수할 것입니다.”
서천량이 대계에 발을 담그는 순간이었다.
“대장군의 목숨은 결코 바라지 않네. 그대가 없으면 나라는 누가 지키겠는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없어도 어떻게든 유지될 나라지만, 북방을 지키는 서천량이 없어진다면 당장 세외에서 대군이 쳐들어올 것이다. 서천량은 자신의 이름만으로 나라를 지키는 전신(戰神)이었다.
“혹여 중간에 일이 틀어져도 대장군만큼은 살려내고 말 것이야.”
“···왕야.”
“월량. 긴 말할 것 없네. 그리 알고 있게.”
“······.”
“그리고 호충아. 대장군께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야 할 것 같더구나.”
“예.”
호충은 군부에서 사용하는 거대한 지도가 벽면에 걸려있음을 보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재 제가 세운 하오문은 이곳 하북을 포함해 중원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특히 황궁이 자리한 강소성에 신경을 많이 썼지요.”
“!!”
‘왕야의 아드님께서 하오문을 세워? 그리고 남경에도 힘을 쓴다고?’
“마교는 이곳 산서성에 자리하고 있으나, 지금은 대계를 진행하려 흩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대업의 중추가 되시는 아버지를 잃고 말았으니, 다른 방도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일은 우선 뒤로 미뤄두고 우선 저희가 진행할 일을 말씀드리지요.”
“하오문의 문도는 몇이나 됩니까?”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터라 확실치 않습니다만, 대략···.”
호충은 때마다 갱신되는 하오문의 문도수를 가늠하며 말했다.
“십이만에서 십오만 사이가 될 것입니다.”
“!”
위장성에 머무르는 군사는 물론이고 주변 성곽의 병사들을 더한 것보다 많은 숫자였다.
“하지만 숫자만으론 의미가 없지요. 중요한 것은 대계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입니다. 현재 하오문의 중추는 섬서성 서안에서 마교의 공격을 감당하고 있을 것이고···.”
“이미 마교와 충돌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예. 녀석들과는 애초부터 악연이지요. 아버지를 이십년 가까이 감금한 녀석들에게 이번에야 말로 멸망이 무엇인지 알려줄 것입니다. 어쨌든···.”
호충은 지도를 짚어가며 하오문의 규모와 구조를 설명하고 앞으로 대계를 진행하며 수행할 일들을 하나씩 나열했다.
“하오문 휘하 루방은 앞으로 남경과 이곳 하북의 연락을 맡을 것이고, 정보를 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국내의 모든 정보는 루방을 통해 전달 받으시면 될 것입니다.”
“기루 연합 루방이라···.”
“소첩이 루방을 맡고 있답니다.”
“아···.”
“그리고 대계의 실행이 오기까지 패방과 개방을 통해 민심이반(民心離反)을 주도할 것입니다.”
“나라 안을 일부러 어지럽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지금까지 양민들이 잘 모르고 있었다 뿐이지, 황궁과 관리들의 전횡은 극에 달해 있습니다. 하오문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양민들에게 전달할 뿐입니다.”
“하지만 고작 민심으로 명분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
나라의 지도자를 투표로 뽑는다면 모를까, 민심이 아무리 사납게 변해도 황궁은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나라의 지도층이 가진 생각자체가 현대와는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여기에 몇 가지를 추가하려 합니다.”
호충은 대계의 실행일이 다가오면 남경 근방에서 독특한 일을 벌일 생각이었다.
“먼저 남경의 저잣거리에 거대한 비석 하나가 홀연히 솟아오를 것입니다.”
“?”
“비석에는 현 황제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이고, 나라를 어지럽히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겠지요. 또한 이 비석은 예언비라고 불릴 것입니다. 비석 뒷면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적어둘 것이니까요.”
“!!”
“이후 남경의 밤하늘에 불비가 내릴 것입니다. 황제가 천벌을 받기 전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비석에 적어둘 것이니, 비석을 본 남경의 양민들은 예언비를 믿기 시작할 것입니다. 황제의 서거가 다가왔다고 말입니다.”
“허!”
“황궁 근방의 나뭇잎에 벌레들이 갉아먹은 자국으로 글을 남길 것입니다. 폐제(廢帝)라고 말입니다.”
폐(廢)위 당한 황제(皇帝)라는 뜻이었는데, 현 황제의 폐위를 의미했다. 또한 황제가 되어야 했던 아버지의 복귀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었다.
“민심이 요동을 치겠군.”
“민심으로 끝이 아니지요. 황제파의 신하들도 하늘이 황제를 바꾸고자 한다고 착각하겠지요.”
호충은 서천량 대장군이 맡을 일로 넘어갔다.
“대장군께서는 북방을 지키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세외의 침략을 방비할 수 있습니다.”
“···제가 남경으로 가지 않으면 대계는 어떻게 실행에 옮길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장수들 대부분은 왕야께서 실종되신 이후에 무관이 된 이들입니다.”
역천에 가담하는 일이다. 얼굴도 알지 못하던 황제의 동생을 위해 누가 나설 수 있겠는가.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무관들은 진휘평을 따르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오셔야지요. 그만큼 보안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황제파와 세외의 누구도 대장군께서 위장성을 비우셨다는 사실을 몰라야 합니다. 대장군께서는 최후의 최후까지 이곳 위장성에서 자리를 지키셔야 하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남경으로 군을 이끄셔야 합니다. 일부는 산서로 보내 무림맹과 함께 마교를 멸하셔야 하지요. 양동작전입니다.”
“······.”
나라를 지키는 병사들을 내란에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서천량이었다.
“···나라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희생의 최소화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남경과 외곽을 지키는 수도 장군들을 포섭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호충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시도는 해봐야 합니다. 녀석들이 황제파에 속해 있더라도 결국 이 나라의 군사가 아닙니까.”
호충은 이들이 내키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들이 대장군께 설득당해 대계에 가담한다면 그것이 더 문제입니다.”
“······.”
호충이 황제 군의 회유를 원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본래의 책무를 다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황제의 군은 오직 황제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법. 대장군께서 아버지를 따르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쌓아온 인연이 있으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함부로 마음을 돌려먹어선 안 됩니다. 당장이야 우리에게 좋겠지만, 황제가 군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나중에도 얼마든지 마음을 돌려 위험한 세력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군끼리 피를 보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 되겠습니다.”
“최소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호충은 화진을 돌아봤다. 이미 마차 안에서 나눈 대화 때문이다.
“루방주. 방안은?”
“남경에서 수도방위군의 지휘관들을 확보할 것입니다. 이들은 대계가 실행되는 날 남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
“방위군의 장군급 지휘관들까지는 무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군의 명령체계를 전달할 중간 간부들이 대거 이탈하면 수도방위군은 오합지졸이 될 것입니다. 황제파에서 발탁한 무관들과 문관들이 무능력하다는 것도 대계에 도움이 되겠지요.”
“대계의 성공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서천량은 역천이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보기 시작했다.
“대계는 시시각각 변화할 것입니다. 가장 경계해야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호충은 지도에서 산서성 신강을 가리켰다.
탁!
“마교는 이미 역천의 말에 올라탔습니다. 아버지가 없다고 해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왕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마교가 어찌 역천을 꾸밀 수 있습니까?”
“······.”
호충은 허락을 구하려 아버지를 돌아봤고, 진휘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배다른 동생이 있기 때문이지요.”
“!”
놀란 서천량이 얼른 진휘평을 돌아봤다.
“마교에서 초창기부터 나를 억압하진 않았네. 부인를 잃고 상심한 내게 여인을 붙여주기까지 했지. 그녀를 통해 아들 하나를 더 얻었네.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내가 낳은 아이를 어쩔 수 있겠는가.”
“···허.”
“마교 놈들은 갓 낳은 아이를 내게서 빼앗아 갔네. 아이를 낳은 그녀도 이후에 만난 적이 없다네.”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왕야.”
“이미 지난 일이지. 이렇게 장자를 만났으니 그걸로 됐네.”
“···하지만 마교에서 원하는 대로 되진 않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왕야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호충은 서천량의 그릇된 판단을 정정했다.
“대장군. 마교는 누구도 믿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황실의 핏줄이라 믿지 않으면 어찌 마교가 그 아이를 대계의 중심에 세울 수 있겠습니까. 과도한 염려이시옵니다.”
“대장군께서는 남경에 가신지 오래되어 혼인을 앞둔 태자와 마주하신 적이 없으실 것입니다.”
“갑자기 태자전하가 왜···.”
“태자는 저와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이는 아버지와도 닮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미 제 동생은 황제의 아들과 바꿔치기 되어 태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또한 마교의 짓이지요.”
“!!!”
“마교는 제 동생을 통해 얼마든지 대계를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하물며 황제의 적장자인 태자로 위장하고 있으니, 얼마나 더 쉽겠습니까. 다만 국정을 운영하기엔 이르기에 수렴청정의 가능성이 남은 것이 문제겠지요.”
“······.”
서천량은 자신이 세외의 적들에만 신경 쓰느라 나라 내부의 일에 너무 무관심했음을 깨달았다.
‘마교가 황궁에까지 손을 뻗고 있는 동안 나라의 대장군이라는 놈이 아무것도 모르고···.’
또한 그간 지극한 심적 고통에 시달렸을 왕야를 걱정했다.
친 형제에게 살해위협을 받아 도피해야 했고, 그 와중에 회임한 부인을 잃었으며, 마교의 손에 둘째 아들을 인질로 붙잡혀 십수 년간 감금 생활을 해온 진휘평이었다. 아들 하나를 되찾았지만, 다른 아들은 마교의 수작에 태자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마교의 손아귀에 있다 하니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
‘나라면 광인이 되었어도 모를 일···.’
“왕야···. 왕야께서 얼마나 깊은 아픔을 겪으셨을지 저는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이미 지난 일일세. 하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살 수는 없겠지. 둘째 녀석의 일은 내가 역천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네.”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먼저 대장군께서는 마교의 연락책에게 서찰을 전하셔야 합니다. 대계에 동참하기 전 승장에서 머무르고 계신 아버지를 뵙고자 한다고 말입니다. 아버지를 직접 대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서찰을 작성하시면 녀석들이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이후의 일이 어찌 되는 겁니까?”
“아버지께서 여기 계시니 녀석들은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고, 대장군께서는 수일 내로 대계 동참에 거절을 표명하시면 됩니다. 다만, 이번 일을 함구하고 지켜볼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야 하겠지요.”
“위장성에 남은 마교도 녀석은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죽여 없애는 것은 위험이 큽니다. 앞으로 대장군과 함께하실 것인데, 녀석들의 감시가 이곳으로 향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대계에 관여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나가라 하면 됩니다.”
“그도 그렇겠습니다. 마교도를 함부로 죽이면 의심만 더해지겠지요.”
“앞으로 작은 일들은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대장군.”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신 서천량을 우마(牛馬)처럼 부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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