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
***
이후의 일은 계획과 한 치의 다름도 없이 진행되었다.
서천량 대장군이 전한 서찰을 들고 위장성을 빠져나갔던 마교도는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고, 위장성에서 호충이 색출한 마교도와 함께 쫓겨나야 했다.
또한 루방주 화진이 지시한대로 루방의 지휘부가 승장으로 집결, 위장성으로 이동했다.
“멈춰라!”
잔뜩 독이 오른 마승단은 위장성으로 간다는 마차의 검문에 열을 올렸지만, 이번엔 진짜 연회를 위한 기녀들이 마차에 타고 있었기에 의심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너무하셔요. 무사님들. 연회를 위해 준비한 옷들을 저리 만드시다니요.”
마차의 짐칸에 들어있던 옷가지까지 모두 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흠흠···.”
“언니! 내 속곳이 사라졌어!”
“나도 없어!”
기녀들을 말을 들은 여인이 마교의 무인을 노려봤다.
“······.”
“그,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위장성에 가서 여기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말씀드릴 테니 그리 아셔요.”
마승단의 단원이 난감해 했지만, 마승단의 조장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할 뿐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고작 기녀들을 검문했다고 군사들이 움직일 것 같으냐?”
“···알겠습니다. 무사님들.”
하지만 이 일은 마승단을 적대할 빌미가 되었고 서천량은 변방의 군사들을 보내어 마승단을 승장에서 쫓아내 버렸다. 군사들은 그 외적이 침입했을 때보다 더욱 불같이 화를 내며 마승단을 쫓았다는 전언이다.
“다 잡아 죽여!”
“감히 누굴 검문해?”
가끔 이상한 외침도 들려왔다.
“그녀의 속곳을 내놔라!”
.
.
.
그 와중에 위장성 내의 군사들은 연이어 열린 연회에 함박웃음이었다.
기녀들이 아름다운 곡조에 맞춰 나풀나풀 춤을 추고 있었다.
“우아.”
“저 자태 좀 봐.”
한 무희의 옷자락이 어깨 아래로 잠시 흘러내리자 모두의 눈이 그리로 향했다.
“저, 저!”
뽀얀 어깨와 봉긋한 가슴이 잠시 드러난 것이다.
푸슛. 푸슛.
몇몇 병사들의 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어머나!”
실수인 듯 보이지만, 실수가 아닌 고의였다.
흘러내린 옷을 아주 천천히 추스르는 무희의 눈은 자신을 보는 병사들을 살피며 생긋 웃고 있었다. 다른 무희들도 자신이 주목 받으려 은근히 치마를 들어 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스르륵. 스륵. 팔랑.
아주 잠시에 불과했지만, 매의 눈을 가진 병사들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소, 속곳을 안 입었···.”
“!!”
“!!”
“!!”
푸슛. 푸슛.
여기저기서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연회에 참석한 병사들에겐 기름진 음식이 주어졌고, 싸구려 백주에 불과했지만 술도 마실 수 있었다. 매일 같이 벌어지는 연회는 군사들까지 돌아가며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변방의 군사들에게 지극한 기쁨을 선사한 기녀들을 감히(?) 검문했으니, 이들의 화를 마승단이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
서천량은 창을 열어 연회가 벌어지는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
군기가 너무 풀어진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에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난잡하기 그지없는 춤사위가 병졸의 마음을 온통 훔쳐가고 있었다.
호충은 대장군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이렇다 할 상급을 받지 못한 것은 이곳 장수들과 대장군만이 아닙니다.”
대장군이 전공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으니 병졸들은 오죽했겠는가. 황제파의 견제가 극심해 보급까지 항상 간당간당했다. 병졸들은 빠듯한 보급으로 인해 근방에서 사냥을 통해 군량을 충당할 정도였다.
“대장군께서는 매일 열리는 연회를 보고 계시지만, 병졸들 중에는 아직 연회를 한 번도 못 본이들이 있습니다.”
“······.”
“또한 군사들이 저리 좋아하니, 기녀들이 상주할 핑계가 될 수 있지요.”
“그건 그렇다 치고···. 군사들이 먹는 술과 음식 값만으로 상당하겠습니다. 감당이 되십니까?”
서천량 대장군이 전략에 능했지만, 경제적인 부분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급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군에 날마다 술과 음식을 나르니 군자금을 걱정한 것이다.
“얼마나 된다고 그러십니까. 이곳 군사들을 몇 년은 먹여 살릴 만큼 벌어놨습니다.”
“···허허.”
하오문이 경매로 끌어 모은 자금만 수백만 냥에 이른다. 호충은 말이 나온 김에 품에 있던 쌈짓돈을 꺼냈다.
“루방주.”
“예. 문주님.”
“수고하는 무희들에게 알아서 나눠줘.”
지난번 산채에서 챙겨온 자금의 나머지 절반이 화진의 손위로 올라갔다.
쩔렁.
주머니가 벌어지며 그 안에 금원보들이 빛을 발했다.
‘저게 다 얼마야?’
서천량은 언제나 돈 한 푼이 아쉬웠기에 주머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루방에서도 충분히 지급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문주께서 각별히 챙겨주셨으니, 상급으로 내리겠습니다.”
“흠흠. 군량에도 일부 충당하면 좋으련만···.”
“훗.”
호충은 화진에게 하나 더 지시했다.
“루방주. 위장성에 군량을 보급할 수 있겠어?”
“십만 석이면 될까요?”
“!”
십만 석이면 위장성이 보급 없이도 육 개월을 버틸 수 있었다.
“십만 석을 누구 코에 발라? 넉넉하게 오십만 석을 보급하기로 하지.”
“예. 그리하겠습니다.”
오십만 석으로 끝이겠는가. 호충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서천량에게 물었다.
“대장군. 보아하니 병졸들의 무장 상태가 크게 빈약해보였습니다. 창칼은 필요치 않으십니까?”
“질 좋은 무구가 있으면 좋기야 하지만···.”
“루방주. 이것도 부탁해.”
“···장인들이 바빠지겠네요. 주문을 넣어두고 완성되는 대로 위장성에 보내겠습니다. 군막과 갑옷도 추가로 제작토록하지요. 군마도 확보해 보겠습니다.”
‘대체 하오문의 역량이 어디까지 미친단 말인가.’
호충은 서천량이 궁금할 것을 알았는지 하오문에 대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오문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전문가들입니다. 중원 각 지역에서 홀대받던 대장장이들은 지금 하오문에서 명장 대접을 받으며 창칼을 만들어내고 있지요. 이들이 만든 무구는 지금까지 군이 보급 받은 무구와 차원을 달리할 것입니다.”
“···착실히 준비하셨습니다. 일찍부터 대계를 준비하시다니···.”
서천량은 하오문이 대계를 위해 준비되었다 여기고 있었다.
‘하오문은 하오문일 뿐인데···.’
어쩌다보니 아버지의 대계와 아귀가 맞아떨어진 것이지, 애초에 대계를 위해 하오문을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호충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거사 날짜를 정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대장군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빠르게 남경을 쳐야할까요?”
“대계는 급하게 진행할 일이 아닙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완벽을 기해야 합니다.”
“천려일실(千慮一失). 완벽을 기하지 않으면 대계가 산으로 가겠지요.”
“당장은 마교의 시선을 돌렸다지만, 마교 놈들의 일을 무위로 돌려야 우리의 대계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왕야는 제게 맡겨주시고, 마교를 감시해주십시오.”
“···돌고 돌아 결국 마교로군요.”
“대계가 겹치면 나라 안의 상황을 걷잡을 수 없습니다. 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혼란 속에서는 아무리 기상천외한 전략이라도 통하지 않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우선 마교의 상황을 파악하고 녀석들의 대계를 망치는 것을 선결 과제로 삼겠습니다. 마침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지요.”
어차피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비급과 영약이 있었다. 이를 활용할 중원 무림 방파에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오문과 중원 무림의 합동작전으로 마교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대계에 비수를 날려야 했다.
“루방주.”
“예. 문주님.”
“아무래도 나는 서안에 돌아가 봐야겠어. 영감이 방주들에게 알리긴 했다지만, 세세한 명령은 내리지 못했을 거야.”
“······.”
아쉬움으로 가득한 화진의 얼굴을 본 호충이 덧붙였다.
“빨리 오가면 이레 이내로 돌아올 거야.”
“알겠습니다.”
호충의 신위를 아는 화진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답했지만, 서천량은 이레밖에 걸리지 않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여기서 서안까지 가는데 이레라는 말씀입니까? 아니지. 그것도 말이 안 되는데···.”
“아닙니다. 위장성에서 서안에 들렀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데 이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말을 바꿔가며 달려도 이레 안에 서안과 승장을 왕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직선거리로 따져도 사 천리에 이르는 길이었다.
“서안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나흘 걸렸습니다.”
“!”
“중간에 길을 잘못 들지 않았으면 사흘이면 충분했지요.”
“허!”
“아버지께 문안 올리고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
마치 옆 동네라도 다녀오는 듯이 가벼운 말투였다.
***
진휘평은 호충이 밖으로 나간다고 하자 벌써부터 아쉬워했다.
“···또 헤어져야 한단 말이냐.”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하오문에 지시할 일이 많습니다.”
“보아하니 네 명을 듣는 이들도 많이 도착한 것 같던데, 명령은 이들을 통해서 내려도 되지 않겠느냐.”
“너무 오래 걸립니다. 전서구로 보내면 탈취당할 염려도 있고요.”
“네가 간다고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빨라집니다.”
서찰을 통해 명령을 내리면 시간이 지체된다.
“서찰이 서안까지 갔다가 돌아오는데 달포는 걸립니다. 제가 가야합니다.”
“네가 가면?”
“칠 주야면 됩니다.”
“···칠 주야? 그것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아버지께서 아직 아들의 무위를 잘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준 단약을 먹기는 했지만, 무공은 여전히 모르겠구나.”
화진이 준 영단을 먹기는 했지만, 무공을 익히지 못했기에 그저 몸이 건강해진 것으로 전부였다.
“소일 삼아서 루방주에게 무공을 배워보십시오.”
“그렇게 하마. 그리고 칠 주야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래도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
“······.”
아들과 오래 떨어지고 싶지 않은 아비의 마음이었다.
‘빨리 돌아와야 할 이유만 느는군.’
“···루방주에게 기본 심법을 익히고 계시면 아버지께 어울릴 무공서를 찾아오겠습니다.”
“아들이 무공에 재능이 있으니 내게도 있을지 모르지. 그래. 좋은 무공서를 찾아오너라.”
“······.”
호충은 자신이 무공을 익히는데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좋은 무공서를 만났고, 스승들을 잘 만나···.
‘잘 만나기는 개뿔. 매일 제자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데···.’
어쨌든, 자신의 무위는 과거의 기억과 기연이 만나 이루어진 결과였지만, 무공서 하나 가져다주는 것이 어렵겠는가. 아버지에게 잘 어울릴 무공서를 찾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예. 아버지. 아버지께 잘 어울릴 멋진 무공서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뵙고 싶구나.”
“···이번엔 함께 돌아오지요.”
“그래. 부탁하마.”
호충은 간단하게 행랑을 꾸려 위장성을 나섰고, 거대한 성문 앞에서 병사들과 마주쳤다. 몰래 성을 나갈 수도 있었지만, 미리 얼굴을 익혀두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위장성의 군졸들은 기녀들과 함께 왔던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너는 기녀들과 함께 왔었지? 어딜 나가려고 성문을 열어달라고 하느냐?”
다만 호충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기에 반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루주께서 시키신 심부름이 있어서 나갑니다. 앞으로 기녀들이 더 올 것입니다.”
“오옷! 더 온다고?”
“매일 같은 무희들만 보시면 지겹지 않으시겠습니까. 루주께서 기예가 뛰어난 기녀들을 더 데려오라 하십니다.”
“···네 얼굴을 꼭 기억하고 있으마.”
“감사합니다. 오는 길에 간식이라도 챙겨옵지요.”
“허허허.”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문을 나선 호충은 위장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위치를 가늠하고 속도를 올렸다.
파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