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와 방주
***
호충이 위장성을 나설 즈음에 서안의 하오문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타닥.
사중환은 급한 걸음으로 송 영감을 찾았다.
“어르신. 마교 놈들이 서안 동서쪽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서안 곳곳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감시하는 하오문이다. 사중환은 이렇게 서안을 감시하며 출몰하는 마교의 인물들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송 영감에게 전하고 있었다.
“···바로 제갈가에 알리겠네. 사 방주.”
송 영감은 하오문을 통해 파악한 마교의 정보를 제갈 세가를 통해 무림맹에 전했다.
“무림맹이 우리를 대신해 녀석들을 잡아둘 것이네.”
이적차적(以敵借敵).
적을 빌려 적을 약화시키는 전법이었다. 무림맹은 마교를 적대하고 있었고, 마교의 정보에 목말라 있었다. 특히 맹주에 오른 진호현은 맹주의 자리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나이는 어리고 가진 무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교가 중원 무림에 등장했으니,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하오문은 뒤에서 은밀하게 지원하겠습니다.”
“무림맹이 홀로 마교들을 상대하면 전멸을 면치 못하니 어쩔 수 없지. 다만, 우리 문도들이 상하지 않도록 제때 뒤로 빠져야 할 것이야.”
“예. 어르신. 흑림방에 전하지요.”
여전히 마교와의 충돌에 가장 앞서는 이들은 방주 왕호를 비롯한 흑림방의 방도들이었다.
“근래에 흑림방을 지원하는 이들이 많다지?”
흑림방은 문주의 명에 따라 흑림방의 규모를 키우고 있었고, 하오문을 구성하는 여러 방에서 흑림방도를 모집하고 있었다. 흑림방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수련관을 수료해야 했고, 일정 이상의 무공을 갖추고 있어야 했기에 기존 방도들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규율이 엄격해서 모집이 어려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패방에서도 상당한 인원이 지원했습니다.”
“옥 방주에게 들어보니 상방에서도 상당한 호위무사들이 빠져나갔다고 하더군. 덕분에 고수급 무사들이 부족하다고 난리야.”
“루방의 여 고수들 중에도 흑림방으로 지원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니, 상방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덕분에 왕 방주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을 테지요.”
흑림방이 무림 방파를 표방하는 하오문의 대표 방파로 인식되는 탓이었다. 상승 무공을 익히면 쓰고 싶기 마련인데, 하오문 내에서는 철저히 감춰야만 했다. 하지만, 흑림방은 자신의 무공을 온전히 드러내며 활동할 수 있었기에 혈기를 참지 못한 이들이 흑림방 지원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중환은 패방이 흑림방에 밀리는 것 같아 조금 불만이었다.
“그래도 패방이 하오문의 중추라는 점을 기억하게. 문주께서도 패방이 하오문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야.”
“···예. 알고 있습니다.”
“······.”
송 영감이 패방을 추켜세워도 사중환의 표정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근래 왕 방주와 대면하지 않았는가?”
“···대부분 흑림방 단주를 통해 지시하고 있습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자신을 무시할 왕호를 보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예전의 왕호가 아니거늘···.’
송 영감은 일전의 호충의 말에 따라 왕호를 만나보고 전과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태도는 진중했고, 생각은 깊어졌으며, 자신을 낮추는데 거리낌도 없었다.
‘이러다가 하오문 내부에 갈등이 생기겠어.’
중간에 중재를 맡은 사람은 하오문에 자신밖에 없었다.
“왕 방주를 불러오게. 사 방주도 함께 만나기로 하지.”
“예. 어르신.”
.
.
.
왕호는 송 영감이 자신을 불렀다는 말에 얼른 하오문 본단으로 돌아왔다.
“어르신. 부르셨습니까.”
“······.”
송 영감은 인사를 받지 않았고, 그제야 왕호가 다시 인사했다.
“흑림방의 왕호가 패방주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사중환이 인사를 받자 송 영감이 입을 열었다.
“그게 옳습니다. 왕 방주. 나는 그저 하오문의 늙은이에 불과합니다. 문주님이 안 계신 하오문은 패방주가 이끌어 갑니다.”
‘저 녀석이 이걸 인정할까?’
사중환은 왕호가 인사를 먼저 건네긴 했지만, 이 부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패방의 사 방주님을 알아 뵙지 못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왕호는 자신이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이런 말을 듣나 싶어 사중환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
‘왕호가 본래 이런 성격은 아닌데···.’
“사 방주.”
“예. 어르신.”
“우리 하오문의 방은 저마다 문주님 아래 동일한 선상에 있을 것이오.”
“예.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패방이 하오문의 정체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흑림방은 모든 방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성격의 무력단체로 생각해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왕 방주.”
“예. 어르신.”
“근래 하오문에서 흑림방의 힘이 날로 커지고 있지만, 다른 방을 얕잡아보지 말아주시오. 방금 말했듯이 흑림방이 가진 큰 힘은 다른 방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오.”
왕호는 패방주까지 불러 이런 말을 하는 송 영감의 의중을 깨닫고 말했다.
“패방이 하오문의 중추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 방주님이 아니면 누가 하오문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문주님께서 남기신 말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리를 비우신 동안 사 방주님의 명령을 들으라 하셨지요.”
“······.”
송 영감은 사중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님께서는 사 방주에게도 비슷한 말씀을 남기셨을 것이오.”
“···예. 그러셨지요.”
하오문의 모든 대소사를 자신에게 맡기지 않았던가.
“하오문에 문주님의 말씀을 거역할 방주가 누가 있겠소. 여기 왕호도 철없던 예전과 다르다오.”
“···예. 제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
왕호는 철이 없었다는 말에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어르신. 제가 언제 철이 없었다고 그러십니까.”
“왕 방주의 무공은 높아졌지만, 기억력은 오히려 나빠진 모양입니다. 그려. 밖으로 나가서 대련이라도 하면 기억이 되살아 나지 않을까 싶소만···.”
“제, 제가 아주 쪼금 철이 없긴 했지요.”
“허허허. 두 분 방주님이 자주 만나서 관계를 돈독히 하십시오. 특히 사 방주는 문주를 대행하는 위치에 있으니, 혹여 내부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모든 방주들을 다독여야 할 것입니다.”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어르신.”
***
“······.”
“······.”
둘이 송 영감의 거처에서 나오는데 약간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사중환은 괜한 짐작으로 왕호를 멀리했고, 왕호는 흑림방에 신경 쓰느라 사중환에게 소홀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왕호. 내가 너를 오해하고 있었어. 내가 속이 좁은 탓이다.”
그래도 사중환이 연장자의 모습을 보이며 먼저 사과를 건넸다.
“아닙니다. 형님. 제가 흑림방에만 신경 쓰느라 단주들에게 보고를 미뤄왔습니다. 앞으로 제가 직접 형님께 보고 드리지요.”
“···오랜만에 한잔할까?”
“근래 마교 놈들의 공세도 소강상태이니 잠시는 괜찮겠지요.”
마한로를 죽산에서 서안까지 이동시킨 다음부터 마교의 공세가 이어졌다. 서안의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밤마다 둘의 치열한 공방이 오간 것이다. 특히 하오문에 잠입하려는 마교도를 막아내느라 신투 흠양신을 비롯한 흑림방의 인원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방비를 이어갔다. 반격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그랬다간 마교와 전면전을 각오해야 했기에 방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럼 가자. 이젠 마교가 튀어나와도 무림맹에서 상대할 것이니···.”
마교의 공세를 하오문 홀로 막아내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으로 송 영감이 무림맹을 끌어들이고 둘의 싸움을 붙인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덕분에 흑림방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예. 가시지요.”
“아. 그 전에···.”
사중환은 아무도 없는 주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흑림방의 은형술이 일취월장하는 것은 좋다만, 어디까지 쫓아오게 하려고?”
“아직 멀었습니다. 다들 나와라.”
휘익. 탁. 타닥.
수풀 뒤와 기둥 뒤, 땅 속에까지 숨어있던 흑림방의 방도들이 튀어나와 부복했다.
“죄송합니다. 방주님. 아직 은형술 습득이 미숙하여···.”
“패방주께서 너희의 은신을 파악하시거야 당연한 일이다. 연락을 위해 하나만 따르고 나머지는 돌아가도록.”
왕호의 명에 사중환에게 고개를 숙인 이들이 조용히 자리를 떠났고, 한 명만 뒤를 따랐다.
“방도들 보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어.”
“흐흐. 형님께서 워낙에 수련을 단단하게 시켜주셔서 제가 잘 써먹고 있지요.”
“말이 또 그렇게 되나?”
“문도들이 수련관에서 배운 것들이 평생을 가는 것 같습니다. 무공의 기초가 단단하니 이후에 다른 무공을 접해도 익히는 속도가 다릅니다.”
둘은 두런두런 대화하며 이동했는데, 정문이 아니었다. 다른 전각으로 들어가 바닥을 들추고 어두컴컴한 굴을 통해 걷고 있었다. 하오문의 수뇌부들은 정문으로 오가지 않는다. 외부의 감시를 고려해 출입구를 많이 만들어 두었고, 때로는 오늘처럼 마련해둔 굴을 통해 밖으로 나가곤 했다.
끼이익.
이들이 굴을 통과해 나온 출구는 하오문에 조금 떨어진 일반 가옥이었다. 가옥에 도착한 사중환은 가옥을 나서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인근 객잔에는 문도들이 많아서 힘들고···.”
서안을 모조리 집어삼킨 하오문이다. 서안에서 하오문도가 없는 객잔이나 기루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문제로다.”
게다가 관도에는 수시로 개방도들이 돌아다니고, 연위흑패의 문도들과 흑림방의 인물들, 근래 자리를 잡기 시작한 하오문 정보단의 인물들까지 난립해 있었다. 하오문의 수뇌부에 속하는 둘이 나섰다가는 모두의 눈이 자신들을 향할 것이다.
“형님. 차라리 적당히 술과 요리를 사서 산으로 갑시다.”
“그게 좋겠구나. 여산이 가까우니 그리로 가면 되겠어. 새로운 수련관이 거의 완공단계에 있거든.”
“한번 가보고 싶었지요.”
왕호가 눈짓하자 따르던 흑림방도가 얼른 나섰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패방주님.”
사중환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주며 말했다.
“넉넉하게 사오게. 자네도 한잔 해야지.”
“아닙니다. 후일 문주님을 호위하려 경쟁 중입니다. 임무 중에 술을 마셨다가는···.”
“호위?”
처음 듣는 소리라 왕호를 돌아봤고, 왕호는 문도를 얼른 보냈다.
“가봐. 내가 방주님께 설명하지.”
“예. 방주님.”
흑림방도가 가고 나서 왕호가 입을 열었다.
“문주님의 무위가 천의무봉에 이르렀음을 모르지 않으나, 일문의 문주님이 아니십니까. 호위 하나 없이 떠나가신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흑림방에서 따로 호위를 뽑고 있었군. 그럼 아까 밖에서 은형술을 펼치던 이들이 전부?”
“예. 비급은 없지만, 신투 녀석이 익힌 은형술을 배워 익힐 수 있었습니다. 무릇 호위라면 흔적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지요.”
“문주님은 귀찮은 혹이 생겼다 하실 거야.”
“저도 그러실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이 덕분에 흑림방에서 문주님을 호위할 핵심 인력을 뽑겠다고 했더니 녀석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졌습니다. 신투의 은형술과 경공이 날로 익숙해지고 있지요.”
“은형술보다는 경공에 집중해야 할 거야. 아니면 문주님 뒤꽁무니만 쫓다가 다 낙오되어 버릴지도···.”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입니다. 은형술보다 경공에 더욱 집중하지요.”
곧 흑림방도가 술과 요리를 싸서 가옥으로 돌아왔고, 일행은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 서안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