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232)

남경 작전

***

평범한 걸음으로 서안에서 여산까지 가려면 족히 반나절은 걸리지만, 경공을 사용한 셋은 불과 반시진이 되기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사중환과 왕호는 숨결이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흑림방도는 한껏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렇게 잘 따라올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올걸 그랬어.”

“그랬다간 바로 낙오되었을 겁니다.”

“하하하. 어서 들어가자.”

이제 거의 제 모습을 갖춰가는 하오문의 새로운 수련관이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새로 수련관을 짓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문도들이 매일 같이 늘어나니 어쩔 수 없잖아. 근래는 수련관 인원이 한계에 도달해서 순번표까지 생겼다고 하더군.”

수련관은 매일같이 몰려드는 문도들로 북적북적했다. 오는 대로 다 받을 수 없는 노릇이라 한정된 인원만 입관을 허락하고 나머지는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흑림방의 초창기 방도들도 수련관의 부족한 일손을 돕고 있지요.”

“옥 방주가 부탁한 일이라고 들었지. 덕분에 수련관 일이 수월했어.”

옥비연은 송 영감에게 상방을 이어받고 다시 제갈가와 남궁가로 떠나야 했다. 언제까지 사중환과 말동이 수련관의 모든 일을 떠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나마 수련관의 생도들을 가르칠 자격이 되는 흑림방의 초창기 수료생들에게 역할을 분담한 것이다.

“녀석들이 귀찮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꺼워하더군요.”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도 많거든. 왕 방주도 나중에 수련관에서 관주노릇 좀 해.”

“그리하지요.”

사중환은 새로 지어진 수련관으로 들어서며 주변을 살폈다. 공사 중에 미비한 점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흐음. 마무리는 부족하군.”

전각들은 잘 올라갔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기물이 많았다. 실제로 멀리서 인부들이 아직도 정리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만간 이곳으로 수련생들을 받아야 하니, 먼저 수련생들을 받으시고 차차 진행하시지요. 수련생들이 머무를 공간이니, 녀석들을 마무리 공사에 투입해도 될 것입니다.”

“그래도 좋겠어.”

전각으로 들어선 일행은 가져온 술과 요리를 펼치고 자리에 앉았다. 흑림방도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겠다며 밖으로 나간 다음이었다.

쪼르륵. 꿀꺽. 탁. 쪼르륵. 꿀꺽. 탁.

잔에 술을 따르고 단숨에 들이켜고, 다시 잔에 술을 따르는 반복이었다.

“···대형이 없으니 기분이 안 납니다.”

“마음이 허전하다 싶더니···. 대형 때문이었군.”

“······.”

“······.”

둘은 호충이 없는 허전함을 느끼며 술잔을 비웠고, 잠시 후에 밖에서 대기하던 흑림방도가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패방주님. 수련관 마무리 작업을 하던 하오문도가 보고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허. 여기 와서도 일이라니···.”

자신이 오는 것을 보고 쪼르르 달려왔을 터였다.

“들라하게.”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몇몇의 인부가 낑낑거리며 천에 싸인 거대한 물건을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

“······.”

사중환과 왕호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지켜보고 있었고, 곧 물건을 나른 인부들이 빠지고 한 명의 하오문도만 남았다.

“이건 뭔가?”

“일전에 근방에서 땅을 파다가 발견한 물건입니다. 덕분에 전각 일부를 다른 곳에 올리기까지 했습지요.”

“땅 밑에서 나왔다고?”

“예. 이것입니다.”

문도가 천을 걷어내자 흙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인형(人形)이 드러났다. 인형(人形)의 크기는 실제 사람의 크기와 비슷했고, 얼굴의 형태 또한 독특했다. 보통 인형의 상을 만든다면 외형을 아름답게 꾸미기 마련인데,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얼굴을 가진 인형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진짜 사람을 본 따서 만든 것 같군.”

“무엇보다 인형이 입은 옷이···.”

사중환은 인형의 가슴에 묻은 흙을 털어냈고, 인형이 무엇을 입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갑옷이 아닌가?”

“예. 갑옷입니다. 또한 너무 무거워서 들고 나오지 못했으나, 말의 형상을 한 것도 있었습니다. 파헤친 땅은 얼른 다시 복구시켜놨습니다.”

“······.”

사중환은 과거 왕조의 유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문주께 보여드려야 할 것이다.’

“지금 이걸 누가 또 알고 있는가?”

“···제가 인형을 찾아내서 숨겨두었고, 다른 인부들이 보지 못하도록 천으로 가려두었습니다. 방금 함께 온 이들은 이것이 무엇인줄 모르옵니다.”

“전각을 다른 곳에 지은 것도 잘 했네. 나중에 문주님이 오시면 이 물건의 처분을 물을 터이니 자네는 돌아가 보게. 아! 그리고···.”

사중환은 하오문도가 무엇을 바라고 이것을 자신에게 보였는지 알고 있었다.

“이건 얼마 안 되지만 챙겨두게.”

“이제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처세가 훌륭하군. 기억에서 깨끗하게 지워야 할 것이야.”

“예! 방주님.”

하오문도가 돌아가고 나서 왕호는 흙으로 빚어진 인형을 자세히 살폈다. 고대의 유물로 보였기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사중환은 왕호가 인형을 살피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풉!”

“왜 그러십니까?”

“누가 보면 쌍둥이라고 하겠어.”

“······.”

고개를 돌려 다시 인형의 얼굴을 확인한 왕호는 잔뜩 이마를 찌푸렸다.

“형님. 너무하잖소. 내 광대가 이처럼 불뚝 튀어나오고 눈은 째졌단 말이오?”

“푸흐흐. 그래 내가 잘못 본 모양이다.”

왕호는 토기 인형을 보며 기분 나쁘다는 듯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확 부셔버릴까요?”

“아서라. 문주님이 보셔야해. 우린 알아보지 못하지만, 문주님은 무언가 아실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봐도 기분이 나쁘단 말이지.”

왕호가 인형과 마주하자 마치 동경을 보고 서있는 것 같았다. 사중환은 빙긋 미소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예전과 다르지 않은데, 내가 달라졌던 모양이구나.’

왕호의 마음은 과거와 오늘이 다르지 않았는데, 자신은 하오문에서 직책을 맡으며 자리에 연연하고 있었다. 다른 이가 자신의 위로 올라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저 대형을 모시고 세상을 질타할 생각이었거늘···.’

호충이 하오문의 문주로 끝이었다면 자신도 욕심이 그리 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호충이 왕야의 아들이며 역천 대계를 통해 태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부터 자리에 연연하게 된 것이다.

‘내가 관직에 욕심을 가졌던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할 줄 아는 것은 주먹 쓰는 일이 전부였다.

‘문주님은 합리적인 분.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무림 방파를 운영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하오문의 누구도 나라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왕호.”

“···예. 형님.”

“대형께서 태자가 되시면 넌 어쩔 생각이냐?”

“······.”

왕호는 괜히 누가 듣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답했다.

“어쩌긴 뭘 어쩝니까? 저는 대형을 따르는 하오문의 흑림방주 왕호입니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그게 옳다. 대형께서 무얼 하시던 우리는 대형을 따르면 된다.”

“당연한 말을 하면서 왜 그리 무게를 잡고 그러십니까? 술이 과하셨소?”

“···에라이. 형이 말하면 그러려니 하고 들어야지. 따박따박 말대꾸네? 이러다 한 대 치겠다?”

“크흐흐. 이제야 형님답소.”

“······그간 미안했다.”

“아까 끝난 얘길 왜 또 하십니까? 제가 무릎 꿇고 빌어야 그만하실 거요?”

사중환은 왕호의 어깨에 팔을 척 걸치고 술을 마시던 자리로 향했다.

“무릎은 내가 꿇어야 옳겠지만, 네가 좀 봐줘라. 흐흐.”

“패방주 자리 버거우면 내려놓으쇼. 내가 패방까지 다 맡아 볼라니까.”

“그럴래? 네가 하겠다면 얼마든지 내주마.”

“거! 형님! 농담은 농담으로 좀 받아주쇼!”

“크흐흐.”

다시 둘이 자리에 앉아서 대작하는 동안 갑옷을 입은 토기 병(兵)이 둘을 지켜봤다.

***

호충이 서안으로 이동하는 동안 남경도 바쁘게 움직였다.

“종사현 대학사의 장원엔 놈들이 몇이나 있던가.”

“내부에 머무는 놈들은 없고, 주변에 가끔 출몰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을 맞추는 것으로 보았을 때 그저 대학사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한 인력으로 보입니다.”

루방은 방주의 명령에 따라 남경의 문사들 곁에 붙어 있는 마교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두 여인은 시전을 거닐며 조그맣게 대화하고 있었다. 두 여인은 남경에서 기루를 맡아 운영하는 대표기녀들이었다.

“놈들이 마교도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고?”

“그들이 전부 마교도는 아닙니다. 마교도가 아닌 이들을 골라낼 수 있었을 뿐이지요.”

“마교도가 아닌 이들?”

“황제파의 감시도 진행 중인 것 같습니다. 종사현 대학사는 여태 황제파의 전횡에 맞선 인물입니다. 감시할 필요성이 있지요.”

“······.”

“다만 마교도가 무공을 감추고 있기에 오히려 구분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황제파의 감시자들은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입니다.”

마교도가 무공을 감추고 있지만, 행동까지 감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비슷한 행동양식을 따르는 황제파의 움직임과 비교할 수 있었기에 두 감시자들을 더욱 확연히 파악할 수 있었다.

“마교 놈들을 처리하면 마교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분명 누군가 뒤에 있음을 의심할 것이다. 우리는 녀석들을 처리하면서도 하오문을 의심하지 못하게 해야 해.”

“마침 황제파의 감시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활용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독으로 마교도를 죽이고 그들의 칼에도 발라두면 될 것입니다.”

두 여인은 방긋 웃으며 무시무시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누구도 어여쁜 기녀들이 살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걸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일반적인 독을 준비해야겠어.”

“남경의 마교도를 모조리 죽이면 오히려 마교가 의심할 빌미를 줄 것이니, 일부는 독에 중독당해 돌아갈 수 있게 하면 되겠습니다. 녀석들은 흉수를 두 눈으로 확인했을 것이니 하오문이 마교의 용의선상에 오를 일도 없겠지요.”

“이제 어떻게 둘을 싸움을 붙이느냐가 남았구나.”

“패방에서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일부 황제파의 무인들이 도박장에 들락거린다고 들었습니다.”

“마교도는?”

“가끔 쉬는 때에 객잔에서 술을 마시긴 하지만···. 아! 고위급으로 보이는 마교도 하나가 기루에 자주 들른다고 들었지요.”

“흠···. 이제야 방향이 보인다. 너는 빼어난 홍루의 아이를 골라서······.”

한참 대화하며 시전을 기웃거리던 두 여인이 돌아갔고, 그날 밤 고위급 마교도는 마음을 주는 기녀가 생겼다. 또한 며칠 뒤 도박장에 아리따운 기녀가 방문했다. 고위급 마교도가 마음을 빼앗긴 그녀였다.

.

.

.

일이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다시 이틀이 지난 다음이었다.

“자. 아~ 해보셔요.”

“아~”

소교교는 한 남자의 입에 요리를 집어 넣어주며 눈웃음을 흘렸고, 남자는 교교의 허리를 잡아 자신 곁으로 끌어들였다.

“교교.”

“예. 가가.”

“오늘 밤도 괜찮지?”

“아잉.”

드르륵.

기녀를 옆에 앉히고 술을 마시던 마교도는 불청객의 방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시오? 방을 잘못 찾아오셨소?”

“아니? 잘 찾아온 것 같군. 교교. 넌 나가있어라.”

소교교는 전혀 몰랐다는 듯이 들어온 인물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적 오라버니가 여긴 어떻게···.”

“오늘 너를 저 녀석의 마수에서 빼내줄 것이다. 당장 나가!”

화들짝 놀란 교교는 얼른 방을 빠져나갔다.

“······.”

마교도는 교교의 뒷모습을 쓸쓸이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오.”

남경에서 자신이 문제를 일으켰다간 자신 하나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 휘하의 모든 마교도가 치도곤을 당할 것이다.

“오해? 이미 다 확인했다. 오해할 일은 없지.”

“······그녀를 원한다면 그대가 가지면 될 일. 나는 빠지겠소.”

교교에게 마음을 빼앗겼지만, 그보다 마교의 일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녀를 망가트리고 그냥 내 빼겠다? 그렇게는 안 되지.”

“망가트리긴 내가 언제···.”

“닥쳐라!”

챙!

변명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칼을 뽑아 휘둘렀고, 마교도는 가볍게 칼날을 피하며 빠져나갈 구석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든지 녀석을 맞이해 상대할 수 있었지만,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쥐새끼 같은 놈!”

“······.”

마교도는 욕을 들어도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여인에게나 화풀이하는 겁쟁이! 소인배!”

소인배, 겁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흘려들을 수 있었지만, 여인에게 화풀이를 한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뭐라?”

“어디 때릴 곳이 있다고 그녈 때렸느냐! 분명 네 놈이 저지른 일이렸다!”

“그건···.”

그건 교교가 원했던 일이었다. 독특한 취향이라 놀랍긴 했지만, 나름의 신선함이 있었다. 하지만 폭력을 행사한 것도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

“역시 부정하지 못하는 군!”

그녀의 몸 깊은 곳에 남은 시퍼런 멍을 보고 꼭지가 돌아버린 관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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