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악인인가
***
서안을 빠져나와 감숙성 근방까지 도달한 수레에서 마한로와 만정소가 내려섰다.
“덕분에 잘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흑림방의 부탁을 받았던 상방 하오문도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주인께서 거지들을 챙기면 복이 들어온다고 하시어 한 일이니 내게 인사할 것 없소. 이제 갈 길을 가시오.”
“예. 감사합니다.”
상방의 상행에 동행했던 둘은 다른 길로 향했고, 멀리서 이들을 따르는 흑림방의 인물들은 여전히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다.
“······.”
만정소는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가자. 청해성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
“그래도 형님 덕에 여기까지 편히 왔습니다. 흐흐.”
이들의 여정은 감숙을 지나 청해성으로 향했고, 달포가 넘게 걸리는 힘든 여정이었다. 감숙의 난주에 도착한 다음 흑림방은 더 이상의 호위에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늦은 시간 노숙하던 만정소가 마한로를 따돌리고 나와서 뒤따르던 흑림방을 마주했다.
“매일같이 주변을 감시했지만, 여태 단 한 번도 마교도를 볼 수 없었다. 이젠 둘이 가도 될 것 같아.”
“···감사합니다. 덕분에 걱정 없이 왔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와준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녀석이 산에 들어가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오게. 거기서부터 우리와 인연이 없다 여기면 될 것이네.”
“예. 알겠습니다.”
이후 만정소는 마한로와 성읍에 머무는 것을 최소화하며 여정을 이어갔다.
“매번 노상에서 숙식을 해결합니까? 이러다가 노야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운이 빠지겠습니다.”
마한로는 편한 길을 놔두고 고생을 자처하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만정소의 말에 불만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죽산에서처럼 운 좋은 날이 또 있을 것 같아? 걔들이 네 얼굴을 알아보면 어떻게 될 것 같냐?”
“······.”
“네가 죄를 짓지 않았어도 마교 손에 잡히면 너뿐만 아니라 나까지 죽은 목숨이야.”
“···형님이 다 생각이 있으시겠거니 했습니다. 암요.”
“그리고 우리가 성읍에서 머문다고 객잔에라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우린 어딜 가나 노숙이잖아.”
“그도 그렇습니다.”
거지 행색을 한 둘을 어느 객잔에서 받아주겠는가.
둘은 부지런히 길을 걸었고, 드디어 노야산을 마주할 수 있었다.
***
“형님.”
“···인사는 그만하면 됐다. 그간 네 덕분에 고생만 많이 했어.”
“······부디 강녕하시오.”
“됐다니까. 이건 그 도인이나 가져다 줘라.”
쩔렁.
“형님!”
만정소는 오는 길에 그간의 일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패주였던 마한로가 어쩌다가 패주 자리에서 내려와 구걸을 시작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만정소는 마한로의 말을 통해 노야산의 백발 도인이 무엇을 요구했는지 들을 수 있었고, 제자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금이 필요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주머니를 넘긴 것이다.
“제자까지 될 만큼 큰돈은 아니지만, 몸을 의탁하는 데는 알맞은 돈일 것이야.”
만정소가 어찌 금원보 열 개를 모을 수 있었겠는가. 그저 일전에 왕 방주에게 받아 보관하던 노자에 구걸로 벌어들인 자신의 돈 일부를 더한 것이다.
“형님······.”
“산에 오르면 저번처럼 얻어터지지 말고 깍듯하게 모셔라. 병신이 된 네 다리를 낫게 할 정도로 대단한 분이라면 아무거나 배워도 먹고살 정도는 될 것이야.”
“···꼭 갚겠습니다. 형님.”
“네가 잘 살면 갚은 것으로 치겠다. 천지신명께 네가 평안하기를 빌어주마.”
평소 적선을 받으며 하던 축언을 자신에게 건네고 있었다.
“···저 같은 놈에게 돈을 뺏기면서 무슨 축언입니까.”
“내가 천지신명께 빌어준다는데 누가 무슨 상관이야? 내 마음대로 빌지도 못하냐?”
“크흥.”
“덩치는 산만한 놈이 울기는···.”
만정소도 마한로의 눈물에 울컥했는지 얼른 몸을 돌렸다.
“배곯지 마시고···. 등 따뜻한 곳에서 편히 사십시오. 꼭 형님을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크흐흥.”
거지에게 이보다 더 큰 축언이 어디 있겠는가.
“은혜 갚겠다는 놈이 왜 이리 미련이 많누. 빨리 산에나 올라가라. 날이 어두워지면 길 잃어버린다.”
“···예. 형님. 갑니다. 가겠습니다.”
마한로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산에 올랐고, 마한로의 걸음이 멀어진 다음에서야 만정소가 몸을 돌려 마한로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 후우···.”
한참이나 지켜보던 만정소는 긴 한숨을 내쉬고 서안으로 걸음을 돌렸다.
‘제발 별일 없기를 바란다. 마한로.’
***
마한로는 산을 오르며 여기까지 온 이유를 다시 떠올렸다.
‘소야. 소야에게 받은 마음을 오롯이 돌려줄 것이다.’
쩔렁.
“······.”
묵직한 전낭이 소리를 낼 때마다 만정소의 깊은 마음도 떠올랐다.
‘형님께도 꼭 은혜를 갚겠소.’
한발 한발 산을 오르며 마한로는 자신을 업고 이 길을 올랐던 소야를 다시 떠올렸다.
‘혼자도 이렇게 힘든데···.’
소야는 거구의 자신을 업고 이 길을 오르지 않았겠는가.
‘그 작은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마한로는 소야를 떠올리며 느릿하게 산을 올랐다. 이렇게 산에 홀로 오를 수 있는 것도 결국 소야가 도인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덕에 내가 이렇게 살아 있구나.’
자신이 멀쩡하게 걸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소야에게 입은 은혜였다.
‘네가 아니었다면 도인은 날 치료하지 않고 쫓아냈겠지.’
백발 도인이 금원보를 욕심내서 소야를 제자로 들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마한로는 앞만 보고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
만정소가 떠나고 한참 뒤에 흑의인들이 노야산 기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타닥. 탁.
고절한 신법을 자랑하는 무림인들이었다.
“여기서 헤어진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군.”
서안에서 마한로의 종적을 놓친 마교가 여기까지 추적을 이어온 것이다. 계속 뒤쳐져 있었지만, 밤이 깊어지는 지금에서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을 반겨주는 것은 발자국뿐이다. 하지만 둘의 족적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 놈의 발자국이 더 깊은데, 그 녀석은 산으로 갔고, 발이 가벼운 놈은 다른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발이 가벼운 녀석은 두고 이 녀석을 쫓아라. 장로님을 살해한 놈은 이 놈이다.”
““예!””
타닥. 탓.
흑의인들이 동시에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마한로는 끝도 보이지 않는 계단 아래에 도착했다. 기이한 문이 있던 그곳이었다.
‘그때 소야를 재촉해서 빨리 올라가자고 했었지.’
소야와 쉬던 때를 떠올리며 쉬지 못하고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소야. 내가 왔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어찌 쉴 수 있겠는가.
소야도 쉬지 못했는데, 자신이 쉴 수는 없었다.
“끄응.”
턱.
마지막 계단에 오르며 마한로는 몸을 휘청하며 넘어졌다.
철푸덕.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하지만 도끼를 지팡이 삼아 기어코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다.
“끄으응.”
‘소야는 날 업고 여기까지 왔어. 혼자 올라와 놓고 쓰러질 수는 없다.’
마한로의 눈에 예전과 같은 모습의 작은 초옥이 눈에 들어왔다.
“······.”
전엔 제자가 되려고 찾아왔다며 우렁차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지만, 오늘도 그리할 수는 없었다.
“큼. 크흠.”
그저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벌컥.
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백발 도인이 초옥 문을 열고 나왔다.
“어허. 해괴한 일이로다.”
“······.”
마한로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절을 올렸다.
“도인을 뵙습니다. 마한로가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부끄러움을 느껴? 네가?”
저벅.
백발 도인은 마한로의 인상이 크게 달라졌음을 알고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 선하지 않은 존재들이 찾아온다는 천기를 읽었거늘···.”
그래서 마한로를 보고 천기가 옳다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대면한 마한로의 얼굴은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으로 채워져 있었다.
“제가 악하지 않으면 누가 악하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악인입니다.”
“허. 그러면 어이하여 여기까지 왔는고?”
돈을 잃은 보복이 아니라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악인이 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부디 저를 시종으로 써주십시오. 도인 어르신과 소야를 위해 밥을 짓고 청소와 빨래를 하겠습니다. 제 죄를 씻고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십시오. 도인께서 저를 치료해주신 은혜도 갚아야 합니다.”
“······.”
도인은 천기가 틀렸음에 기이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마한로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드릴 것이니, 제발 저를 내치지 마십시오.”
“······.”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오지 않았음에도 전낭을 두 손으로 바치고 있었다.
‘날 찾아온 이들 중에 녀석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는 없었어.’
뭐라도 가르쳐주지 않을까 싶은 욕심으로 가득한 이들만 찾아왔었다.
“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소야와 제 다리를 고쳐주신 도인 어르신을 은인으로 모시고 평생 살겠습니다. 새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허허. 나도 멀었구나.”
도인은 자신이 천기를 잘못 읽었다 여기고 하는 말이었지만, 마한로는 자신을 내치나 싶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감춘 돈은 없습니다. 전낭에 제가 지금까지 구걸해서 모은 돈까지 모두 넣었습니다.”
“구걸하며 살았더냐?”
“···힘이 없어 전처럼 남을 등치며 살 수 없었습니다.”
“흐음.”
백발 도인은 마한로를 두고 고민에 빠졌지만, 곧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섯, 여섯···. 열하나. 무공을 익힌 놈들이 여기까지?’
바람에 실려 온 정보였다.
“혼자 왔느냐?”
“···은인 한 분과 함께 왔지만, 그 분은 산 밑에서 되돌아 가셨습니다.”
“하나?”
그렇다면 지금 경공을 펼치며 빠르게 다가오는 저들은 뭐란 말인가.
“!”
백발 도인은 오늘 천기가 일러준 선하지 않은 존재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선하지 않은 이들은 여럿이었어.’
천기가 일러준 것은 틀림이 없었다.
“초옥 뒤로 가서 몸을 숨기고 있어라. 다른 손님이 왔구나.”
“그럼 저를 시종으로···.”
“마음이 그리 급하더냐?”
“···도인 어르신의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
“짧은 시간 많은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구나. 기다려라. 네게 듣고 싶은 것이 있으니···.”
“예. 도인 어르신.”
마한로가 초옥 뒤로 돌아가 모습을 감춘 다음 흑의인들이 초옥 마당에 하나씩 내려섰다.
타닥. 탁.
“······.”
백발 도인은 이들의 행색과 기운으로 이들의 출신을 알 수 있었다.
‘어찌 이들이···.’
흑의인의 대표인 이가 나섰다.
“살인자를 찾고 있소. 몸집이 크고 도끼를 든 놈이오. 노인장. 놈을 보았소?”
“살인자?”
“그렇소. 놈은 도끼로 우리가 존경하는 어르신을 죽였기에 우리에게 쫓기는 중이오.”
“······.”
백발 도인은 조금 혼란한 참이었다.
‘이 자의 말에 거짓이 없구나.’
“알고 있다면 그를 내주시오.”
하지만 마한로의 얼굴이 선해보였기에 차마 마한로를 내줄 수 없었다.
‘마한로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것 같았는데···.’
마한로가 구걸하며 지냈다고 한 말에도 거짓이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악인이라는 말인가?’
둘 다 진실을 입에 올렸으나, 둘 중 하나는 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