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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의 뿌리 (182/232)

신교의 뿌리

***

“그가 누굴 죽였는지 들을 수 있겠는가?”

“···그걸 들으면 노인장도 오늘 밤을 넘길 수 없을 터인데, 상관없겠소?”

‘악인은 이쪽이 확실하구나.’

누굴 죽였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악인이 누구인지 결정하기는 어렵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대들이 존경하는 어르신이라면 신교의 고위직인가?”

“!!”

챙!

흑의인들이 칼을 빼들었지만, 이들을 이끄는 이가 얼른 만류했다.

“모두 칼을 넣어라!”

마교가 아닌 신교라 말했기 때문이다.

“교와 연이 있으십니까.”

“신교의 현 교주님은 누구시더냐?”

“···말씀드리기 어렵지 않사오나, 먼저 어르신의 함자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백발 도인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본인은 연만호라 하네. 이제 교주님의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

흑의인들을 이끌어온 인물은 깜짝 놀라서 부복했다.

“은마단 이(二)조 조장 마휘가 천마신교의 전대 태상장로님을 뵙습니다!”

마휘의 외침에 다른 은마단 조원들도 얼른 칼을 넣고 부복했다.

마휘는 연만호가 더 묻지 않았음에도 술술 천마신교의 과거 사정을 읊었다.

“아드님이신 전대 교주님은 이십오 년 전 마천경에 드셨으며 이후 전대 교주님의 아드님이신 현 교주님께서 교주의 위에 오르셨습니다.”

연만호의 아들이었던 전대 교주가 죽었고, 자신의 손자가 지금의 교주라는 뜻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소문이었던가···.”

“···예. 그러하옵니다.”

연소문.

현 천마신교 교주의 이름이었고, 무(武)에 재능이 출중했던 손자의 이름이기도 했다.

“······.”

아들이 죽었다는 것도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미 현생의 모든 것을 잊고 신선이 되기 위해 도를 닦은 지 수 십 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교의 교인들은 죽어서 마천경에 들어 마신과 함께 새로운 영의 삶을 산다고 믿고 있었기에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다.

‘생(生)이 있으면 사(死)가 있는 것이 천리(天理)이지 않겠는가. 부귀영화도 권세도 부질없다.’

모든 것을 잊고 신선이 되기로 했음에도 소야를 제자로 받은 것은 그저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 또한 하늘이 이어준 인연에 따른 것이기에 적당한 시기가 오면 제자에게 하산을 명할 생각이었다.

“저희는 신교의 장로를 죽인 마한로를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혹시 녀석이 여기 있다면 내어주십시오.”

“···이곳 노야산 정상이 신교의 금지(禁止)라는 것이 신교에 전해지지 않은 것인가?”

“!!”

연만호는 마휘의 반응을 통해 이곳이 잊혀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교에서는 나를 잊었구나···.’

연만호는 교주의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었다. 교주의 그의 형이었고, 자신은 그저 신교의 태상장로에 올랐다가 은거한 것이다. 하지만 연만호의 아들은 출중한 무위를 갖추고 있었기에 자식이 없는 교주를 대신해 교주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네 녀석은 결국 나를 신교에서 지웠어.’

연만호가 은거한 것은 자의가 아니라 반 강제였다. 교주가 된 아들과 크게 틀어졌기 때문이다.

천마신교의 과거 교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명령이 문제였다. 황실에 손을 뻗지 말라는 내용이었는데, 연만호는 이를 지켜야 한다했고, 교주가 된 아들은 그 방법만이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소야의 과거를 통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후 교주로 올라선 아들과 크게 다투고 신교를 나와 홀로 산에서 살기 시작했다. 당시에 노야산을 금지로 정하고 신교의 누구도 오르지 못하도록 교주의 명을 내렸다고 알고 있었다. 오늘 그 약속이 깨진 것이다.

“이로서 더욱 확실해졌군. 신교와 나는 이미 끊어진 인연일세.”

“교주께서는 전혀 모르시는 일입니다. 존장께서 여기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아셨다면···.”

“아들의 죽음도 의미가 없는 사람에게 손자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교주님이 되셨다니 축하할 일이나, 다시 연을 이을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

“또한 그대들은 금지에 발을 디뎠으니 죽어 마땅하지만, 몰라서 한 일로 넘어가겠네. 하산하시게. 그리고 다음에 다시 오려거든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네.”

“······.”

그때 언덕을 넘어 젊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스승님. 오늘 객이 많네요?”

소야는 스승인 연만호와 함께하는 검은 무복의 인물들을 보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이 연만호 앞에 부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물을 더 캐올걸 그랬습니다.”

“···아니다. 너는 안에 들어가 있어라.”

“예. 스승님.”

소야는 스승의 말이 하늘의 뜻이라도 되는 것처럼 군소리 없이 따르고 있었다.

“······.”

마휘는 전대 교주의 아버지이자 신교의 태상장로 직분을 가졌던 연만호의 제자를 유심히 살폈다.

“···제자를 들이셨습니까? 태상장로님의 제자가 신교의 무공을 익혔습니까?”

“허허. 신교의 아해들은 예나 지금이나 겁이 없구나.”

감히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물음이었다. 연만호는 숨겼던 기운을 줄기줄기 드러내며 마휘를 압박했다.

후우웅.

웅장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거대한 내공이 초옥 앞에서 휘몰아쳤다. 내공은 대기를 무겁게 만들어 꿇어앉은 은마단의 머리를 땅바닥으로 짓눌렀다.

“끄윽!”

“꺽.”

“이곳이 금지라는 것이 신교에서 잊혀 졌다고 하더니···.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도 잊혀 졌나 보구나.”

연만호가 태상장로의 자리에 있을 때 신교의 법을 집행하는 집법장로의 위치도 겸하고 있었다. 무공 수위가 모든 장로의 가장 윗선에 이르러야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나를 모를 때는 그렇다 치지만, 나를 알고 나서도 그딴 소리를 하느냐?”

연만호의 손이 마휘를 향해 펼쳐지자 마휘가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끌려갔다.

주르르륵. 턱.

어느새 마휘의 머리가 연만호의 손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수 십 년 동안 살생을 피하며 살아왔건만···.”

“끄윽.”

마휘는 머리에 닿은 손으로 자신의 기운이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흡성대법!’

“네가 오늘 내 다짐을 깨려하는구나.”

“사, 살려주십시오. 태상장로님.”

연만호는 흡성대법을 중단하고 손바닥에 붙어 있는 마휘를 가볍게 위로 들어 올려 눈을 마주쳤다.

“신교에서 마음대로 입을 놀리려거든 그만한 실력을 쌓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끄윽···. 며, 명심하겠습니다.”

털썩.

더 이상 내공이 몸을 짓누르지 않았음에도 마휘는 땅에 깊이 머리를 박았다.

“비루한 목숨을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태상장로님.”

“제자는 신교의 무공과 관련이 없다. 오직 나의 진전을 이을 뿐.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예. 저희가 찾는 인물은 놓친 것으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머리는 나쁘지 않구나.”

신교에 보고하면 마한로를 찾으러 다시 올 수도 있었는데, 이를 미연에 방지하는 조치였다.

“다만···. 교주께서 다시 저희를 보내실 수 있사오니 부디···.”

“그때도 살려 달라?”

“제가 아니면 다른 신교의 교도들이 오게 될 터인데, 부디 그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소서.”

“···네 마음은 잘 알았다. 한 번 더 허락할 터이니 편히 가라.”

은마단이 우르르 물러나고 나서야 초옥 뒤에 숨어있던 마한로가 머리를 내밀었다. 멀리서 나눈 대화라 들을 수 없었지만, 자신을 쫓아온 마교의 인물이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 갔습니까?”

“이제 나와라.”

“휴우.”

“이리와 보아라.”

연만호는 가까이 다가온 마한로의 손을 잡으며 상단전의 공능을 일으켰다.

“······.”

마한로의 과거를 읽는 것이다. 단편적인 기억들이지만,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대부분 볼 수 있었다. 소야를 통해 마한로의 패주 시절을 보았기에 이후의 짧은 시간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신교의 무사들이 먼저 적대했기에 다른 무인들이 나섰지만, 마한로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휘는 진정으로 마한로가 신교의 장로를 죽였다고 믿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이런 오해가 생겼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죽산에서 너와 같이 있던 이들은 누구냐?”

“!”

“늙은 거지와 고수들이 너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냐?”

“···하오문 소속의 개방도인 형님과 하오문의 무인들이었습니다.”

“하오문? 처음 들어보는 문파로군.”

“···문을 개파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신생 무림 방파입니다.”

“허. 그런데도 신교의 고수들을 몰살시켜?”

“···여기서 그것까지 다 보실 수 있단 말입니까?”

연만호의 신통력에 크게 놀란 마한로였다.

“네가 한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았으니, 그걸로 됐다.”

거지 만정소와 만나 바뀐 그의 마음 또한 읽었음이다. 마한로가 마음을 돌려먹고 새 사람이 되기로 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럼 저를 시종으로 받아주시겠습니까?”

“그건 내 허락이 아니라 제자인 소야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연만호는 초옥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소야를 불렀다.

“제자야. 나오너라.”

“예. 스승님.”

소야는 안에서 밖의 대화를 다 들었음에도 마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연만호 앞으로 갔다.

“부르셨습니까. 스승님.”

“무시하는 것은 도리어 마음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

소야는 속마음을 스승에 들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마한로가 자신에게 어떠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깨닫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극한 충정과 지극한 미움은 결국은 지극하다는데서 공통점이 있었고, 이는 여전히 자신이 마한로를 향한 마음이 남아있다는 뜻과 같았다.

“오랜만에 만나지 않았느냐. 인사하여라.”

“······.”

하지만 도저히 입에서 인사가 나오지 않았다. 마한로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내온 대부분의 기억이 패주 마한로와 함께했던 기억이었다. 그런 소야가 어찌 마한로를 잊을 수 있겠는가.

말이 없는 소야 앞으로 마한로가 나섰다.

투둑.

마한로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이어서 손과 머리까지 땅에 닿았다.

“···내가 못된 놈이었다. 네가 나를 그리 극진하게 대해주었음에도 네게 잘해주지 못했다. 내게 그리 깊은 마음을 준 것은 네가 처음이었다. 이제야 이를 깨달았으니, 부디 나를 시종으로 받아주어 앞으로 그 마음을 갚을 수 있게 해다오.”

“······.”

울컥 올라오는 눈물이 소야의 눈앞을 가렸다. 눈앞이 온통 뿌옇게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부디 이 못난 놈의 청을 들어다오.”

“끄윽. 끅.”

토옥. 톡.

소야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땅을 검게 적시고 있었다.

“······내, 내가···. 내가 여태···.”

무릎 꿇은 마한로도 자신의 머리맡에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커허흥.”

줄줄 눈물을 흘리는 제자와 마한로를 보며 연만호는 인연의 오묘함을 깨닫고 있었다.

‘악연으로 끝날 줄 알았던 둘이 이렇게 다시 만나 화해를 이루는 구나.’

천기의 오묘함은 알면 알수록 신비했다. 작은 깨달음이 연만호의 심상에 떠올랐고, 덕분에 막혀 있는 공부를 넘어 소성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 천기와 인연은 얽히고설키는 구나. 사람이라는 변수가 천기까지 변화시킬 수 있음이야.’

“···패주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말아야한다지 않으셨습니까! 일어나십시오!”

“···커흥. 소야! 소야!”

소야는 꿇어앉은 마한로를 자리에서 일으켰고, 마한로는 훌쩍 커버린 소야를 품에 안고 펑펑 울었다.

“크어엉. 내가 잘못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죽일 놈이다. 으어엉.”

“왜 이제 오셨습니까! 제가 얼마나 패주를 기다렸다고요! 흐어엉.”

소야에게 마한로는 형이자 아버지였다. 피붙이 하나 없는 소야에게 기댈 사람은 오로지 마한로 하나였던 탓이다.

“끄어엉.”

소야의 말에 주체할 수 없는 후회가 마음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 지를 생각하며 후회하는 것이다.

그런 마한로에게 연만호가 말했다.

“후회는 언제 해도 늦은 법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흐어엉. 어어엉.”

“제자야. 마한로와 함께 지내보겠느냐?”

“···부디 스승님께서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렇게 소야는 다시 마한로를 만났고, 마한로는 다시 소야를 만났다. 끊어졌던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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