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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충의 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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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심한 눈빛들이 호충을 향했다.
호충이 저런 눈빛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사람을 쉽게 죽이며 살아온 놈들이구나.’
지금까지 흑패를 정리하며 저런 눈빛을 가진 놈들이 여럿 봤었다. 자신을 위해 혹은 속한 단체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는 놈들이 대부분 저런 눈을 갖고 있었다.
“······.”
“······.”
당장이라도 출수할 것 같았던 둘은 가운데 인물이 나서자 허리를 숙이며 옆으로 물러섰다.
“귀하신 분의 행차를 막아서 송구합니다. 저희 같은 천것은 옷이 더렵혀질까 걱정하여 검은 옷을 자주 입는답니다.”
“오호라.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안 그래도 잡것들이 옷을 더럽게 입고 다녀서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백성들이 전부 검은 옷을 입고 다니게 만들어야겠어.”
“······.”
그의 눈은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지만, 호충은 그 속에 비춘 경멸을 읽을 수 있었다.
호충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다른 질문을 던졌다.
“검을 패용한 것을 보니 그대들은 무림인인가?”
“···예. 공자님. 상단의 은자 몇 푼짜리 호위 의뢰를 받아서 먹고 삽니다.”
“은자 몇 푼이면 술 한 병 값도 나오지 않겠군. 고생들이 많아.”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는 수준이지요.”
“사람도 죽여 봤나?”
“······.”
“오호라. 몇이나 죽였지? 죽일 때 느낌은 어땠고? 목을 자르면 정말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던가?”
그의 눈에 경멸이 더해졌지만, 그의 입은 지극히 소극적인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나라의 법이 있는데 어찌 함부로 인명을 살상하겠습니까. 그저 상행에서 산적패를 막아 주고 상인들을 돕는 것이 전부입니다.”
“도적놈들은 다 죽여 버려야 해. 다음엔 꼭 목을 자르도록 하게.”
“···노력하겠습니다요.”
‘더 붙들고 있으면 놈들에게 의심만 안겨주겠어.’
“에이. 재미가 없군.”
호충은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 다시 팔자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었다. 정보를 캐내고 싶었지만, 이들의 입으로 들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보는 앞으로 이들이 머무는 장원을 감시하며 얻어내면 그만이었다.
“푸후. 냄새. 이것들은 아예 몸도 씻지 않는 군. 좀 씻어! 더러워 죽겠다!”
누가 듣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경멸을 입에 달고 있었고, 대부분 그런 호충을 겁내하며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호충이 한참 멀어지고 나서 그의 곁에 있던 마인이 입을 열었다.
“···부교주님. 제가 가서 정리할까요?”
“놔둬라. 황궁 관료의 자식으로 보인다. 괜한 오해는 피해야 할 것이다.”
“예···.”
“가자.”
호충은 청력에 내공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마교의 부교주라니···. 월척이다.’
호충의 눈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
유도영은 미행을 마치고 돌아온 문주를 통해 왕야와 그의 둘째 아들에 관한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 마교가 진행할 일을 설명하려면 필수적인 정보였기 때문이다.
“왕야께서 보신 둘째 아드님이 그럼······.”
마교의 책략으로 왕야의 둘째 아들이 황제의 아들과 바꿔치기 되었다는 엄청난 정보였다.
“내가 아버지를 구해낸 덕분에 마교는 대계의 핵심인 아버지를 잃었지. 그러니 남은 것은 태자가 아니겠어? 마교는 태자를 황위에 앉히려 준비 중인 거야.”
“······.”
동시에 두 곳에서 역천을 획책하고 있었다.
“우리보다는 녀석들이 여전히 우위에 있는 셈이지. 황제가 급작스럽게 서거하시기라도 한다면 분명 태자가 황위에 오를 테니까.”
황제의 동생이 나타난다 한들 황위는 형제에게로 이어지지 않는다. 황제의 아들인 태자가 멀쩡히 살아 있고 나이가 차서 혼례까지 올린 마당이다. 황제가 죽으면 당연히 적장자인 태자에게로 황위가 이어질 것이다.
“···마교에서 어디까지 일을 진행시켰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쪽에서 선수를 칠 수 있었다.
“훗. 아까 마교의 중요 인물을 만났어. 녀석이 이제야 온 것을 보면 아직 일은 시작하지 않은 것 같아.”
“또 다른 마교의 장로라도 보셨습니까?”
유도영도 남경에서 마교의 장로를 감시하지 않았겠는가. 마화평이라는 마교의 장로였는데, 이미 문주의 손에 죽었다고 알고 있었다.
“이번엔 장로가 아니라 부교주다.”
“!”
“내가 무공을 익힌 줄을 모르니 저들 입으로 말하더구나.”
“그럼···. 부교주의 무위도 확인하셨습니까?”
마교의 장로를 둘이나 죽인 문주였지만, 장로와 부교주는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녀석의 무위를 측정할 수가 없었어. 완연한 신화경, 그 이상이야.”
“!!”
“나도 경계해야할 정도의 마인으로 보인다.”
“······.”
유도영은 아찔한 감각에 휩싸였다.
‘문주님이 대적하기 어려울 정도라면 중원 무림에서 누가 그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부교주가 그 정도로 강하다면 마교의 교주는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말인가!’
호충은 유도영의 아연한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풋. 유 단주. 걱정 되냐?”
“어찌 걱정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방금 문주께서 그를 상대하기 쉽지 않다 하셨습니다.”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언제 쉽지 않다고 했어?”
“그 말이 그 말이지요.”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온 힘을 다한다. 나도 녀석을 잡을 때 그리할 생각이야.”
부교주가 얼마나 강할지는 붙어봐야 알 터이나, 중요한 것은 대계였다.
“그리고 무위의 고하는 대계를 뒤집지 못해. 완벽하게 준비하고 실행하면 우리가 이긴다.”
“만약 부교주보다 강한 교주가 등장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죽으나 사나 붙어봐야지 어쩌긴 뭘 어째.”
“문주님이 없으시면 하오문이 대계에 동참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 못 믿냐? 내가 거짓 신을 앞세운 그깟 교주 새끼한테 죽을 것 같아?”
“이건 문주님을 믿는 것과 다릅니다. 문주님은 하오문의 구심점이고 대계의 종착지입니다.”
“···아버지를 황위에 앉히려면 함부로 죽지도 못하겠네. 교주 놈 만나면 안 죽고 잘 도망쳐 볼라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
“···흑림방주를 남경으로 부르겠습니다.”
“왕호는 왜?”
“···혹여 일이 힘들어지면 시간 벌이라도 하겠지요. 흑림방과 함께 대적하면 가능할 겁니다.”
“큭. 왕 방주와 흑림방의 목숨을 바쳐서 날 살리시겠다?”
“여차하면 사 부문주도 부를 생각입니다. 패방의 고수들도 같이 부르면···.”
“큭큭. 아주 다 갖다 바칠 생각이네.”
“문주님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들이 오히려···.”
“유 단주는 그 입 닥치시고.”
“······.”
호충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풍겨 나오며 유도영의 입을 막아버렸다.
“애들 다 죽이고 나 혼자 살아남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유도영은 자신을 억누르는 기운을 힘겹게 버티며 입을 열었다.
“무, 문주님은 왕야의 손···.”
“그게 뭐? 너와 내 목숨이 무슨 차이가 있어서? 핏줄이 밥 먹여주나? 내 피는 붉은 색이 아니라 금색이라도 되는 줄 알아?”
“······.”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하지 마라. 나라는 백성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고, 하오문도 문도가 있어야 유지되는 것이다. 황제를 위해 백성을 죽일 수 없듯이, 문주를 위해 문도를 죽일 수 없다. 마교와 우리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놈들은 교도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지만, 하오문은 절대로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문주님···.”
“사람 목숨을 벌레 목숨처럼 여기려거든 마교로 가서 받아달라고 해. 하오문에서 왔다고 하면 두 팔을 벌려 환영할 것이야.”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또 헛소리를 하면 입을 꿰매 버릴 줄 알아라.”
“······.”
“그리고 너 내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냐?”
사실 호충의 무위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이들는 하오문 내에 방주급 외에는 없었다. 겨우 수련관을 수료한 유도영이 무슨 수로 문주의 무위를 측정할 수 있겠는가.
“···화경에 이른 마교의 장로를 쉽게 상대하실 정도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상대한 적이 있었기에 그 이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실 다른 애들한테 말을 안했는데 말이야···. 내가 현경의 고수 둘을 상대로 대련하고 있거든.”
“예?!”
현경의 고수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과거 무림의 전설에서나 볼 수 있는 경지였다. 그것도 당시의 천하제일인이 그 경지에 오르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정도였다.
“현경의 노친네가 넷이 있어.”
“······.”
하나가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없는데, 넷이나 있단다.
“예전엔 하나를 상대로도 뒈질 정도였는데, 이젠 둘을 상대해도 뒈지지 않고 상대할 정도가 된다 이 말이지. 그런 내가 고작 신화경 말미의 무인을 상대로 질 것 같냐? 교주 놈이 현경이라도 마찬가지야. 둘을 상대로도 대적이 가능한데, 하나는 말해 뭣하겠어?”
“그, 그 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여기.”
“엥?”
호충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익힌 신비한 무공이 이를 가능케 하지. 내 머리 속에 현경에 이르신 네 분의 스승님이 살아계시거든.”
“···허.”
유도영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무공이었다.
“나는 이분들과 매일같이 대련하며 죽을 고비를 넘어서고 있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붙으면 항상 오늘의 내가 이길 수밖에 없지.”
“······.”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내가 마교의 부교주 따위에 겁을 먹을 것 같아?”
“···자신이 있으셨던 거군요.”
“이제 현경의 고수 둘도 만만해져 가는 판이라 곧 셋으로 늘어날 것 같아. 이 노친네들은 좀 할만하다 싶으면 못 죽여서 안달이거든.”
“······.”
현경의 고수 셋을 상대한다는 말이 진실이라면 문주가 마교의 교주를 상대한다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진즉에 말씀을 하시지.”
“뭐 임마? 너 지금 내 탓 하냐?”
“···제가 죽일 놈입니다. 문주님.”
“확 입을 꿰매 버릴라.”
“그럼 문주님은 현경에 오르신 겁니까?”
“현경은 아니야. 현경은 미치지 않고서야 오르지 못하겠더라. 아예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은 경지로 보여.”
현경의 고수인 스승들을 상대하고 있어도 호충은 아직 현경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신화경의 말미에 도달한 것이 이미 한참 전이었지만, 현경의 벽은 높고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현경의 고수를 둘이나 상대하신단 말입니까?”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 벽에 조금씩 실금이 생기고 있어.”
호충은 높은 신화경 너머의 현경을 조금씩 인식하고 있었다.
“허.”
유도영은 문주가 곧 현경을 돌파할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또한 현경을 돌파하기 전에 현경의 무인을 상대한 문주가 현경에 올라선 다음엔 얼마든지 현경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괜히 하오문 잘 이끌고 있는 부문주와 방주들 부를 생각은 말아라.”
“···그럼 하오문에서 도착한 보고나 올리지요.”
“뭔데?”
“부문주님이 문주님만 알아보실 수 있을 거라고 한 서찰입니다.”
유도영은 품에서 서찰을 꺼내 건넸고, 서찰은 이미 개봉되어 있었다.
“유 단주가 읽었는데도 몰라?”
“···암어(暗語)를 어찌 알아보겠습니까.”
“암어(暗語)?”
호충은 얼른 서찰을 꺼내 확인했다. 아주 짧은 한 문장이었다.
[광(光)은(銀)을 캐서 명(明)에 전달하였음.]
“하하. 성공했군.”
황릉을 도굴해서 야광주와 수은을 찾아냈고, 이를 일월(日月)신교로 불리기도 했던 천마신교에 전달하는 것을 완료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오문의 정보단주가 암어(暗語)를 몰라서야 체면이 서겠습니까? 대체 무슨 뜻입니까?”
글의 의미를 파악해보면 빛나는 은을 밝음에 전했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밝음에 빛을 더하면 더 밝아지기 밖에 더 하겠는가. 여기에 은이 왜 끼어드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비밀. 안 알려줄 거야. 유 단주가 내 허락 없이 하오문의 수뇌부를 죽이려한 벌이라 여겨.”
“······.”
유도영의 심란한 얼굴에 호충이 선심을 썼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저 마교의 교주를 천천히 죽이기로 한 것뿐이니까.”
“!!”
그게 어떻게 별일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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