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232)

자비

***

“문주님!”

“아이고. 네 문주님 귀청 떨어지겠다.”

“어떻게 마교의 교주를···. 여기 광은(光銀)이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입니까!”

문주의 말을 통해 명(明)이 마교의 교주를 의미한다는 것까지는 파악할 수 있었지만, 광(光)과 은(銀)의 의미는 전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의 빛(光)과 독성 가득한 은(銀)이다. 우리는 교주에게 죽음의 빛을 선물했다. 실로 치명적인 빛이지. 하지만 교주는 그 빛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거라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

“녀석은 그 빛을 소중히 여기며 천천히 죽어갈 것이야. 독성 가득한 은(銀)은 부하들에게 선물하겠지.”

“하하···. 하하하.”

빛과 은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교주가 죽음에 이른다면 앞으로 거칠 것이 없었기에 유도영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웃기는···. 너는 우리 엄마 감시나 철저히 해. 하위 정보단원들을 활용해야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하하. 왕야께서 부인으로 여기지 않으시는데 왜 자꾸 엄마라고 하십니까.”

“모가지 자르기 전까지 대접은 해드려야지.”

“······.”

호충이 아끼는 목숨은 오로지 주변인에 한정되는 듯했다.

“동생 놈이 하는 거 봐서 살릴지 말지 결정할 생각이야. 그 새끼는 제 형이 있는 걸 알지도 못할 걸?”

“···형제간 불화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마교를 지우면 그녀가 마교의 광신도라도 별 수 없을 겁니다.”

“고민하지 말고 살려 달라?”

“괜한 오해는 피하셔야지요.”

“오해가 아닌데? 죽이면 그 새끼랑 웬수 되는 거지 뭐.”

“부디 자비를 보이소서.”

“자비는 개뿔. 그런 소리는 왜 꺼내? 누가 들으면 내가 마교 교주인줄 알겠다. 가서 정보나 물어와.”

“옙.”

***

그날 호충은 심상 수련에 임해 자신을 입을 때렸다.

“요 놈에 입이 말썽이지!”

찰싹. 찰싹.

“거 셋은 너무하잖소!”

호충이 심상 수련에 들어서니 세 명의 스승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호충을 맞이해 주고 있었다.

“······.”

“······.”

“······.”

“제자 좀 살려줍시다. 예?”

휘익. 휙. 휙.

현경에 이른 고수 셋은 바람처럼 세 방향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자비 좀 베풀면서 살자고요오오오!!!!”

쑤앙.

검강을 가득 머금은 검이 허리를 숙인 호충의 위로 지나갔고,

파바박. 펑!

은밀하게 땅으로 전해져 솟아오른 강기가 발밑에서 터졌다.

번뜩.

정중동과 새로 창안한 경공까지 활용해서 다른 곳에서 몸을 옮겼더니, 눈앞에 주먹이 날아들고 있었다.

휘익.

허리를 뒤집어 겨우 주먹을 피했지만, 처음 헛손질을 했던 두 고수가 소리 없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쑤앙. 퍼엉.

“제기라알!!!”

호충은 검을 뽑아 강기를 막고,

콰앙!

손을 들어 거대한 장력을 받아냈다.

뻐억.

한쪽 방향이라면 뒤로 튕겨나며 힘을 해소 했겠지만, 양쪽에서 들이닥친 힘이라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 문제일 것이다. 과거처럼 둘이었다면 다른 방향으로 피하며 얼마든지 더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피할 공간을 막고 있는 세 번째 스승 덕분에 고스란히 힘을 감당하고 있었다.

“꾸에엑!”

호충은 두 팔이 기괴하게 틀어진 채로 오랜만에 장렬히 전사했다.

“······.”

심상 수련에서 벗어난 호충은 창백한 안색으로 전의를 다졌다.

“···썅. 그럼 나도 자비 없이 갑니다. 엉?”

호충은 곧장 심상 수련에 발을 디뎠다.

전엔 한번으로 끝내는 것도 힘에 부쳤지만, 이젠 연달아 몇 번이고 심상 수련에 임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력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와라!”

휙. 휙. 휙.

“왜 더 빨라집니까! 왜! 왜에에!!”

파바박. 펑! 쑤앙. 퍼엉.

“꾸에엑!”

***

다음날. 호충은 유도영을 불러놓고 말했다.

“어제 유 단주의 말을 듣고 깊이 생각했지. 자비는 좋은 것이다.”

“······.”

“자비가 없으면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응당 자비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무슨 바람이 부셨답니까?”

어제는 자비라는 말도 꺼내지 말라던 문주였다.

“유 단주의 말을 깊이 생각했다니까 그러네.”

자비 없이 얻어터지고 나서야 자비의 소중함을 알게 됐달까? 둘과 셋은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모두가 현경의 고수가 아니던가. 무슨 수를 써도 이길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인간이 아닌 놈들이나 자비심이 없는 거라고!”

사부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일말의 자비심도 없는 현경의 고수들이다.

다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경에 더욱 바짝 다가선 것은 고무적인 성과라 할 것이다.

‘그 정도 뒈졌으면 바로 현경으로 올라갔어야 옳지 않나?’

물론 직접 경험한 사람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어쨌든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그리고 어제부터 정보단원들을 하나씩 투입하기 시작했고, 돌아가며 감시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움직임은 없습니다.”

“조만간에 걸려들겠지. 마교의 부교주까지 나섰으니 조만간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

.

.

.

하지만 예상과 달리 장원은 고요함을 유지했고 하염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전혀 움직임이 없습니다.”

“···몇 달 동안 전혀?”

“예···.”

“썅. 시간만 버렸네.”

유도영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마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었다. 모든 정보를 취합해서 나온 결론은 이랬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마교 입장에서 외부의 누군가 왕야를 납치했어도 저들처럼 대계를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뒤를 쫓는 누군가가 있다고 예측할 수 없습니다. 왕야께서 일찌감치 돌아가셨다고 여길 수도 있지요.”

“······.”

마교는 진휘평의 첫째 아들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 아들이 하오문의 문주라는 것과 이미 진휘평과 위장성의 서천량 대장군과 결탁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하물며 하오문이 태자가 진휘평의 아들이라는 정보를 벌써부터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아. 그 새끼들은 아무것도 모르지.”

“예. 모르지요. 저희 하오문이 왕야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철저하게 감춰져 있으니까요.”

“···그럼 녀석들이 지금처럼 느긋하게 준비하는 이유가?”

“정파 무림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무림의 일은 커다란 일을 정리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일이라 여길 것입니다. 아무리 무림에서 분쟁이 일어나도 버티면 그만이지요.”

황제의 권력만 손에 쥐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하.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차라리 잘 됐습니다. 그 사이 저희는 대계를 착실히 준비해서 선수를 날리면 됩니다. 문주님께서 말씀대로 치명적인 빛이 계속 힘을 발휘하면 이승에서 교주를 만나지 못하실 수도 있지요. 독성 가득한 은(銀)은 마교의 힘을 계속 약화시킬 테고요.”

이러다 정말 못 만날 가능성이 높았다.

‘제 아무리 고수라도 방사선 피폭은 못 이기지.’

“···그 놈과 내가 만날 인연이 아닌가 봐.”

“문주님. 언제까지 계속 이런 상황이 지속될지 모르는데, 남경에 계속 머무르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정리할 일이 있었는데, 잠시 다녀와야겠어. 그러고 보니 유 단주도 같이 가야겠는데?”

“저도요?”

“이제 진가장 정리해야지.”

“아!”

진가장에 거액의 자금을 빌려준 하오문이 아니던가. 이제 진가장에 채무를 상환하라 독촉할 때였다. 그러자면 당시 계약을 추진했던 유도영과 진가장의 넷째인 진호충이 필요했다.

“이제 일 년 됐잖아. 빚 받으러가자.”

“흐흐. 진 가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할 겁니다.”

“정보단은 루방에 맡겨두고 가자. 저번에 보니 루방의 수뇌부도 일 참 잘하더라.”

“지난 황궁과 마교를 충돌시킨 작전은 실로 훌륭했지요.”

“여차하면 그곳에 역천의 무리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알려도 될 거야.”

“루방의 방도 덕분에 관인 하나가 높은 관직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숨어있는 마교도를 전부 찾아내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지요.”

“그럼 우리가 없는 사이 일이 벌어져도 시간 벌이는 하겠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한테 못할 말이 있었어? 편히 얘기해.”

역천의 주역으로 왕야 대신 문주를 올리고 싶다는 말까지 입에 올린 유도영이다.

더한 말이 뭐가 있겠는가.

“황제가 서거하고 태자가 황위로 올라도 그리 상관없지 않을지···.”

“응?”

본래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현 황제를 대상으로 준비한 역천이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대계를 준비해 황궁을 장악하면 됩니다. 그들의 역천은 역천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태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역천이 아니라 순리였다. 역천으로 발생하리라 예상했던 나라의 혼란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황제를 어떻게 죽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마교에서 미치지 않은 이상 드러내놓고 황제를 처리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허. 말이 그렇게 되나?”

“어차피 마교는 아무것도 모르니 눈뜨고 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들이 일을 치르기 전에 우리가 선수를 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이후라도 그리 달라질 것은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언제 시작하든 결국 우리가 황위를 찬탈 할 수 있다는 거네?”

“저희가 남경에서 꾸미는 일은 민심을 동요시킬 것이고, 현 황제든 다음 황제든 가리지 않고 적용 될 것입니다.”

“아버지를 빨리 구출하길 정말 잘 했다니까.”

“문주께서 하시는 일을 하늘이 돕기 때문이지요.”

“금칠은 적당히 하자. 어쨌든 루방에 정보단 인계하고 서안으로 가자.”

“예. 문주님.”

이후 남경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장원에서 진행되던 하오문 정보단의 감시업무는 루방으로 넘어갔고, 예상했던 것처럼 오랜 시간 동안 움직임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변수도 허락할 수 없다. 완벽을 기할 것이다.”

마교의 부교주가 천려일실을 염려하여 정말 느리게 일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

호충은 유도영과 함께 서안으로 향했고, 문주를 호위하고 있던 흑림방도 모습을 드러내고 곁에서 함께했다.

“위 대주. 이 숫자가 호위대 전부인가?”

황혼단을 이끌다 호위대 대주가 된 위지승이 답했다.

“뒤에서 흑림방 호위대 일부가 추적자가 있는지 감시하고 있습니다.”

“뒤에 둘은 그렇다 치고 그럼 앞에 둘은 왜 보냈어?”

“······.”

미리 보고하지 않았음에도 호충은 이들의 기척을 감지해 숫자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상당히 먼 거리까지 갔을 것인데···.’

“적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선발대를 둘 보냈습니다.”

“체계적이네.”

“왕 방주께서 여기 유 단주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네 짓이구나?”

“짓이라니요. 다 문주님을 지키고자···.”

“누가 누굴 지켜? 호위대가 적을 만나면 제일 먼저 죽지 않겠냐?”

“그래서 둘입니다. 하나가 적을 상대하면 하나는 적을 피해 돌아와서 본진에 보고해야 합니다.”

“이 놈이 또···.”

사람 목숨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호위대가 문주님만 지키겠습니까? 이렇게 수련해두면 나중에 다른 분들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기에 미리부터 적용하는 겁니다. 또한 문주님이 계신데, 문주 호위대가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적이 나타나면 가장 먼저 아실 것이고, 호위대를 지켜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위험 부담 없이 호위 업무 수련을 진행할 절호의 기회이지요.”

“쩝.”

할 말이 없었다. 완벽한 논리였다.

“하여간 먹물 새끼들이 말은 잘 해.”

“···같은 먹물 드셔놓고 왜 그러신답니까?”

“···한 마디를 안 져.”

“제가 졌다고 치겠습니다.”

“에라이.”

호충은 유도영과 투닥거리며 길을 나섰고, 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에 서안에 도착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일이 필요했다.

“유 단주. 빨리 안 뛰냐?”

“허억. 허억.”

“너 때문에 우리 일정이 늘어지고 있잖냐.”

“허억. 최대한 달리고···. 허억. 있습니다. 허억.”

“얘는 수련관에서 대체 뭘 배운 거야?”

“···문주님. 유 단주는 저희와 수련의 깊이가 다릅니다.”

“내가 경공은 여벌의 목숨과 같으니 열심히 익히라고 했을 텐데? 영단은 제대로 먹인 거 맞아?”

“···유 단주도 단주급 영단을 먹었습니다. 이 정도면 빠른 편입니다.”

“아냐. 이 새끼는 맨날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놀아서 경공이 퇴보한 것이 분명해.”

가볍게 발을 놀리며 앞으로 쭉쭉 치고 나가는 호충과 흑림방도들의 신형과 달리 유도영의 내공은 바닥을 보이고 있어 육체적인 힘으로 달리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가시지요. 이러다가 선발대와 마주치겠습니다. 후발대도 따르기 버겁고요.”

“에잉.”

일행이 멈추자 유도영은 가장 먼저 자리에 엎어졌다.

“후아. 허억. 허억.”

그 모습에 위지승이 말을 건넸다.

“유 단주. 숨 몰아쉬지 말고 내기를 다스리시오.”

“난 주변을 돌아보고 오마.”

“예! 문주님.”

타앗.

호충이 자리를 비우자 유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우. 말 몇 마디 한 걸 마음에 두시고는···.”

“다 유 단주를 살리고자 하시는 일입니다.”

“위 대주님. 살리긴 뭘 살립니까? 이렇게 달리다 먼저 숨이 넘어가게 생겼는데요?”

“푸흐. 원래 문주님과 다니면 항상 이렇습니다. 문주님은 저희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에 맞춰 경공을 조절하십니다. 절대로 안 죽습니다.”

“흑림방과 함께하실 때도 이랬다고요?”

“경공은 여벌의 목숨이라는 말을 항상 강조하시지요. 상대할 수 없는 적을 만나면 도주하여 목숨을 부지하라는 말씀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제 경공이 그리 부족합니까?”

“···약간?”

“······.”

부족하긴 한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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