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232)

진씨 세가의 가주1

***

“······.”

부족하긴 한 모양이다.

“정보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유 단주도 아시겠지요. 유 단주가 잡히기라도 하면 하오문이 진행하는 모든 일에 차질입니다. 그렇다고 잡히면 자결을 명하실 문주님도 아니시고요. 그러니 문주님이 유 단주의 경공을 위해 저리 노력하시는 것은 결국 유 단주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열심히 수련했는데···.”

문주 곁에 서기 위해 정보단을 맡은 이후에도 수련을 빼먹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부족한 것이다.

“말씀드린 것처럼 유 단주가 아무리 경공을 익혀도 같은 결과일 것입니다.”

“···문주님의 경공과 같지 않은 이상 말이죠?”

“그렇지요. 저희는 문주님과 경공으로 함께 달리는 것을 ‘절망의 질주’라고 부릅니다.”

“절망의 질주?”

“누구든 절망감을 느끼기 때문이죠. 유 단주가 지금보다 더 나아져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벌써부터 절망감이 엄습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이번 여정이 끝날 시점엔 조금 달라지실 겁니다.”

“내공심법부터 운용하지요. 호법을 부탁드립니다.”

“예. 염려 놓고 시작하십시오.”

.

.

.

위지승이 유도영의 호법을 서는 동안 호충은 산 정상에 올라 산세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산의 기운이 몰리는 곳이···.”

산세를 읽어 기운이 얽힌 곳을 찾고 있는 것이다.

“저긴가?”

파앙.

움푹 들어가 기운이 응집된 곳을 찾았지만, 풀만 무성할 뿐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호충은 그 와중에 뭔가를 발견하고 있었다.

“벌써 딴 놈이 꿀꺽했네.”

호충이 찾는 것은 삼(蔘)이었는데, 삼이 있었던 흔적만 있고, 구불구불한 몸을 가진 무언가가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주변에 백사(白蛇)라도 돌아다니나?”

백사가 삼을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으로 가봐야겠네.”

호충은 정상에서 봤던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기운의 응집을 읽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타닥. 탁.

달리던 호충은 신형을 급히 멈췄고, 똬리를 틀고 있는 백사를 만날 수 있었다.

“오호라. 네 놈이 내 삼을 삼켰겠다? 아직 소화 안 시켰지?”

시싯.

혀를 날름거리며 경계하는 백사였지만, 호충을 이겨낼 방법은 없었다.

“대가리를 톡 치면 기절하겠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강력한 딱 밤을 먹이려 했는데, 백사의 똬리 사이로 길쭉하고 둥근 것들이 보였다. 알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 어미였어?”

호충은 손을 내렸다. 알을 지키는 녀석을 잡아먹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잘 먹고 잘 살아라. 다른 곳에서도 못 찾으면 도영이 새끼가 운이 없는 거지 뭐.”

사실 호충은 유도영에게 먹이려 삼을 찾고 있었다. 영단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호충은 얼른 정상에서 확인했던 다른 곳으로 경공을 펼쳤다.

파앙.

***

호충은 그 후로 몇 곳을 더 돌아다닌 다음에야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고, 곧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옛다. 이거나 먹어라.”

유도영은 멋들어진 줄기가 다섯이나 올라온 식물의 뿌리를 받아들고 있었다. 거기다 손바닥처럼 펼쳐진 뾰족한 잎사귀로 산삼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삼(蔘)이 아닙니까?”

“오다가 주웠다. 그리고 위 대주! 이리 와봐.”

“예. 문주님.”

“산삼 군락을 찾아서 몇 뿌리 더 챙겨왔어. 일전에 못 먹은 애들 먹여.”

호충이 캐온 삼은 유도영에게 준 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섯 뿌리가 더 있었다. 보통 산삼을 발견하면 주변에서 다른 산삼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자라며 주변에 씨를 뿌려 군락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하. 문주님은 약초꾼이 스승으로 모셔야겠습니다. 매번 이렇게 좋은 삼을 캐 오신단 말입니까.”

흑림방과 이동하던 중에도 가끔 이렇게 삼을 캐오곤 했기 때문이다.

“몰랐어? 우리 하오문의 태상방주가 약초꾼이었잖아. 약초 캐는 건 송 방주에게 배웠지.”

“송 방주님이···. 하하. 그래서 문주님이 약초를 잘 알아보셨군요.”

송 영감에게 약초 캐는 법을 배운 적은 없었다. 그저 핑계일 뿐이다.

“유 단주는 그거 먹고 더 열심히 뛰어라. 알았냐?”

“······옙.”

산삼까지 받았으니 꼼짝없이 죽도록 뛰어야 할 판이다.

“일정이 얼마나 빠듯한데 천천히 가냐? 우리가 서안에만 가는 것이 아니잖아.”

“···압니다. 에효.”

하오문 본단인 서안에만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가장을 접수하자면 사전에 들러야 할 곳이 또 있었다.

***

일단의 인물들이 진가장 대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일행 앞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확인하는 인물은 지옥 같은 여정을 돌파하고 경공을 체득한 유도영이다.

“뭘 그리 경계해? 얼른 들어가서 가주나 불러서 만나지?”

“···예.”

호충은 본래의 얼굴로 진가장에 돌아온 참이었다.

‘오랜만이네.’

호충은 무려 사 년을 훌쩍 넘겨서 살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오문 일행을 따라 들어오며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진가장의 무사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저 분은 막내 공자님···.”

“하! 여기가 어디라고···.”

‘호란이 년은 아직도 시집을 못 갔다지? 호성이 새끼가 아예 가택 연금이라 했으니···.’

진가장에 오진 않았지만, 가문의 소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진호현이 맹주의 일에 집중한다며 가주직을 버렸고, 둘째와 셋째가 가주 자리를 놓고 물밑에서 싸움을 벌였다. 물론 멍청한 셋째가 둘째를 당해낼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하오문의 자금을 융통해 중부전장을 밀어낸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진호중은 셋째가 여태 저지른 비위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가주에서 쫓아내고 당당하게 홀로 가주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호란은 셋째 호성과 마찬가지로 미운 오리 취급이었다.

오라비가 그런 꼴이 되었으니, 호란이 어찌 시집을 갈 수 있겠는가. 세가의 가주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리 마음이 맞는 남자가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얼굴에 그 성격으로 마음 맞는 남자가 생겼을 턱이 있나.’

호충은 자신을 알아보는 진가장 무인들의 시선을 외면하며 하오문 일행을 따라 내실로 들어갔다.

“···오랜만입니다. 유 단주. 제 때에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진 가주님.”

진호중은 유도영에게 인사하고 곁에 서 있는 호충을 알아봤다.

“!”

“헤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네가 어떻게···.”

“제가 못 올 곳을 온 것은 아니지요. 저도 진가의 공동 가주가 아닙니까. 제가 소식이 조금 늦었지요. 흐흐흐.”

호충은 어깨를 으쓱하며 턱을 치켜 올렸다. 누가 봐도 치기어린 가벼운 태도였다.

“······.”

“금전적인 일로 여기 유 단주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가문의 계약에 수결하라고 하더군요.”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아니면 말죠.”

호충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유도영이 나섰다.

“가주님. 일부터 처리하시지요.”

“···유 단주. 왜 막내를 데려왔소?”

“이걸 보시면 아시겠지요.”

유도영은 진가장이 하오문의 자금을 융통하며 내걸었던 장원과 전답, 상회의 가치를 평가한 내용을 탁자에 늘어놨다.

“하오문이 진씨 세가에 융통한 자금은 무려 삼백만 냥. 하지만 진씨 세가에서 담보로 설정한 자산은 고작···. 칠십만 냥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

“이백삼십만 냥에 해당하는 담보를 더 걸어주시던지, 아니면 이백삼십만 냥을 상환하고 계약을 연장하시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주셔야 합니다.”

“···그,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이자를 꼬박꼬박 받아가고 있지 않았는가!”

“빌려간 돈으로 이자를 줄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러니 이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저희는 빌려드린 자금의 확실한 상환을 보장 받아야 합니다.”

“허!”

‘아직 조금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호중도 알고 있었던 일이다. 처음부터 진가장이 내건 담보물의 가치는 하오문이 준 삼백만 냥에 한참 못 미치고 있었다.

“게다가 진호현 맹주님이 가주직을 버리셨고, 셋째 공자님도 가주직에서 물러나셨지요. 남은 것은 진호중 가주님이신데···. 홀로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세 분이서 감당하실 때와 홀로 감당하실 때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

“하여 제가 여기 막내 공자님을 찾아 모셔왔지요. 공동 가주이신 호충 공자님 수결하시면 책임을 두 분이 나눠지셔야 할 것입니다.”

“책임질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이건가?”

“그래도 추가 담보는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칠 주야 내에 추가 담보를 내놓지 못하면 강제 집행을 시작할 것입니다. 근래 진가장의 성세가 급격하게 퇴보하고 있더군요. 더 늦기 전에 저희도 움직여야지요.”

“······.”

‘하오문은 어찌 다 안단 말인가.’

호중은 호충이 온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너. 여기 수결해라.”

진호중은 유도영이 가져온 계약서를 호충에게 내밀었다.

“···제가 왜 합니까?”

“하라면 할 것이지! 말이 많느냐!”

“···하나 묻지요. 제가 공동가주인 것은 확실합니까?”

“당연하지 않느냐!”

“그럼 진가장이 갚을 능력은 됩니까?”

“······.”

소금 밀매는 힘겹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나라 모르게 파내던 철광산은 바닥을 보였다. 산서에 진출했던 무관은 신통치 않았고, 덕분에 산서까지 영향력을 확보하려던 계획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또한 산서 진출로 빼냈던 인력으로 인해 본래 섬서에 가졌던 영향력까지 약화시켰고, 이후 하오문의 자금을 투입해 이를 회복하려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갚을 능력은 고사하고 진가장을 유지할 능력도 없는 것이다.

진가장은 하오문의 부채가 아니라도 곧 망할 처지였다.

‘진가에서 진행하는 사업은 모두 훼방 놓으라고 했거든.’

하오문이 진가장을 노리고 있는데 그대로 두고 봤겠는가. 하오문이 협조하지 않으면 진가장은 산서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오문은 예전 진가장이 섬서에서 가졌던 영향력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나보고 여길 수결하란 말입니까? 내가 왜요?”

“···너도 진가의 핏줄이지 않느냐!”

“허! 누가 들으면 내가 진가에서 대우받으면서 살았다고 생각하겠네요.”

“이 새끼가 형님 말을 안 듣고···.”

전 같으면 바짝 꼬리를 말고 따랐을 테지만, 거칠 것이 없어진 지금은 달랐다.

“뭐? 이 새끼? 누구보고 함부로 새끼래?”

“!”

“공동가주한테 말을 함부로 하네? 그냥 너 혼자 저거 다 책임지고 끝내자. 응? 나 가주 안 해!”

“야!!”

“형님 외가인 서문 세가에 손 벌리면 융통해주지 않겠어? 외가랑 손잡고 어디 살아남아 보시던가.”

“······.”

서문 세가에 손을 벌리는 것은 중부 전장을 등에 업었던 셋째와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애초에 서문 세가에 그런 돈도 없지만, 무너질 진가장에 서문 세가를 왜 끼워 넣겠느냐!’

호중은 하오문이 이렇게 나오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네가 다 책임져야 하니···. 네 불손한 태도는 넘어가주지.’

어떻게든 호충을 끌어들여야 했다.

“···뭐가 불만이냐?”

“개나 소나 가주랍시고 목에 힘주는데···. 나도 혼자 가주시켜주면 수결하죠.”

“!”

“싫으면 말고.”

‘이 새끼는 대체 밖에서 뭘 하다 와서···. 여전히 멍청하구나!’

안 그래도 조만간 가산을 팔아치우고 야반도주를 할 마음까지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을 빌려준 하오문의 허락이 필요했다.

“유 단주.”

“예. 가주님.”

“가주가 바뀌면 기존 가주는 아무런 책임도 없습니까?”

“허어. 호충 공자님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호충 공자 홀로 가주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하오문이 허락한다면?”

가주가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기이하게도 가문에서 시작한 사업은 하나같이 말아먹게 되었고, 빌린 자금으로 이자를 내기에 급급했다. 막내 녀석이 가주를 맡아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 녀석이 모든 책임을 지고 끝장나도 사람은 남는다. 자장에 영향력이 살아있으면 이들을 끌어 모아 다시 진가장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시작하면 잘할 자신이 있어!’

아예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막내에게 거액의 채무를 책임지게 하고 다시 진가장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사업에 실패한 이들이 주로 하는 착각이었다.

“···누가 되었든 삼백만 냥만 돌려받을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요.”

유도영의 말에 진호중은 선심 쓰듯이 말했다.

“오늘부로 진가장의 가주는 너다. 나는 물러서지.”

“···정말이오? 말로만 그러는 것은 아니고?”

“진가의 수뇌부를 소집해 네가 가주가 되었음을 알리겠다. 그리고 나는 진가장을 나가겠다.”

“그럼 수결은 가주가 된 다음에 하지요.”

“···가주는 가주에게서 이어지는 것이다. 장로들은 병풍이야.”

“그래도 진가의 방계 어른들이 아닙니까. 대우는 해드려야지.”

“뭐···. 어렵지 않은 일이니···.”

진호중은 유도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채무의 갱신을 위한 계약은 조금 미뤄야겠습니다.”

“많이 미룰 수는 없습니다. 오늘 수뇌부 회의를 소집하시고 저녁에 끝내시지요. 가능하시겠지요?”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겠지요. 바로 수뇌부 회의 소집하리다.”

당장이라도 거액의 채무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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