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232)

진씨 세가의 가주2

***

진호중은 급하게 진가장의 장로들과 수뇌를 모아놓고 중대 발표를 터트렸다.

“본인은 진가장의 가주직을 수행하며 크게 부족함을 느낀 바, 공동가주였던 막내 호충에게 단독 가주직을 맡기고 뒤로 물러서려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대 가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막내가 아닙니까.”

“사천에 계신 맹주께서도 아시는 일입니까?”

호중은 좌중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이 가주의 직인까지 호충에게 안겨주며 등을 떠밀었다.

“진가장의 대소사는 맹주가 아니라 가주가 내립니다. 앞으로 진가장의 가주가 될 호충입니다! 앞으로 가주를 보필해 진가장을 크게 부흥시켜 주길 바랍니다.”

“······.”

“······.”

“······.”

그런다고 사람들이 호응하겠는가. 아무도 호충을 반기지 않았다.

호충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호중을 돌아봤다.

“지금 뭐해?”

“···네게 가주직을 넘겼다. 이제 어서 하오문 계약서에 수결이나 해라.”

“아니···.”

호충이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안 나가고 뭐하냐고. 빨리 짐 빼.”

“······.”

“하!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호중은 호충이 꼴도 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옷을 털고 나가버렸고, 호충은 그제야 좌중을 둘러보며 미소를 보였다.

“하하. 다들 저 안 보고 싶었습니까? 어제의 천덕꾸러기가 오늘 가주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끄응.”

가장 큰 신음소리를 낸 사람은 바로 진천(眞天)대의 대주 황종현이었다. 전대가주가 죽고 공동가주 체계로 변한 다음에도 여전히 진천대를 맡고 있었다.

“여. 진천대의 황 대주 아니시오? 날 많이 기다리셨나 보오?”

“···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하하. 안 하면?”

탁.

황종현은 자신의 검을 풀어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부로 대주직을 내려놓겠습니다.”

“하하하. 불가.”

“!!”

“진가장의 가주로 명합니다. 진천대 황종현의 사직을 불허하니 계속 대주직을 맡으시오.”

호충은 방금 받은 진가장의 직인을 탁자에 내리찍으며 결정지었다. 반론을 허락지 않겠다는 뜻이다.

쾅.

“······.”

“혹여 불만 있는 분이 계시거든···.”

호충은 좌중을 둘러보며 여유가 가득했다.

“입 다물고 계십시오. 아니면 직접 다물게 해드릴 터이니···.”

후우우웅.

호충의 몸에서 진한 내공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회의가 진행 중인 커다란 대전을 가득 채웠다.

“커흑.”

“끅!”

“!!!”

“어찌 이런 내공이···.”

황종현을 비롯한 금급(金級) 무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몸을 부르르 떨며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내공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평소 진가장의 단물을 빨며 놀기 바빴던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황 대주. 가서 하오문의 유도영을 데려와라.”

“···꺼흑.”

털썩.

황대주에게 기운이 집중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것이다.

“명령불복종이냐? 아! 내가 돌아오면 거하게 붙어보자 하였지? 그래서 가지 않는 것이구나.”

저벅.

호충은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고, 그때마다 한층 기운이 가중 되었다.

후웅.

“쿨럭.”

“네가 내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싶어 안달하던 당시에도 나는 지금과 같았다.”

저벅.

“그때 내가 널 살려주었음을 왜 모르느냐?”

“끄으으.”

저벅.

“아직도 내가 네 밑으로 보이느냐?”

“끄윽···. 왜 숨기셨소.”

“내 세력이 조금 부족했거든.”

“···그럼 지금은 세력을 얻으셨단 말이오?”

“물론 얻었지. 하지만 묻지 마라. 아직 네가 알 때가 아니야.”

“···맹주께서 그대를 두고 볼 것 같지 않소만. 맹주께서 이곳의 소식을 아시면···.”

“아. 호현 형님을 믿고 있느냐?”

“넷째 공자가 아무리 강해도 맹주의 무위에 도달하진 못 했을 것이오···.”

그간 새로 얻은 비급을 연마하고 영단을 취하여 무공 수위가 크게 오른 호현이었다.

“사천엔 이미 다녀왔다. 호현 형님이 흔쾌히 내게 가주직을 이어받으라 하시더군.”

“!!!”

“나도 나름 무림맹 소속 방파의 일원이 된 터라 만나기 어렵지 않았거든.”

.

.

.

호충은 월하검문의 전승자라는 것을 내세워 무림맹에 갔었고, 맹주 진호현을 만날 수 있었다.

“···살아 있었구나.”

“당연히 살아 있지요. 설마 죽기를 바라신 것은 아니지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왜 오지 않았느냐?”

“월하검문에서 무공을 익히며 세상과 떨어져 지낸 터라 나중에 들었습니다. 어차피 생전에 저를 기꺼워하지 않으셨으니, 제가 오지 않기를 원하셨을 겁니다.”

“월하검문이라···.”

“좋은 스승을 만나 좋은 무공을 익혔지요.”

맹주인 자신의 기억에 없을 정도라면 그리 대단한 문파는 아닐 터였다.

“무슨 바람이 불어 날 만나러 왔더냐?”

“흐흐. 형님이 맹주가 되셨다니 어찌 막내가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할일이 많다. 네 이름을 듣고 허락하긴 했다만, 용건이 없다면 그만 나가보아라.”

“······.”

호충은 자신과 월하검문을 하찮게 여기는 호현의 태도에 오히려 기꺼웠다.

‘그래. 네 머리가 나와 월하검문을 기억하고 있었으면 그게 이상할 일이지.’

하지만 지금부터 각인시켜줄 생각이다.

“아차. 하나 여쭤볼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화산의 무공은 어찌된 것입니까?”

“······.”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진가장의 것으로 만들려던 일은 완전히 틀어져 버리지 않았던가.

“제게 내려주신다던 진강이십사검은 어찌 되었고요?”

“···화산이 매화검법을 입수하고 익히는 중이다. 진가장의 검법은 더 이상 익힐 수 없다.”

“···헛고생만 했군요.”

“헛고생은 아니다. 덕분에 섬서의 화산이 진가장과 긴밀하게···.”

“그럼 형님은 어떻게 맹주직을 얻으신 겁니까? 가문의 무공도 내보이지 못할 터인데···.”

“으득.”

호충이 자신의 심기를 살살 건드리고 있었다.

“그저 머리만 굴려서 맹주의 위를 얻지는 않으셨을 것이 아닙니까.”

“···언행을 함부로 하지 마라. 여긴 무림맹이다.”

“큭큭. 하여간 입만 살아서는···.”

“······.”

호현은 호충의 말에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이 놈이 대체 뭘 믿고 이렇게 함부로 말 하는가···.’

“지금도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립니다 그려. 형님은 예전부터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었지요. 저는 형님 속을 다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형님들에게 숙인다고 그저 멍청하게만 보셨지요?”

“너···. 죽고 싶은 것이냐?”

“오오. 덤벼 보실라우? 내가 산중에서 무공만 익히긴 했으나, 맹주에 밀린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서 그렇소.”

“하!”

호현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문파의 어줍지 않은 무공을 익혀놓고 뿔을 드러내는 호충이 가소로웠다.

“버릇이 없구나. 집을 나가더니 만용만 늘었어.”

“형님이 그 버릇 좀 가르쳐주시오. 내가 워낙에 어려서부터 사람 같지도 않은 놈들 밑에서 자란 터라 예(禮)가 부족한 편이오.”

진가의 형제를 포함해 진가장 전부를 싸잡아 욕하는 말이었다.

“···넌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느냐.”

호현은 여태 익혀온 오환검(五煥劍)의 내공을 일으켰다.

후우웅.

“연무장으로 나와라. 오늘 네게 하늘이 있음을 알려줄 것이다.”

“······맨입으로는 안 되지요. 내가 형님을 상대로 이기면 진가장의 가주 자리를 가져야겠소.”

“진가장의 가주? 웃기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나왓!”

호충은 맹주전 옆으로 나서는 호현을 얼른 따라 나섰다.

“오늘 맹주의 매운맛을 느껴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맹탕이 아닐까 싶은데?”

“······.”

호현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주변을 물렸다.

“다들 자리를 피하라. 공적인 맹의 일이 아니라 사적인 가문의 일이다.”

““예. 맹주님.””

맹의 호위들이 모두 자리를 피했고, 작은 연무장에 호현과 호충 둘만 남았다.

“······.”

“······.”

단 둘만 있는 것을 확인한 호현은 가식을 벗어버렸다.

“···대련에선 예기치 못한 사고가 자주 발생하지.”

스르릉.

“옳은 말씀입니다. 대련으로 팔다리가 잘리는 일은 부기지수로 발생하고 심하면 목숨을 잃지요.”

스릉.

둘이 검을 빼들고 마주했다.

“오늘도 그런 날이라는 뜻이다.”

“시체치우겠다 이겁니까? 푸흐흐. 그럼 저는 형님 목숨을 살려드리는 대가로 가주직을 얻어가지요.”

“멍청한 놈. 너는 예전부터 생각이 짧았다. 호성이 놈보다 못 했지.”

“···그거 지금까지 들었던 욕 중에 가장 심한 욕이오.”

“네가 이승에서 듣는 마지막 욕일 것이다.”

“나는 형님 안 죽일 거요. 그래야 가주직을 허락받지 않겠소?”

“···미친 놈.”

“방금 또 욕을 들었소만? 둘 중에 뭐가 마지막인 거요?”

“으득.”

속을 뒤집는 말에 호현은 내공을 가득실어 검을 휘둘렀다.

화륵.

검이 장작도 아닐 것인데, 마치 검에 불이 붙은 듯이 검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후엑! 그건 뭐요!?”

호충은 급하게 몸을 뒤틀어 검을 피하며 입을 열고 있었다.

“이것이 새로운 진가장의 검법 오환검(五煥劍)이다!”

“오! 진가장은 유행에 따라 가문의 검법을 바꾸는 모양입니다?”

진가장의 검법에 역사가 없음을 꼬집는 말이었다.

“이익!”

화르륵.

검에서 일어난 기운이 둘로 쪼개져 호충을 덮쳐왔다.

“어이쿠. 그거 상당히 뜨거워 보이오?”

호충은 오환검의 검기를 두려워하며 피하기 급급했다. 하지만 호충은 짐작하기 어려운 기기묘묘한 보법으로 오환검의 초식을 모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

“더 없소? 불만 들고 휘두르는 것이 오환검이오?”

“너를 가벼이 봤구나. 월하검문은 보법으로 유명한 모양이군.”

“큭. 이제부터 확인해보시오.”

호충은 느릿하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챙!

처음으로 서로의 검이 마주했다.

‘내 검이 더 빨랐을 것인데···.’

호현은 먼저 발출한 자신의 검초가 늦은데다 느리게 펼쳐지는 검에 막힌 것이 의아했다.

“후발선지(後發先至)라 합니다. 제 검은 아무리 늦어도 늦은 법이 없지요.”

“······.”

검을 익히며 후발선지를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다만 알고서도 쉽게 펼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챙. 챙. 챙!

찌이잉.

호충의 검이 연달아서 호현의 검을 두드리자 검이 비명을 질렀다.

“!!”

“방금 보인 검초는 양보로 생각해주십시오.”

너무 빠른 검초에 호현은 미처 검을 회수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제가 고수이니 삼 초를 양보한 것이지요.”

“자, 잠시···.”

호현은 빠른 검초를 보고서야 호충의 배움이 얕지 않음을 깨달았지만, 호충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하핫!”

호충은 호현의 입이 열리기 전에 뛰어들었고, 둘의 신형이 어지럽게 얽혀 들었다.

챙. 채앵!

호현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고 여겼다.

‘이제 되돌릴 수 없다. 내 모든 것을 보인다!’

화르륵!

호현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깊이 익힌 덕에 오환검을 익히기 어렵지 않았고, 최근 오환검의 후반부까지 모두 익힐 수 있었다.

‘다섯 방위로 치닫는 오환검을 네가 어찌 막을까!’

“하압!”

“······.”

호충은 살기가 충천해 달려드는 호현의 모습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놈의 재롱을 봐야 하는가···.’

진가장을 차지하는데 생길 불협화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호현을 상대한 것뿐이다. 무인으로서의 호현은 호충의 기준에서 한참 미달이었다.

호충의 검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세한 검기를 두르고 있었고, 호현이 펼친 오환검의 다섯 방위를 깜빡이며 지나쳤다.

퍼벙. 펑. 펑. 퍼버벙.

화려하게 불타오르던 오환검의 검기는 연기가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형님. 이제 재미가 없어서 더 끌고 싶지 않습니다.”

“!!”

“방금 검식이 오환검의 마지막 초식이지요? 더 볼 것도 없으니 이만 끝내겠습니다.”

호충의 검이 월하검문의 월하답보의 초식을 따르기 시작했다.

샤라락.

호충의 손에서 빙글 회전한 검이 커다란 만월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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