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232)

또 다른 가주 후보

***

“이것이 맹주의 친필 서한이다.”

호충은 진호현이 직접 작성한 서찰을 진가의 장로들에게 건넸고, 그들 중 하나가 얼른 서찰을 꺼내 읽었다.

[무림맹주인 나 진호현은···. 진가장의 막내 진호충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며 진가의 가주로 추대하는 바이다. 진호충은 앞으로 진가를 키울 거대한 재목이니, 진가의 수뇌부는 새로운 가주 호충을 맞이하여 진가장을 부흥시키길 바라노라. 맹주 진호현.]

“···맹주님의 필체와 인장이 분명합니다.”

“······.”

“······.”

황종현은 암울함을 느꼈다.

‘맹주님이 이 녀석을 인정하시다니···.’

“황 대주.”

“···예.”

“가주님은 왜 빼먹나?”

“······예. 가주님.”

“가서 하오문의 유도영 단주를 불러와라. 진가장이 거액의 채무를 지고 있는데, 진가장의 수뇌부가 일의 진행을 몰라서야 쓰겠는가.”

“···다녀오겠습니다.”

황종현은 세상이 무너진 얼굴로 터벅터벅 밖으로 향했다.

“자아. 이제 장로님들이 결정이 남았습니다. 진가장이 하오문에 진 빚은 삼백만 냥. 이 빚을 가주와 함께 책임지겠다는 장로가 있으면 나서주십시오. 앞으로 크게 대우하리다.”

“······.”

“······.”

“······.”

“······.”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누가 거액의 채무를 책임지고 싶겠는가.

“없소?”

“······.”

“······.”

호충의 눈을 피해 저마다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진가장이 위기에 처했는데, 나서는 이가 아무도 없단 말입니까?”

“······.”

“······.”

호충의 재촉에 장로 하나가 일어섰다. 진가장 전전대의 방계로 진무검과 사촌지간이었던 인물이다.

“역시! 한 분 정도는 나설 줄···.”

“커흠. 제가 일어선 것은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본래 가주란 가문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 가문을 일으키려 외부에서 차용한 자금을 어찌하여 장로들이 책임져야 한단 말입니까. 기존처럼 가주가···.”

“···책임은 지고 싶지 않은데, 가문의 장로자리는 차지하고 싶으시다?”

“그런 말이 아니라···.”

“됐습니다. 어쨌든 장로님들과 가문의 수뇌부 중에서 내가 가주직을 맡는데 이견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없소.”

“가문의 채무를 책임진다면야···.”

저마다 비슷한 생각이었다. 거액의 채무를 가주와 함께 책임지고자 하는 인물이 있었다면 애초에 가주와 함께 많은 권력을 나눠졌을 일이다.

“총관.”

“···예. 가주님.”

“사마 총관도 동의하시오?”

“···예. 물론입니다.”

총관 사마충 또한 진호중과 다르지 않았다. 그간 가문의 성세가 어떻게 꼬꾸라지는지 지켜봐 왔기에 조만간 병환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천덕꾸러기가 가주가 되건 말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네까짓 녀석이 가주로 으스대는 꼴을 내가 어찌 보겠느냐.’

“염 부총관.”

“예. 가주님.”

부총관 염태중은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 공자는 나와 악연을 맺지 않았다. 내가 가주대접만 잘한다면 중용할 것이다.’

“오늘부로 장로들에게 지급하던 월봉을 일 할로 줄이겠소.”

“···그리하지요.”

“그게 무슨 소리요!”

“어찌 사문의 존장을 이리 무시할 수 있단 말이오!”

“너무한 처사요!”

“아니면 하오문과 진가장의 채무 계약서에 본인과 함께 수결을 하시던가요. 채무보증에 수결하는 장로에 한하여 온전한 월봉을 지급하겠소.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

“······.”

“······.”

월봉 몇 푼을 받자고 어찌 삼백만 냥의 채무에 보증인이 될 수 있겠는가.

“오늘부로 장로직을 내려놓고 돌아가겠소.”

“나 또한 마찬가지요.”

몇몇이 장로를 그만두겠다했을 때 호충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는 장로들을 보며 말했다.

“어허. 조만간 그 월봉도 아예 삭감할 생각이오만···. 계속 진가장의 장로로 남을 분이 계실까 싶소?”

아예 다 그만두라는 말과 같았고, 실제로 호충이 삭감을 입에 올리자마자 나머지 장로들도 사의할 마음을 드러냈다.

“그간 진가장의 성세를 위해 땀을 흘렸으나, 기력이 쇄하여 그만둘 마음이었소.”

“땀? 그 땀을 언제 흘렸는지 물어도 되겠소? 대체 지금까지 뭘 하신 거요?”

“······.”

당연히 할 말은 없었다. 그저 이름만 장로였을뿐이다. 진가장을 위해 일한 것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호충의 말에 장로들은 저마다 자리에 일어나며 한 소리씩 했다.

“어디 잘 되나 두고 봅시다!”

“진가장의 기운이 다 하였군!”

이렇게 진가장의 장로들은 모조리 공석으로 변해버렸다. 호충이 바라던 바였다.

“부디 조심히 돌아가길 바라는 바입니다. 진가장은 꼭 성세를 되찾을 터이니 그걸 볼 때까지 장수하시오.”

“흥!”

“···지켜볼 것이오. 가주.”

장로들은 하오문의 유도영이 도착하기 전에 몸을 돌려 회의장을 빠져나갔고, 황종현이 유도영과 함께 들어왔다.

“진씨 세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유 단주.”

호충은 처음 하오문과 계약을 주도했던 총관을 불렀다.

“사마 총관. 그대가 이 계약을 주선했다지?”

“···그렇습니다.”

“그럼 진가장이 하오문에 갚을 수 있는 금액의 규모도 파악하고 있겠군.”

“······.”

그동안 하오문의 채무를 신경 쓰고 있었기에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채권자를 앞에 두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이후에 따로 말씀드리지요.”

“아니야. 총관은 지금 당장 말하라. 나는 진가장의 저력을 하오문에 알리고 싶음이야.”

“······.”

‘진가장에 저력 같은 게 있을 것 같으냐?’

사마충은 속으로 호충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현재 진가장의 가용자금은 오십만 냥이며, 산서에 진출한 무관을 모두 제값에 처분하면 백만 냥을 더 마련할 수 있고, 섬서의 상회와 전답을 처분하면 추가로 팔십만 냥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충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다 말해버린 것이다.

“진가장의 본 장원까지 처분하면 최소 이십만 냥은 받을 것이니, 도합 이백오십만 냥을 마련하시겠습니다.”

호충은 사마 총관의 말을 정정하며 한술 더 떴다.

“산서 무관은 아무리 잘 받아도 오십만 냥을 받기 어렵다. 그리고 소금밀매와 철광산은 왜 빼는가?”

“그, 그건···.”

소금밀매와 철광산은 외인 앞에서 함부로 입에 올릴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삼백만 냥을 빌렸는데, 다 어디다 쓰고 오십만 냥만 남았단 말이냐?!”

“···산서 무관을 운용하는데 일부 사용하고, 섬서의 상회를 다시 일으키는 데에도 일부를 사용했으며···.”

“고작 그걸 하는데 이백오십만 냥을 태워?”

“기존 진가장이 중부 전장에 빌린 이백만 냥을 갚았고, 하오문에 십만 냥의 원금과 오만 냥의 이자를 납부하였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무관과 상회엔 고작 삼십오만 냥이 소모되었지요.”

“···허! 그럼 애초에 진가장은 빚더미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말이구나.”

“······다른 세가의 사정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유 단주. 진가장은 먹고 죽으려 해도 삼백만 냥을 갚을 돈이 없소만···. 이제 어쩌시겠소?”

호충은 유도영을 돌아보며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배를 내밀었다.

배를 째라는 뜻이다.

“그럼 남은 오십만 냥부터 회수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총관. 당장 진가장에 오십만 냥이 없어지면 어찌 되는가?”

“···진가장 무사들의 월봉부터 막힙니다. 또한 힘겹게 유지하고 있는 진가장의 상회도 얼마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상회가 왜 돈을 먹어? 돈을 벌어와야지.”

“근래 경쟁이 치열해진 터라···.”

삼도상단이 무섭도록 섬서 지역을 집어 삼키는 중이었다.

“진가장에 제대로 운영 중인 것이 대체 무엇인가?”

“···그래도 진가장이 맹주님을 배출한 터라 무관은 성세를 되찾는 중입니다.”

무림이 황궁의 허락 하에 힘을 키워가는 요즘이다. 그 중 가장 관심을 받는 곳은 무림맹주의 출신 가문인 진가장이었고, 덕분에 섬서 곳곳에 자리한 진가장의 무관에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상당했다.

“고작 코 묻은 돈이나 벌고 있었군.”

“······.”

호충은 유도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유 단주. 말미를 주십시오.”

“···아무리 봐도 가망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내가 진가장의 가주요. 내가 금전 계약에 수결할 것이오.”

“···우선 갚을 방도는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개털이 보증을 해봤자···.”

“······.”

“······.”

가주를 보고 개털이라 하는데도 총관과 부총관은 말이 없었고, 황종현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진가장의 무사들도 앞으로 세가에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젓고 있었다.

“우선 내가 보증하고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을 데려오리다.”

“······그게 누구입니까?”

“전전대 가주님의 아드님이신 내 숙부님이오.”

“!!”

“!!”

“!!”

호충은 계획대로 진행할 뿐이지만, 이들이 아는 한 전전대 가주의 아들은 하나였다.

“가주. 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전전대 가주님이신 진무검 태상가주님의 아드님은 돌아가신 전대가주님 외에 없습니다.”

부총관의 말을 황종현 대주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전전대 가주님의 다른 아드님은 없습니다.”

“······.”

하지만 총관 사마충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고, 호충은 역시나 싶었다.

‘그래. 네 놈은 진가장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줄 알았지.’

“총관.”

“···예. 가주님.”

“그대는 태상가주님께 아드님이 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저.”

“아는 대로 말하게. 다들 궁금해 하고 있지 않는가.”

“···과거 태상가주님이 가문 밖에서 정을 준 여인이 있긴 했사오나···.”

“사마 총관님. 정말 아드님이 또 있단 말입니까?”

“전대 가주님도 모르셨는데···.”

“저도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이후엔 어찌 살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호충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유도영이 나섰다.

“다른 아들이 또 있다한들 갚을 능력이 있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리고 그가 가주가 되어야 진가장의 채무에 책임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호충은 총관과 부총관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숙부가 오시면 가주로 맞아줄 수 있겠소?”

“······.”

“······.”

방금 진호충을 새 가주를 맞이한 진가장에 또 다른 가주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숙부는 삼백만 냥 정도는 쉽게 갚을 능력이 있다고 들었지요.”

“···그 분이 누구십니까?”

“저희가 아는 분입니까?”

“지금까지 관심도 없다가 재력이 상당하다니 이제야 관심이 가십니까?”

“······.”

“······.”

“유 단주께는 내 따로 말씀드리리다. 그러니 채무의 갱신을 위한 계약서부터 다시 씁시다.”

“···그 분의 재력만 확실하다면 채무를 연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다들 나가보시오. 나머지는 여기 하오문의 유 단주와 의논하겠소.”

총관과 부총관, 황 대주를 비롯한 진가의 인물들이 밖으로 나갔고, 호충과 유도영만 남았다.

“가져와.”

“예. 여기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선 둘의 태도가 확실히 달랐다.

“이곳에 수결하시면 됩니다.”

“여기?”

“예.”

호충은 채무를 갱신하는 계약서를 유도영에게 넘겨주고 명령했다.

“가서 밖에서 기다리는 상방주 불러와. 밥이 다 익었으니 와서 먹으라고.”

“예. 물론입지요. 갑자기 들이닥치면 기이하게 생각할 것이니 며칠 말미를 두고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유도영이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저마다 유도영에게 붙어 물었다.

“계약은 갱신하셨소?”

“그렇습니다.”

“그, 그렇다면 정말 그분의 재력이···.”

“누구십니까? 누가···.”

누가 가주의 숙부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가주께서 그분이 오실 때까지 비밀을 지켜 달라 명하셨습니다. 진가장에 오시거든 보시죠.”

“······.”

“······.”

“······.”

유도영은 입을 꾹 다물고 진가장을 나섰고, 하오문의 인물들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은 호충은 아직 짐을 다 챙기지 못한 호중의 거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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