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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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충이 전각으로 들어서자 옥비연과 유도영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주님. 오셨습니까.”
정상적인 인사를 하는 옥비연과 그렇지 못한 유도영이다.
“문주님. 저 못 믿으십니까?”
유도영은 자신에게 일을 시켜놓고 직접 달려온 이유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냥 상방주께 진가장에 가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전부인데···.”
호충은 유도영의 말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유 단주는 나가 있어라. 상방주와 따라 할 말이 있다.”
“···중요한 일이라면 제가 들어야 합니다. 문주님.”
“사적인 일이다.”
“···나가있지요.”
문주가 진가장 밖으로 나와 다시 호위를 이어가려던 흑림방의 호위대도 풀이 죽어 유도영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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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십니까?”
“···비연. 잠시 너와 의논할 일이 있다.”
“······.”
“세가의 일이다. 너와 나의 일이기도 하고···.”
“유 단주가 나오는 동안 새로운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지요?”
“그래. 의심만 하던 일을 내 귀로 확인하고 나오는 길이다.”
비연은 문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 전에 하나 묻자. 비연. 네 아비 진무검을 어찌 생각하느냐.”
“···그 부분은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녀석은 복수의 대상입니다. 당장 녀석을 죽이지 못해 한이지요.”
“내가 죽여도 되느냐?”
“···대형이 죽이신다고요?”
“반드시 네 손으로 죽이거나 살리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면···.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
“진무검은 나와 피한방도 섞이지 않은 남이니까. 대신 너는 그와···.”
복수는 해야 옳지만, 진무검은 옥비연의 친부였다. 게다가 호충의 몸에 들어간 영혼은 본래 북궁초연의 아들 진호충이 아닌 대한민국의 진호충이기에 복수에 절실함이 부족했다.
“대형. 저도 녀석과 남입니다. 저와 피가 이어진 이는 돌아가신 제 어머니와···.”
비연은 호충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형을 비롯한 우리 의형제들뿐입니다.”
이들이 서로 피를 나눠마셨기 때문이다.
“······.”
“이제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내 어미를 죽인 원흉을 찾아냈다. 호중이 어미의 말을 듣다가 홀연히 떠올랐지. 나의 기억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녀석이 바로 진무검이다. 녀석은 내 어미의 미모에 혹해서·········.”
“!”
옥비연은 일면식도 없는 친부가 저지른 패악을 듣고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내 손으로 녀석을 잡아 죽일 생각이었는데, 네가 마음에 걸리더구나. 너를 잃느니 그를 죽이지 않는 편이 낫다.”
“······.”
비연은 호충의 말을 통해 자신을 향한 지극한 마음을 볼 수 있었다.
“대형. 어찌하여 저를 원수로 여기지 않으십니까···.”
“원수?”
“제 친부의 잘못이니 그 자식인 저를 원수로 여기셔야 옳지 않습니까. 어찌 원수의 아들인 저를 생각하시에 복수를 포기하실 생각까지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
무림에서 원수의 자식을 생각해 복수를 미루는 일이 있겠는가. 오히려 원수의 집안 자체와 척을 지고 집안 전부를 적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비연. 네가 말했듯이 너는 내 형제다. 형제의 아비가 저지른 패악이라도 형제가 원한다면 눈감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대형. 미루지 마시고 얼마든지 처분해주십시오. 저는 녀석의 마지막을 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하나가 남았군. 비연.”
“예. 대형.”
“내 기억은 확실하고, 이미 이 일에 연루된 년의 말을 들었지만 아직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가주의 호위인 이삼이 오늘 마침 쉬는 날이라고 들었어. 너는 자장에서 녀석을 찾아라. 녀석에게 당시의 일을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이다.”
“이삼···. 얼마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자장의 모든 정보는 흑패와 루방의 손아귀에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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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자장에서 이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래도록 진가장에서 호위 일을 하며 상당한 월봉을 받았고, 시시때때로 가주의 금일봉을 받아 챙겼기 때문이다. 진가장에서 금급(金級) 무사보다 더한 무위를 가진 이삼이니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호충은 비연의 안내에 따라 한 가옥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나름 잘 사는 모양이군.”
“···알아보니 진가장에 알리지 않고 살림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누구와?”
“가주의 다른 호위인 미(嵋)입니다.”
“오호라. 둘이 호위 무사로 일하며 눈이 맞았던 모양이군.”
“이삼의 나이가 한참 많습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삼의 나이가 쉰에 가까운데, 미(嵋)는 삼십대 초반입니다.”
“···도적놈이었군.”
“그렇지요.”
“밖에서 기다려. 괜히 몰려가봤자 진실한 대화를 나누기만 어려워진다.”
“흑림방 호위대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대신 도주하거든 잡아두고.”
“예. 그리하지요.”
호충은 성큼 가옥으로 들어갔고, 안에서 기척을 들은 이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경계심이 상당하군.’
직업적인 경계심일 것이다. 가주의 호위로 평생을 일했으니, 기척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크흠. 큼.”
호충은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상대에게 자신을 드러내 경계심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안에 계시오?”
‘누가 왔지?’
미와 이삼은 서로 수신호를 나눴고, 미가 숨어들었으며 이삼은 문틈으로 밖을 살폈다.
“!”
“진가장의 막내 진호충이요. 잠시 뵈었으면 하오.”
이삼이 어찌 막내 공자를 못 알아보겠는가. 과거 집을 나갔던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벌컥.
이삼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문을 열고 나섰다.
“···진 공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소만.”
“더한 소식도 있소. 이삼 무사.”
“들어오시겠소?”
“청해주니 고맙구려. 밖에서 대화해야 하나 했소.”
호충은 가옥 안으로 들어가 정갈하게 정돈된 내부를 돌아봤다.
“자식은 없는 모양이오?”
“···애초에 혼인한 일이 없소.”
“아. 미(嵋)는 애인이었소?”
“!”
“나오라고 하시오. 괜히 숨어있느라 고생이구려.”
“······.”
“아. 내가 가주가 되어 호위하는 중인가? 그렇다면 저대로 두지.”
“!!”
“오늘 내가 진가장의 가주가 되었다오. 그런데 호위가 자리를 비워 내가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겠소.”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호중 형님이 내게 가주자리를 넘겨주었다는 말이오. 아마 지금쯤이면 첫째 마님과 둘째 마님이 손을 잡고 진가장을 나서고 계실 것이오. 호중 형님은 마차를 탔겠군.”
“······.”
“이삼 무사가 믿고 안 믿고는 당장 진가장에서 알아보면 알 일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소.”
“진정 막내 공자님이 진가장의 가주가 되셨단 말입니까?”
“진가장이 빚더미에 올라있지 않았겠소. 그러니 둘째 형님도 감당할 수 없으셨겠지. 마침 책임을 떠넘길 내가 나타났으니 둘째 형님 입장에서야 환영할 일이었소.”
“······.”
진가장이 거액의 빚이 있다는 것은 가주를 호위하던 이삼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가주의 호위가 이렇게 쉬기도 하는 거였소?”
“···진호중 공자님의 무위가 높아 수시로 호위를 물리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일은 편하지요.”
“아. 제 놈의 알량한 무공을 믿고 있었군.”
“···둘째 공자님은 상당한 수준의 비급을 입수하고 깊이 익히셨습니다.”
“······.”
그 놈은 방금 호충의 손에 피떡이 되어 마차를 타고 진가장을 나서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삼 무사에게 물을 것이 왔소. 이것만 답해주면 이삼 무사는 진가장을 떠나도 좋소. 거기서 듣고 있는 미(嵋)도 마찬가지니 잘 들으시오.”
호충은 미(嵋)가 숨어 있는 곳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하문하십시오.”
“진무검과 북궁초연 사이의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소?”
이삼은 막내 공자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친모의 복수를 위해 가주직을 이어받으셨소?”
“뭐. 겸사겸사. 이미 둘째의 어미인 서문희에게 듣고 오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오. 그대를 찾아온 것은 그저 사실 확인을 위한 절차일 뿐이오. 게다가 가주님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이삼 무사에게 해가 될 일은 없을 것이오.”
“흠···.”
이삼은 호충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가주님의 친자가 아님을 알고 있느냐?”
갑작스러운 하대였지만, 호충은 피식 웃으며 편히 답했다.
“훗. 알지. 이삼 호위가 알고 있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어.”
“···가주님은 보호를 바라는 네 친모의 부탁을 받아 진가장에 들였다. 이미 너를 낳은 다음이었지. 덕분에 가주님은 마님들에게 크게 시달림을 받았다.”
“그것도 아는 사실이군.”
“하지만 네 친모에게 함부로 하진 않았다. 오히려 아름다운 미모를 크게 경계했지. 그 정도 미모를 가졌으니, 네 친부의 힘이 작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다. 미인을 얻었다는 것은 그만한 힘이 있다는 뜻이거든.”
“하여간 머리는 좋아. 그래서?”
“하지만 진가장엔 이성을 뛰어넘는 감정을 가진 분이 계셨다. 당시 소가주에 불과하셨던 가주님이 어쩔 수 없는···.”
“계속 아는 얘기만 나오는군. 내가 궁금한 것은 이거야. 너도 관여했느냐?”
“큭. 대체 뭘 믿고 너까지 나를 하대하느냐? 내가 너를 잡아 태상가주님께 갈지도 모르지 않느냐?”
“하대할만 하니 하는 것이야. 피한방울 안 섞였지만, 지금 나는 진가장의 가주이고···.”
우우웅.
“너희 두 연놈의 목을 단숨에 자를 수 있을 만큼 높은 무위를 쌓았거든.”
“!!”
“다시 묻겠다. 이삼. 너도 이 일에 관여 했느냐?”
이삼은 호충에 답하지 않고 소리쳤다.
“미(嵋)! 가라!”
“!”
호충은 미(嵋)가 숨어있던 장소를 벗어나 가옥 밖으로 나가는 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이삼. 너는 여전히 내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내가 너희를 놓칠 것 같은가?”
“···미(嵋)의 경공은 누구도 따르기 어렵다.”
“여기 앉아 있는 내가 쫓겠느냐? 나만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뭐, 뭐라?”
마침 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악!”
“!!”
“잡았군.”
이삼이 비명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일어난 것과 같은 속도로 다시 앉아야 했다.
퍼벅.
호충의 발이 이삼의 오금을 쳐서 다시 자리에 앉혔기 때문이다.
털썩.
“너는 아직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이삼. 너도 관여했느냐? 도주부터 생각하는 걸 봐서는 너도 관여했나 보구나.”
“···세력을 키우셨소?”
미(嵋)의 비명 이후에 밖에서 여럿이 움직이는 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키웠지. 내 밑으로 우글우글해.”
“무공은 언제부터 익혔소?”
방금의 움직임은 자신이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내가 집을 나갈 때에도 네 목을 자르는데 무리가 없었다. 당시와 네 무공은 그리 차이가 없구나. 이제 겨우 절정에 이르렀어.”
“···완벽하게 내공을 갈무리하고 계셨군.”
지금도 호충이 내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면 전혀 모를 정도였다.
“계속 나만 대답하는 것 같은데? 이제 네 대답을 들어야겠다.”
“···저도 관여했습니다. 하지만 미(嵋)는 아닙니다.”
“어떻게 관여했지?”
“당시 소가주님께서는 가주님께서 저지른 일을 소리 소문 없이 정리하시고자 했습니다. 저는 일이 벌어진 다음 진가장에 조작된 사건 보고를 올렸습니다.”
“어머니가 강도를 당해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곁에 있던 내가 살아있었는데?”
“···공자님은 당시 충격으로 이미 정신이 나가 있었습니다. 어리기도 했지요.”
“조작한 이유는?”
“진가장의 가주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 소문이 나봐야 좋을 것이 없기도 했지만, 혹시나 그 분의 부군이 알고 후일 복수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훗. 이미 늦었어. 복수는 시작되었다.”
“···혹시 친부를 찾으셨습니까?”
“찾았지.”
“······.”
“네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분이다.”
“···부디 저로 끝내주십시오. 미(嵋)는 일이 벌어진 이후에 진가장으로 왔습니다.”
“무사가 명령을 듣고 행한 일에 잘못을 따져 뭘 하겠는가.”
호충의 말에 안심한 이삼이지만,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다.
“하지만 네가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구나. 나는 집을 나오며 진원우의 서랍을 뒤졌고, 거기서 어머니의 비녀를 발견했다. 비녀를 왜 진원우가 갖고 있었느냐?”
“그, 그건···.”
“또한 네가 뱉은 말 중에 내 친모를 함부로 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거짓이었다. 진원우 놈도 내 어미를 노렸지?”
호충은 이삼의 심장박동과 눈동자에 집중하며 대화에서 거짓을 골라내고 있었다.
“······.”
“애초에 어머니가 바란 계약은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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