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인
***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호충은 어머니가 어쩌다 진가장으로 와서 도움을 요청했는지 알고 있었다. 말 그대로 도움이었다. 그저 잠시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이후 서안으로 가서 약속했던 대로 진휘평을 만날 생각이었다.
‘물론 만나지 못했을 것이지만···.’
마교의 손에 붙잡혀 감금된 아버지를 어찌 만났겠는가.
“가주가 비녀를 알아봤다면 모친의 출신도 알았을 터.”
황실의 인물이라는 것까지는 무리라고 해도 관부와 관련이 있다는 정도는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원우의 육욕이 이를 넘어 섰음이지. 부자(父子)가 쌍으로 문제였을 것이야.”
“······.”
이삼은 마지막까지 가주 진원우의 체면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공자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가주께서는 공자의 모친이 관부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계셨지만, 품에 안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가졌던 패물까지 빼앗아 두었지요. 그걸 빌미로 동침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오년이나 참은 것이 용하구나. 결국은 그리 될 것을···.”
“참기는 뭘···.”
“······.”
이삼의 말투 속엔 약간의 울분이 들어 있었다. 호충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다가 이삼을 향해 물었다.
“···그 오 년에 네 놈이 한 몫 했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내 어미를 마음에 두고 있었냐는 뜻이다.”
“······.”
이삼은 기억 속에서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녀가 갓 낳은 아기를 품에 안고 진가장에 들어온 날이었다. 한 떨기 꽃망울처럼 청초한 그녀였다. 눈은 마치 잔잔한 호수와 같았고, 작은 미소라도 보이면 세상이 환해졌다. 그날부터 이삼의 마음엔 온통 그녀로 가득했었다.
“···어디까지 제 속을 들여다보실 생각입니까.”
“네가 거리낌 없이 일에 연루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이 조금 이상했거든. 보통 일을 저질러도 남의 잘못이라 변명하기 급급한데, 너는 교묘하게 미를 위하는 척하며 네 탓이라 했다.”
호충은 어머니가 부자(父子)의 마수 속에서 오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에 이삼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네가 막았느냐? 네가 어머니를 범하려던 진원우를 막았느냐?”
“······.”
잠시 보이지 않는 밖을 향했던 이삼의 고개가 호충에게 돌아섰다.
“···소가주께서 마님의 침소로 걸음하려 하면 다른 마님들께 고하여 막기는 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
“하지만 가주님은 막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혹시 날 살린 것도 네가 한 일이냐?”
삭초재근이 확실했을 터인데, 자신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
이삼이 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랬구나. 너는 일의 마무리를 맡으며 날 죽여 없애라는 명을 들었을 것이야. 하지만 듣지 않았겠지.”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을 뿐입니다. 마침 소가주께서 가주를 밀어내려 하신 덕분이지요.”
이삼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
진원우의 원로원행과 맞물려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말이었다.
‘원수가 아니라 은인을 찾았구나.’
호충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 이삼 앞에서 옷을 정돈했다.
“덕분에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스륵.
그리고 깊이 절을 올렸다.
“!!”
“그대 덕분에 내가 살았습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저 또한 공자님을 경원시 했습니다.”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분명 이삼도 호충을 무시하고 홀대했었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시간이 흐르며 마음이 희석되었고, 이후 공자님을 향한 대우를 달리했습니다. 애초에 다른 세 분 마님들의 입김 때문에 대우를 해드릴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를 살린 은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제가 살아있는 것은 그대가 내 어미를 향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디 그간 제가 저지른 과오를 용서해주시길 바랄 뿐이옵니다.”
“모두 잊겠습니다. 어찌 생명의 은인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습니까.”
이삼은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나자 진가장이 염려되기 시작했다. 진무검이 친모를 죽인 원흉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당연히 죽을 것이다. 이후의 진가장이 어찌 흘러갈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또한 호충이 진가장의 핏줄이 아님에도 가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진가장은 어찌 되는 겁니까.”
“나는 진가장을 온전하게 넘겨드릴 분을 찾았습니다.”
“······.”
“이것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진무검에게 또 다른 자식이 있었지요.”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전대 가주님께 형제분이 계셨군요.”
“지금 밖에 계십니다. 곧 진씨 세가의 가주가 되실 분입니다.”
“···제가 계속 가주의 호위를 맡아도 되겠습니까?”
“뵙고 싶다 이 말씀입니까?”
“예.”
“아마도 그대가 아는 얼굴일 것입니다.”
이삼과 함께 밖으로 나온 호충은 묶여 있는 미(嵋)를 풀어주라 명했다.
“놔줘. 이제 다 끝났다.”
“예!”
미(嵋)는 묶여 있던 줄이 풀리자마자 이삼의 곁으로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너는 어떠냐?”
“···녀석들의 무위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전부 절정 이상입니다.”
“······.”
이삼은 열 명 이상이 모인 이곳에 자신보다 하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자님. 대단한 세력을 만드셨습니다.”
“겨우 이들을 보고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하지요.”
“···더 있습니까?”
“나중에 아실 것입니다. 그보다···.”
호충은 비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이 제가 말씀드린 그 분입니다.”
“너, 너는···.”
“오랜만에 뵙소. 이삼. 요즘 흑패에 듣자하니 홍루에 오지 않는다고 들었지. 살림을 차리셔서 마음을 잡으신 모양이오?”
“······.”
이삼은 설명을 요구하듯이 호충을 돌아봤다.
“이미 총관을 통해 진무검에게 아들이 있음을 확인했소. 그리고 당시의 일을 아는 이들을 찾아냈고, 여기 옥비연이 진무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소.”
“···하.”
“진가장은 제대로 된 가주를 얻게 될 것이오.”
이삼은 얼른 인사부터 올렸다. 그가 흑패와 관련이 있어도 가주는 가주였다.
“진가장의 가주 호위 이삼이 인사 올립니다.”
“가주님이 옆에 계신데, 왜 내게 인사를 하십니까? 인사는 내가 가주에 오른 다음에 하시구려.”
“···예. 그리하지요.”
이삼이 자신에게 몸을 돌리자 호충은 손사래를 쳤다.
“나는 됐습니다.”
“가주님. 편히 대해주십시오. 저는 진가장의 호위 무사일 뿐입니다.”
“···그게 좋다면 그리하지.”
호충은 사양을 모르는 남자였다.
“······.”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미(嵋)는 고개만 이리저리 돌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모든 일은 내일 처리할 것이다. 이삼과 미(嵋)는 바로 가주 호위에 복귀하도록.”
“예. 가주님.”
“···예.”
***
호충은 그날 이삼과 미(嵋)를 대동하고 가문으로 돌아갔고, 비어있는 모용 대부인의 처소와 서문희의 처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셋째 호성과 그의 여동생 호란이었다.
‘제 손으로 어미까지 쫓아냈으니···.’
호성은 중부 전장과 연을 끊었고, 어미 방자연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중부전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호성은 사사건건 간섭하던 어머니를 보내고 나서 진가장의 가주로 올라설 것이라 생각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결국 호중에게 내쳐져 별채에 갇혀 있지 않겠는가.
“문을 열어라.”
“···예.”
가주의 명으로 닫았으나, 가주가 열라하지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호충은 성큼 안으로 들어갔고, 나뒹구는 술병들을 볼 수 있었다.
‘아예 폐인으로 만들고 싶었나?’
호중의 꼼꼼한 성격이 여기서 드러나고 있었다.
“호성이 있느냐?”
“······.”
호충은 안에 기척이 있음을 알고 문을 벌컥 열었고, 문을 열자마자 날아드는 비수를 볼 수 있었다.
쐐에에엑.
간단한 고갯짓으로 비수를 피해내고 있었는데, 이삼이 먼저 나서서 칼로 비수를 쳐냈다.
챙.
“괜찮으십니까?”
“···호위는 호위로군. 미(嵋)와 뒤로 물러서 있게.”
“예.”
호충은 무성하게 수염을 기른 호성을 볼 수 있었다. 눈빛이 날카로운 것을 보니 호중이 내린 술을 마시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이제야 발톱을 숨기고 때를 기다렸던가?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지.’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가 거칠다?”
“너, 넌···.”
호중이 왔다 생각하고 날린 비수였다.
“안 반갑냐? 너 구해주러 왔는데.”
“호충아!”
“······뭐야. 왜 이래?”
호성은 진짜 반가운 것처럼 두 팔을 벌리고 뛰어들어 호충을 품에 안았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왔어! 호중이 새끼가 널 가만 두었더냐!”
“······그야.”
본인이 호중을 가만두지 않았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 진가장에서 핏줄은 아무것도 아니야. 호현과 호성은 오직 저밖에 모르는 놈들이다. 형제도 그저 걸림돌로 생각하는 놈들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었어?”
호성은 호충을 살피며 눈을 굴리며 할 말을 찾고 있었다.
“······.”
“큭. 이제야 너답다. 되도 않는 잔머리를 굴려야 호성이지.”
방금 보여준 형제애 가득한 모습은 가식이었던 것이다.
“혹시 호중이 놈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진 않았겠지? 이삼과 미(嵋)는 얼른 따돌려라. 녀석은 달콤한 말로 꼬여내어 네 목을 움켜쥘 것이야. 녀석에게 속지 마라. 오직 나의 말을 믿어야···.”
“헛소리는 적당히 하고···. 이제 나와. 가택 연금은 끝이다.”
“?!”
“오늘부로 내가 가주가 됐거든. 가주의 호위인 이삼과 미(嵋)가 괜히 날 호위하겠어?”
“뭐, 뭐라고?”
“첫째 진호현이 나를 가주로 인정했고, 둘째 진호중이 가주의 직인을 넘겨주며 공언했으니···.”
탁.
호성이 호충을 팔로 밀쳐냈다.
“···네 놈이 가문을 집어 삼키려 했더냐?”
“미친 놈. 네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게 용하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냐?”
“무위도 보잘것없는 네가 무림 세가의 가주가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나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야!”
“맞아!! 너 따위가 무슨 가주야!”
어느새 호란이 나와서 호성의 말에 동조했다. 어미 없는 곳에서 둘이 의지하고 지낸 것이다.
“여. 너도 있었냐? 못생긴 그 얼굴 그대로 잘 늙어가는 구나. 보기 좋다.”
“으윽! 오라버니! 뭐하세요! 저 녀석 얼굴을 뭉개버리시라고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
호충은 은인을 만나고 온 터라 마음이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난 좀 봐주지 뭐.”
휘익.
눈 깜짝할 사이에 옆으로 다가온 호충의 팔꿈치가 호성의 옆구리를 쓸고 내려갔다.
우드드.
“!”
호성은 옆구리에서 전해지는 지극한 고통에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전엔 반대쪽이었던가? 하도 오래전이라 헷갈리네.”
비명도 나오지 않아 입만 벌리고 있었지만, 호성은 알고 있었다.
‘여기 맞아···.’
오래전 무공을 지도하겠다며 나섰다가 쓸려나간 옆구리였다.
“이쪽은 맞겠지?”
‘거기 아니야.’
휘릭. 우드득.
호충은 아예 다른 옆구리에 같은 고통을 남겨주고 있었다.
“끕.”
‘여긴 반대쪽인데···.’
쿠둥.
옆구리를 부여잡은 호성이 모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당한 오라버니를 보고 벌벌 떨고 있는 호란이 남아있었다.
“호란이 네 년은 여차하면 창기로 팔아버릴 테니까 그 입 조심하고.”
“읍!”
툭. 툭.
호충은 바닥에서 부르르 몸을 떨고 있는 호성을 발로 차며 말했다.
“호성이 네 놈은 쥐 죽은 듯이 살아. 괜히 나대다가 아침에 변 싼 채로 발견되는 수가 있다?”
“···끄으. 그게 무슨···.”
그 와중에서도 변 싼 채로 발견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쌩 똥 지릴 때까지 밤새 얻어터진다는 소리야. 오늘은 과거를 떠올리라고 맛만 보여준 거야. 다음엔 진짜 뒈질 각오로 엉겨 붙어. 알았어?”
호충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호성의 거처를 나섰고, 몸을 웅크린 호성과 잔뜩 겁에 질린 호란이 남아 있었다.
“아휴. 개운해.”
“······.”
“······.”
이삼과 미(嵋)가 호충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