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몽
***
호충의 발걸음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내일이 오기 전에 처리할 마지막 사람이 있었다.
“진가장 무인들의 숙소 근방으로 가자.”
“···누굴 찾아올까요.”
“백천우.”
“···아.”
이삼은 호충이 집을 나가기 전에 무사들과 발생했던 드잡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후환을 남기지 말자는 주의라서 말이야.”
‘이런 건 후환이 아니라 속이 좁다고 해야 맞을 것인데···.’
몇 년이나 지난 드잡이를 들춰내 보복하고 있었다.
“바로 데려오지요. 연무장으로 데려가겠습니다.”
“그럼 미리 가서 기다리지.”
이삼은 무인들의 숙소에서 백천우를 데려왔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이야. 이것도 나쁘지 않아. 잘했어. 이삼.”
백천우를 비롯한 진가장의 무사들이 연무장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다들 따라나선다고 하는 통에···.”
“잘했다니까. 한번 쯤 손을 봐주고 싶었거든.”
호충은 백천우를 향해 손짓했다.
“넌 뭘 보고 섰어? 빨리 튀어 나와야지 새끼야.”
“······.”
백천우도 막내 공자가 오늘 가주에 올라섰다는 것을 듣고 요상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 기분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꼬집을 수 없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죽도록 패주고 싶다.’
당시 빠진 이빨 덕분에 지금도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갸즈.”
그나마 힘들게 가주라고 불러주었건만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어휴. 아직도 이빨이 많이 남았네?”
“즈겨버히···.”
“죽여 봐. 새끼야. 나도 그날 영감이 맞은 걸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으니까!”
“흐핫!”
검집에서 검을 뽑은 녀석이 살기가 충만해 덤벼들었고, 호충은 작은 단검과 비슷한 무기를 꺼내 장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챙. 채쟁!
“어쭈? 실력이 많이 늘었네?”
백천우는 부상을 털고 일어난 다음부터 진천대주 황종현의 특훈을 받아야 했다. 오늘의 성장은 지나온 날들의 피와 땀이 어린 결과물이었다.
호충은 백천우가 얼마나 열심히 무공을 수련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겨우 은급 무사였던 그가 지금은 금급 무사라 할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하아!”
백천우의 검은 여러 잔영을 그리며 찔러 들어왔는데, 호충이 너무나 잘 아는 검법이었다.
‘이걸 무사들에게 내렸어?’
과거 진가의 직계만 익히던 진강십이검이었다. 진강이십사검이 화산의 매화검법이었고, 진강십이검은 거기서 파생된 검법이었기에 모조리 사장시켰을 줄 알았다.
‘그래도 조금 다르다 이건가?’
엄밀히 따지면 화산의 검법은 아니었다. 한 무공에서 파생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원류에 귀속된다면 이 세상에 문파가 왜 나뉘어 있겠는가. 무당파를 세운 개파 조사가 화산파에서 검을 수련했지만, 누구도 무당의 검법을 화산의 것이라 하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차라리 진강이십사검을 바꿔서 내릴 것이지···.’
화산에서 익혔던 개화검결과 매화검법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매화검법이다. 멍청아.’
호충은 마침 회칼을 든 참이라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매화검법을 그려냈다.
[설풍심총(雪風枔憁)]
샤라락.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더니, 푸른 잎사귀가 쏟나져 나왔다.
“흐악!”
차라라랑.
푸른 매화 잎사귀는 막아선 백천우의 검을 훑으며 하늘로 솟구쳤고, 이어서 다른 검초가 펼쳐졌다.
[광운쾌검(光雲快劍)]
하얀 구름이 백천우의 시야를 가렸고, 그 사이에서 샛별과 같은 검기가 갑자기 나타났다.
“억!”
휘릭.
그 검기는 백천우의 머리카락 한 올을 자르고 사라져 버렸다.
[유하범화(流河汎花)]
사방에서 매화꽃잎이 범람하고 있었다. 막을 방법은 없었고, 백천우는 아예 검을 든 팔을 내려버렸다.
“!”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매화꽃잎이 아찔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아름다움 속에 치명적인 살의를 내포하고 있었음이다.
호충은 회칼을 털어내고 품에 넣어버렸다.
“······.”
“이젠 아예 막지도 않냐? 내 손에 죽겠다 이거야?”
백천우는 자신과 호충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실력으론 이길 방법이 없어.’
“···져흐니다.”
호충은 패배를 자인하는 백천우 앞으로 다가가 가벼운 꿀밤을 먹였다.
꽁.
“이걸로 너와 나의 은원을 끝내겠다.”
“······.”
‘틀니를 만들 수가 없으니 원···.’
이미 빠져버린 백천우의 치아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호충은 내일 가주로 올라설 옥비연을 위해 진가장의 무인들을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해묵은 은원을 해결하며 무사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모두 나와주니 고마울뿐이다.
“진가의 무사들은 들어라.”
““예!””
이미 호충의 무위를 보았기 때문일까? 무사들의 복창에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호충의 말은 그 기운을 모조리 사그라지게 했다.
“들었겠지만 나 외에 다른 가주가 올 것이다. 너희가 내게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
뛰어난 무공 실력을 보인 호충에게 새로운 감정이 샘솟을 차였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맡아주었을 뿐. 진씨 세가를 이를 진정한 가주는 따로 있다. 그분이야말로 진가의 피를 확실히 이은 분이지. 어차피 너희 마음에 들지 않는 가주이니 더 좋지?”
“······.”
“그리고···.”
호충은 무사들이 기대할만한 소식도 전했다.
“내일 가주로 오실분의 무위는 방금 내가 보인 화산의 검법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여기 백 무사처럼 밤잠을 줄여가며 무공을 익혀야 그 분 마음에 들 것이다. 새로운 무공도 익힐 수 있을 것이니 기대해도 좋다. 알겠느냐?”
““예!””
“대답은 잘 하는군.”
호충은 가득 모인 무사들을 뒤로하고 연무장을 나섰다.
‘이제 내일이면 끝이다.’
진가장을 도모하며 진행했던 일은 내일로 끝이었다. 나머지는 비연이 알아서 할 것이다.
“가주전으로 모시지요.”
“그래. 하루는 거기서 자봐야지.”
옥비연을 위한 준비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
호충은 넓은 가주의 침실에 들어와 부질없는 권력을 실감했다.
‘겨우 이런 침실에서 자며 아랫사람을 부리고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란 말인가?’
셋째 호성이 가졌던 가주 욕심을 떠올린 것이다.
‘겨우 이만한 권력 때문에 형제를 핍박하고 서로를 경계했더냐?’
둘째 호중도 다르지 않았다. 어미는 달랐어도 한 아비에게서 난 자식들이었다. 형제라면 최소한의 선을 지켰어야 했다.
‘허울뿐인 맹주자리는 만족스럽더냐?’
사천 성도의 무림맹에서 봤던 호현도 떠올랐다.
제갈가와 남궁가, 화산파에서 나온 무인들에 둘러싸여 그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맹주의 직인을 찍는 녀석이었다. 그 따위 권력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들과 다른가?”
호충은 매일 수행하던 심상수련에 임하기 전에 자리에 앉아 자신을 돌아보며 명상에 빠졌다.
처음 자신이 가졌던 생각부터 깊이 되새겼다.
‘무림과 새로운 삶.’
무림에 떨어져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깨닫고 가장 먼저 먹었던 생각은 다름 아니라 생존이었다.
‘오직 나를 위해, 내가 주인이 되어 살고자 했다. ···또한 살아남고자 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룬 것을 보면 이 목표는 충분히 달성했다 할 것이다. 스스로를 위해 살고자 뒷골목을 접수했고, 주인이 되고자 우두머리가 되었다. 마교의 위협이 있지만, 살아남기에 충분한 무위도 갖추고 있었다.
‘이제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지.’
처음 세웠던 목표는 하오문주가 되고 진가장 가주에 올라서며 이루었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생기며 삶의 목표가 계속 바뀌고 있었다.
‘화진.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송 영감. 영감에게 내 자식을 안겨주고 싶다.’
‘아버지. 사중환, 옥비연, 왕호···.’
호충은 사람의 마음이 시시때때로 간사하게 바뀐다는 말을 실감했다.
‘인간이란 참으로 보잘 것 없구나.’
쩌저적.
호충은 듣지 못했지만, 호충이 깊이 명상하는 동안 현경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나 또한 보잘 것 없는 인간의 하나였고, 넓고 아름다운 세상의 일부였음이다.’
호충은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며 존재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세우고 있었다.
‘인간군상 속의 나. 세상만물 속의 나. 자연 속의 나. 넓은 우주의 먼지와 같은 나. ···아무것도 아닌 나······. 또한 전부인 나.’
우르르릉.
현경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그 너머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나는 언제까지나 전부인 나다.’
감았던 호충의 눈이 번쩍 떠지며 빛을 발했다.
“······.”
호충은 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내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가?”
새로웠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조차 기막히게 아름다웠고···.
“흐흡. 쩝쩝. 달군. 너무나 달아.”
세상의 공기는 너무나 달콤했다. 그 안에 스며든 자연의 기운을 맛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 나 아무래도 벽을 넘어선 모양인데?”
호충은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고찰과 세상을 향한 인식의 변화가 열쇠였던 모양이다. 넘고 나서야 왜 쉽게 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신화경과 현경은 애초에 세상을 보는 시각에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다.
“허!”
그렇게 두드려도 단단하게 가로막았던 현경의 벽이 하룻밤 명상에 무너진 것이다.
“···아직 해가 솟으려면 시간이 남았지?”
호충은 아직 어두운 창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또 다른 복수의 시간이 도래했구려. 크흐흐.”
호충은 곧장 심상수련으로 돌입했다.
탁. 타닥. 탁.
전처럼 세 스승이 호충을 맞이했다.
“오늘은 쉽지 않을 겁니다. 조금 달라졌지요.”
호충은 심상 속에서 검을 들었다.
“스승님들께 제자가 깨달은 검을 보여드리리다.”
세 스승과 호충이 심상에서 격돌했다.
꽈과광. 쾅!
***
호충은 유도영이 기다리는 회의장에 들어서며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삼이 물어왔다.
“좋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꿈이라···. 그래 아주 대단한 길몽이었지.”
호충의 입가에 미소가 더해졌다.
‘얼마나 개운하던지.’
심상수련에서 세 스승을 맞이해 거창한 승리를 따낸 호충이다.
‘오늘은 또 쉽지 않겠지만···.’
세 스승을 상대로 승리하자마자 넷이 한꺼번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연달아 승부를 이어갈 수 없었기에 심상수련에서 빠져나왔고, 오늘 심상수련에 돌입하면 분명 넷과 승부를 봐야할 것 같았다.
‘그것도 가장 강력한 무위를 보이던 파진후 스승님이 마지막에 추가되었으니···.’
오늘 수련이 쉽지 않으리라 짐작하는 것도 당연했다.
호충의 상념은 유도영의 인사로 멈춰야 했다.
“가주를 뵈옵니다.”
“유 단주. 잘 오셨소.”
이미 회의장엔 어제 모였던 총관과 부총관을 비롯해 가문의 무사들을 이끄는 금급 무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가택 연금에서 풀려난 진호성과 진호란도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가주께서 말씀하신 분이 가까이 계시어 오늘 모시고 올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구려.”
“지금 안으로 뫼시고 옵지요.”
“어차피 진가의 모든 분들과 안면을 익혀야 할 터. 어서 뫼시고 오시오.”
“예.”
유도영이 지시하자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갔고 곧 기척이 들렸다.
“뫼시고 왔습니다.”
“들어오시게.”
끼이익.
문이 열리며 아침 햇살을 등 뒤로 맞으며 옥비연이 걸어 들어왔다.
찬란한 햇빛으로 인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호충은 그림자만으로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얼씨구? 네 년은 왜 눈을 빛내?’
그 와중에 호란은 비연의 용모에 입을 벌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진가주를 뵈오.”
“어인 말씀이십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숙부님.”
“!”
“!”
숙부라는 말에 놀란 이들은 진호성과 진호란이었다.
“수, 숙부라니···.”
“숙부? 저분이 내 숙부님이시라고?”
“이분은···.”
호충은 호성과 호란의 말을 무시하고 모인 이들에게 옥비연을 소개했다.
“최근 크게 성장하고 있는 삼도상단의 상단주이신 옥비연 대협이십니다.”
“!”
“!”
“!”
“!”
삼도상단은 무섭도록 세를 일으키는 상단이었고, 무림에서의 이름도 드높았다. 남궁가와 제갈가에 물품을 납품하고 있었고, 그 전에 황금전장과 함께 무림에 영단을 납품하며 이름을 알렸기 때문이다.
“헙!”
“삼도상단이라니···.”
“엄청난 거부가 아니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