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靈山)
***
강여홍은 자신에게 왜 오환검을 묻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아는 것까지 입을 열었다.
“······전 가주님과 맹주님이 익히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문의 무사들에게 오환검(五煥劍)을 내릴 생각이오.”
“!!”
“그러자면 누군가 먼저 익혀 가르쳐야 하는 바. 이미 조카들의 지도 무사를 역임했던 강 무사가 적합하지 않을까 싶소.”
“자, 잠시만. 가주님만 익힐 수 있는 오환검(五煥劍)을 진가장의 무사들 전부에게 가르치신단 말씀입니까?”
“어차피 조카 호중은 가문을 떠났고, 호현 조카는 맹주로 가문과 떨어져 있소. 이를 무사들에게 내리고 말고는 가주인 내가 결정하면 되는 것. 누가 나의 결정에 참견할 수 있겠소?”
“······.”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주들만 익히는 오환검(五煥劍)을 어찌 무사들이 익힐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마침 호중 조카가 비급을 두고 갔다오.”
이를 챙기기 전에 호충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환검이 거기 없었더라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하오문에 사본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 무사에게 이 비급을 줄 터이니 먼저 익히고 이후 무사들에게 전해주시오. 강 무사는 진가장 무사들의 검술 지도스승이 될 것이오.”
“!!!”
앞날을 가늠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믿기 힘든 호현의 허황된 말들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당근이 더욱 달콤해보였다.
“혹여 조카들에게 믿음을 주었거든 오늘부로 마음을 돌려먹길 부탁하오. 내가 그대를 중용할 생각이니······.”
“······.”
‘상벌이 분명하신 분. 그리고 상을 내리는데 주저함이 없으시구나.’
먼저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상을 주어도 되었을 것이다. 허나 자리를 먼저 주고 이후에 충성을 부탁하고 있었다. 강요가 아닌 부탁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예. 가주님.”
“강 무사를 믿고 지원하겠소. 다만 조카 녀석이 알면 불편할 터이니 가문의 무사들이 온전히 오환검을 익히기 전까진 비밀을 지켜야 할 것이오.”
“예···.”
비연의 말이 여기까지였다면 강여홍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을지언정 돌아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맹주께 보고를 드려야겠지?’
실제로 여전히 맹주 호현을 향한 마음이 남아 있었음이다.
“조만간 삼도상단에서 영단을 하나 빼서 내 드리리다. 무사들의 검술 지도를 맡은 무사가 내공이 부족하면 큰일이지 않겠소.”
“!!”
진호현을 향했던 충성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추우웅! 따르겠습니다!”
‘절대로 보고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했다.
“하하하. 강 무사의 진심이 내게 닿는구려. 이걸 가져가시오.”
강여홍은 가주가 건넨 오환검(五煥劍) 비급을 받아 가주전을 나왔고, 굳은 얼굴로 무사들을 찾아갔다. 강여홍이 셋째 공자의 검술을 지도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높은 직급의 무사들이 많았고, 무사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인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
“강 무사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황 대주님 계신가?”
황종현은 진가장 무사들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니 가주 호위대의 대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바쁘신데···.”
진가장에 부고가 터졌고, 총관과 부총관이 실권을 잃으며 외부에 망자의 부고를 전하는 것도 그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안 계시면 나중에 다시 오지.”
“안에 계시긴 한데 말이야···. 강 무사가 원로원을 지키지 않았나?”
“안 그래도 그 일로 가주님을 뵙고 나오는 길이야. 황 대주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네.”
“······.”
그 일로 가주에게 문책을 받지 않았다면 황종현에게도 해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뵐 수는 있을 것이나···.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좋은 일이니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되네.”
“좋은 일?”
전대의 태상가주가 죽은 상황에서 좋은 일이 생길일이 없었다.
“뭔데 그러나?”
“그건···.”
강여홍은 품에 들어 있는 오환검(五煥劍)의 비급을 떠올렸지만, 벌써부터 입에 올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일이 아니던가.
“황 대주께 보고 드리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네.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 그런다네.”
“···누가 뭐라든가. 들어가 보시게.”
강여홍은 급하게 서찰을 휘갈겨 쓰는 황종현을 볼 수 있었다.
“대주님을 뵙습니다.”
“뭔가!”
황종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원로원을 경계하던 강여홍입니다. 황 대주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강여홍이 이름을 밝히자 황종현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밤사이 태상가주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들었다. 원로원에 평소와 다른 일은 없었는가?”
“예. 이미 가주님을 뵙고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평소와 같은 고요한 밤이었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내게 왜 왔는가?”
황종현은 다시 붓을 들어 서찰을 적어 내렸다. 여러 곳에 보내자면 시간이 촉박했다.
“가주전에 들었다가 특별히 제가 지시받은 일이 있어서 보고 드리고자 합니다.”
“무슨 지시인가?”
“가주께서 내려주신 비급을 익힌 다음 진가장의 무사들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네가 익혀서 무사들에게 전파하라고?”
“예.”
“흥. 어디서 허접한 무공비급이라도 가져오셨던가?”
“···황 대주께서도 아시는 무공비급입니다.”
“내가 아는 무공비급이라···. 화산은 것은 아닐 것이고···.”
“오환검(五煥劍)입니다.”
“오환검. 오환검···.”
우뚝.
대화하며 계속 서찰을 작성하던 황종현은 붓을 멈췄고, 종이를 검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기껏 작성하던 서찰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했다.
“오, 오환검?”
찌익.
검게 물들던 종이는 황종현의 붓이 우악스럽게 옆으로 향하며 찢어져 버렸지만,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환검!!!”
마치 비명처럼 오환검을 외치는 황종현에게 강여홍은 품에서 꺼내 비급을 내밀었다.
“예. 황 대주님. 가주께서 오환검을 내리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황종현은 강여홍이 내민 비급을 벌벌 떨며 두 손으로 받았다.
“이, 이것이 오환검···.”
“맹주님이 익히고 계신 바로 그 오환검이지요.”
“흐흡!”
“가주께서는 오환검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문제는 없을까?”
강여홍의 말대로 불과 얼마 전까지 진가장의 공동가주였던 맹주와 진호중이 익히던 무공이기 때문이다.
“진가장의 가주는 맹주님이 아니라···.”
“옥비연···. 아니 진비연 가주님이시지.”
“예. 진가장의 가주님이 결정하신 일에 맹주가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가주님은 사사로이 맹주의 숙부가 아니겠습니까. 가문의 어른이시지요.”
“큭. 막내 공자가 제대로 된 가주님을 모셔온다고 하더니 정말 대단한 분이야.”
“가주께서 진가장의 채무를 책임질 삼도상단의 상단주임도 아실 것입니다.”
“알지. 알다마다.”
“그럼 삼도상단이 취급하는 물품도 아시겠지요?”
“물품?”
“삼도상단은 무림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단을 취급하지요.”
“여, 영단!”
“가주께서 제게 영단을 내린다 하셨습니다.”
“허읍!”
“당장은 제게만 내린다 하셨지만, 후일 황 대주를 비롯한 금급 무사들에게도 내리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황금전장과 삼도상단만이 무림에 영단을 공급하고 있으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요.”
황종현의 입이 좌우로 길게 찢어졌고, 그 끝이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황 대주님. 앞으로 이 비급을 익히고 무사들에게 전달하는 중임을 맡았기에 보고 드립니다. 또한 대주님의 허락을 구합니다.”
“푸하하. 허락이라니! 얼른 익혀! 얼른 익혀서 무사들을 지도해! 무사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해야 영단을 내리겠다고 결정하지 않으시겠나!”
“옙! 대주님!”
이후 누구도 진무검의 사인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진무검의 죽음은 그저 노환에 의한 자연사로 결론 내려졌다. 남궁가와 제갈가를 비롯한 무림의 방파들도 새로운 진가장의 가주를 환영하는데 관심이 있었을 뿐, 누구도 진무검의 죽음에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무관심은 그가 살아온 삶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
남궁곤은 진가장에서 도착한 서찰을 읽고 있었다.
“허···.”
놀람도 잠시였다. 남궁곤의 입이 호선을 그리며 진한 미소를 보였다.
“우리 사위가 진씨 세가의 가주가 되었다니···. 흐허허.”
“감축 드립니다. 가주님. 세가의 가주를 사위로 맞으시다니요.”
“총관. 가서 소선이를 데려와.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전해주어야겠어.”
“예이~”
.
.
.
제갈가에도 같은 서찰이 전해졌다.
“푸흡!”
차를 마시며 서찰을 읽던 제갈진은 차를 뿜어내며 놀라움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커컥.”
내뿜은 찻물로 엉망이 되긴 했지만, 서찰의 내용은 여전했다.
“옥 공자가 진씨 세가의 가주가 되었어?!”
제갈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가서 미를 불러왓!!”
당장 진가장으로 가야 했다.
두 가문이 동시에 움직였다.
***
당연히 무림맹에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부들부들.
서찰을 읽는 호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삼도상단의 상단주 옥비연이 조부의 숨겨진 아들이었다고? 말도 안 돼!’
이를 다시 확인하고 싶어도 불가능한일이 되어 버렸다. 옥비연의 가주 등극과 함께 진무검의 죽음도 같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그 새끼는 왜 내게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무엇보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과 연관 지을 정보가 부족했다.
막내 진호충이 가주직을 받겠다며 자신을 찍어 눌렀는데, 결과적으로 막내가 원한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체 가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야! 호중이 놈은 대체 뭘 하고 있지?’
벌떡.
진호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비하라. 진가장으로 갈 것이다!”
“예! 맹주님!”
맹주의 조부가 죽었으니 당연히 가야할 일이었다.
***
무림의 세력들이 삼도상단의 상단주이자 진가장의 가주가 된 비연을 만나기 위해 무림이 움직이고 있었고, 호충은 다가올 혼란을 피해 먼저 움직였다.
서안 하오문 본단에 들러 잠시 머물며 하오문의 업무를 본 다음 다시 길을 떠났다. 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 우뚝 서있는 높은 산자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휴. 여긴 예나 지금이나···. 멋있네.”
웅장한 산세는 산에 오르려는 이들에게 절로 경외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저희는 근방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호충이 향하는 곳은 흑림방 호위대가 끝까지 따라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 객잔에 가서 쉬고 있어. 가서 오랜만에 어른들께 인사하고 내려올 테니까.”
“그럼 저도 호위대와···.”
이번에도 여정을 함께하는 유도영이 흑림방 호위대에 섞여 쉬려고 하자 호충이 눈을 부라렸다.
“유 단주는 같이 가지? 산에 오르면 경공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
“···저는 하오문의 정보단주입니다만? 지금은 그다지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진가장은 저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냈기에 저를 알아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끄응.”
“화산파는 문주님을 월하검문의 후계자로 알고계신데 제가 따를 수야 없지요.”
호충이 가려는 곳이 바로 화산파이기 때문이다.
“그럼 가져온 영단이나 내놔.”
화산에 빈손으로 갈 수 없기에 미리 준비한 것이다.
“십 년짜리로 챙겨왔습니다.”
“그거면 됐지 뭘.”
유도영은 자기병을 꺼내며 물었다.
“몇 개나 빼 드릴까요?”
“몇 개? 몇 개는 무슨···.”
호충은 유도영의 손에 들린 자기병을 자기 손으로 옮겨왔다.
“이제 가.”
“······.”
호충은 무림에서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는 영단을 챙겨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가는 화산이라 호충은 멋지게 비단 무복까지 차려입고 있었다. 월하검문의 후계자라는 이름이 있는데 아무렇게나 입고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자연이로구나.”
호충은 과거 화산을 오르던 때와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었다. 호충의 무위가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올라간 무위에 비해 호충의 외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만큼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세상을 달관한 도인의 풍모가 언뜻 비추는 것이다.
“정녕 영산(靈山)이로다. 이러니 산의 정기(精氣)를 이어받은 화산파가 뛰어날 수밖에.”
호충은 화산파에 검을 익힌 고수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 산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산의 정기(精氣)를 쪽쪽 빨아먹으니···.”
누대에 걸쳐 검공의 고수를 배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오문도 이사 갈 영산(靈山)을 찾아봐야 하려나?”
호충은 대자연을 만끽하여 정상을 향해 나아갔고, 오래지 않아 화산파 대문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승 무공을 허락 받아서 그런가? 부산하네.”
화산파는 남궁, 제갈과 더불어 황궁에서 처음으로 상승 무공을 허락받은 문파였다. 숨어서 매화검법을 익히지 않아도 되었기에 많은 이들이 화산파로 오고 있었다. 화산의 제자가 되기 위함도 있었고, 상승 무공을 보유한 화산파와 연줄을 맺기 위한 전장과 상단의 발걸음도 이어지고 있었다.
“킁킁.”
화산파에서 매화향이 풍겨오는 것 같았다.
“좋구나. 흐흐.”
호충이 대문으로 다가가자 문을 지키던 화산의 두 제자가 나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호충은 둘을 알아보고 목소리를 깔며 답했다.
“흠흠···. 장문인을 뵈러 왔습니다.”
“······.”
“누구라고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호충의 행색을 살피던 화산의 제자가 다시 물었다. 비단 옷을 차려입은 상대가 범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야! 너희는 내 얼굴도 못 알아보냐? 나 몰라?”
“······.”
“······.”
화산의 두 제자는 호충의 얼굴을 보고서야 눈을 번쩍 떴다.
“어!”
“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