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의 비급
***
호충은 타박을 아끼지 않았다.
“기억력이 붕어야? 난 단숨에 알아봤는데 말이야. 잘 있었냐? 동소진, 임관수.”
백준을 통해 소개 받았던 삼대제자 동기들이었다.
“와아. 얘 옷 입은 것 좀 봐라. 무림 방파의 후계자가 되었다더니···.”
“잘 사는 놈은 끝까지 운이 좋다니까. 어휴. 비단이 어쩜 이렇게 부드럽다니.”
둘은 호충이 입은 화려한 비단 무복에 크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야. 내 옷한테만 인사할래? 얼마 만에 봤는데 나한테 인사가 없어? 이것들이···.”
“큭큭. 반갑다. 호충.”
“그래. 잘 왔다. 네 덕분에 그동안 우리만 아주 죽어났다.”
“문이나 열지? 장문인께 인사드리고 도장들께도 인사드리자면 바쁘다.”
“대사형도 꼭 만나야 한다. 알았지?”
“···아. 백준 대사형은 잘 있지?”
“화산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귀한 몸이다.”
“오오.”
호충은 둘을 뒤로하고 화산의 대문의 넘었다.
“위치는 알지?”
“난 너희처럼 붕어가 아니라서 말이야.”
둘은 멀어지는 호충을 보며 대화했다.
“저 새끼는 밉게 말해도 밉지가 않아.”
“녀석 덕분에 포식 했잖냐. 그때 먹은 고기가 아직도 우리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 아닐까?”
호충이 백준에게 남기고 간 주머니가 제 역할을 한 것이다.
“그것보단 현인 사숙조가 매번 호충이 얘기를 해서 그럴지도 몰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긴 하지. 난 가끔 저 놈이 아직도 우리 삼대제자 같다니까?”
***
호충은 장문인의 처소에 가까이 가서 많은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오. 그 사이 고수들이 상당히 많아졌네?’
화산파 장문인을 지키는 화산의 고수들이 주변 곳곳에 숨어 있었다.
척.
호충은 장문인의 처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포권지례를 보였다.
“월하검문의 진호충. 대화산파 장문인께 뵙기를 청하나이다.”
호충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들은 바로 장문인의 처소를 은밀하게 감시하던 화산의 고수들이었다.
타닥. 탁.
그들이 은신을 풀고 호충 앞에 내려서고 있었다.
“호충아!”
“너였구나! 너였어!”
“네가 아닌 줄 알았다. 그 사이 더 헌앙해졌구나! 몰라봤지 않느냐!”
“현인과 현진에게 어서 알려야겠어.”
장문인의 처소를 지키던 현자배의 고수들이었다. 현자배 아래인 백자배도 몇몇이 나와 호충을 향해 포권했고, 호충의 포권이 다시 이들을 향했다.
“진 공자를 뵈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벌컥.
청진을 이어 화산의 장문인이 된 무환이 문을 열고 나왔다.
“허! 장문인을 지킨다던 녀석들이 은신을 풀어?”
“······.”
“······.”
“······.”
“······.”
현자배의 도장들이 무환의 눈치를 보며 다시 은신에 돌입했지만, 무환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쯧. 아무리 진 공자가 반가워도 그렇지···.”
“반갑습니다. 장문인.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무환도 현자배를 더 탓하지 않았다. 그도 현자배 만큼이나 호충이 반가웠기 때문이다.
“진 공자는 어서 안 들어오고 뭐하누?”
“흐흐 예.”
무환을 따라 장문인의 처소에 들어간 호충은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진가장이 아닌 여기가 내 고향이었구나.’
좋은 기억은 모두 이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자신을 환영하고 있었다.
‘좋은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호충의 기분이 좋은 것을 알았는지 무환 장문인이 물었다.
“진 공자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가?”
“하하. 죄송합니다. 장문인.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라···.”
“송 문주께 후계자를 보내라고 한 지가 언제인데···. 다 늦게 와 놓고 고향?”
“죄송합니다. 장문인. 배움이 부족하여 쉬이 밖으로 나돌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잘 왔네. 잘 왔어.”
“흐흐.”
끼익.
호충은 뒤에서 차를 가져온 이의 기운을 느끼며 누군지 돌아보았고, 더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현인 도장!”
“왔으면 연무장으로 먼저 올 것이지. 에잉.”
현인이 장문인이 부탁한 차를 직접 들고 온 것이다.
“어이쿠. 연무각주가 제자들을 안 가르치고 왜 손님께 차를 나르느냐?”
“···연무각은 이대제자들에게 맡겨 두었습니다.”
호충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삼대제자들의 수련을 이대제자에게 맡기고 단숨에 뛰어온 것이다.
“화산의 은인이 왔는데 제가 인사를 올려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허! 핑계는···.”
“그보다 밖에 현진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 불러주시지요. 장문인.”
“집법당주까지?”
“녀석이 차를 나른다는 것을 제가 선수 치는 바람에···.”
“···들어오라고 해!”
“옙!”
곧 장문인의 허락을 받은 현진이 들어왔고, 호충을 마주할 수 있었다.
“···호충아.”
“현진 도장.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
현진은 말을 잊지 못하고 호충을 빤히 보기만 했다. 그의 모습에 호충의 마음도 울렁거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저는···. 잘 지냈습니다. 스승님도 잘 해주시고 무공을 익히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습니다.”
괜히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이 그리웠던 모양입니다. 오늘 와서야 왜 이리 늦게 왔는지 후회가 들 정도입니다.”
“잘 왔다.”
담백한 말 속에 들어있는 깊은 정이 호충의 마음에 닿았다.
“······.”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교환하는 눈빛만으로 서로를 향한 마음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
긴 침묵은 무환 장문인의 말로 끝낼 수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그간의 일이나 더 들어보자.”
“이미 다 듣지 않으셨습니까?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을 터인데···.”
“삼도상단과 월하검문. 그리고 너.”
“······.”
무환 장문인은 송 영감을 월하검문의 문주 이전에 삼도상단의 상단주로 만났고, 삼도상단의 후계자 옥비연과 월하검문의 후계자 진호충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자장 진씨 세가에서 서찰이 도착해서 곧 가려던 차였다. 삼도상단의 상단주가 진씨 세가의 피를 이었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이냐? 그리고 너는 또 어떻게 된 것이고?”
무환 장문인 입장에선 상당히 복잡한 일이었다.
삼도상단의 후계자라고만 생각했던 옥비연이 사실 진비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삼도상단의 주인이자 월하검문의 문주인 송동석은 진씨 세가의 후계자 둘을 휘하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삼도상단의 후계자가 진가장의 가주가 되었으니, 이제 월하검문의 문주는 세가의 가주를 손자로 두게 되었다. 무엇보다 잠시 가주가 되었다가 가주직을 넘겨버렸다는 점이 기이했다. 아무리 전대 가주의 형제라지만 가주 자리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허.”
“그래서 저를 제자로 들이실 때 하늘의 연이 닿았다고 하셨지요. 나중에서야 그 말씀을 하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
“가문이 어렵다는 소식에 제가 먼저 가문으로 달려가 가주 자리를 차지했고, 숙부님께 다시 가주직을 넘겨 드렸습니다. 진씨 가문은 앞으로 숙부님에 의해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제가 가주자리를 고집해봤자, 진가장엔 도움이 될 것이 없었습니다.”
“너는 욕심도 없구나.”
“제게 가주자리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가의 가주와 비교도 안 될 하오문이 있었고, 친부 진휘평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호충이다. 고작 진가장에 발이 묶일 수 있겠는가.
무환 장문인 곁에서 대화를 듣던 현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장문인. 그럼 이제 호충이 가문에 얽매일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럼 화산의 제자로 들여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구나. 이미 호충은 월하검문의 제자가 되었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제자다.”
“송 문주님께 잘 말씀드리면···.”
“어허.”
현진도 현인을 거들며 나섰다.
“장문인. 화산파는 황궁으로부터 상승 무공을 허락받았습니다. 호충이 직접 화산에 돌려준 매화검법과 개화검결이 존재하고 있지요. 현 무림에 이와 같이 뛰어난 상승 무공을 보유한 문파가 어디 있겠습니까. 호충과 같은 기재가 화산의 상승 무공을 익히지 않는 것은 무림의 크나큰 손실입니다.”
“···너희가 월하답보의 진정한 힘을 몰라서 그러는 구나.”
무환은 월하검문의 문주가 직접 시연한 월하답보의 후반부 초식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월하검문의 검공은···. 결코 화산파의 검공에 밀리지 않는다.”
말로는 밀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화검법을 익힌 화산의 제자가 월하답보를 익힌 호충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림없었다.
‘백 대 일이라면 모를까···.’
매화검수 백 명과 월하답보를 익힌 호충 하나를 붙여야 그나마 상대가 가능할까 싶었다. 그것도 화산의 매화검수가 매화검법을 극성으로 익혔을 때로 가정해야 했고, 호충은 대성하지 않았다는 가정이었다.
‘호충이는 월하답보를 어디까지 익혔을꼬?’
하지만 현인은 인정할 수 없었다.
“밀리지 않다니요. 화산파의 매화검법은 무림 최고의 검공입니다. 물론 송 문주님의 무위가 대단하긴 했지만······.”
무환 장문인보다 먼저 월하답보의 검식을 본 사람이 현인과 현진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본 것은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날아가 바위를 부수는 것이 전부였다. 화산의 매화검법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 정도까지 익히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월하검문은 문도가 거의 없으니 호충이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여긴 호충과 비슷한 나이대의 삼대 제자들이 가득합니다.”
“······.”
현진도 마찬가지였다.
“호충이 매화검법을 익히고 매화검수가 된다면 얼마나 대단한 성과를 보일지···. 호충이만큼 뛰어난 아이가 삼대제자 사이에서 수련한다면 다른 녀석들도 크게 자극이 될 터인데···.”
“······에효.”
무환은 답답한 마음에 고개만 젓고 있었다.
“두 분 도장님은 여전하십니다. 하하하.”
호충은 여전히 자신을 화산파로 이끌고자하는 둘의 마음이 좋게만 보였다.
무환은 호충이 입을 열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천년기재 진 공자는 월하답보를 어디까지 익혔을꼬?”
“하하하. 아직도 그걸 기억하십니까.”
호충은 송 영감이 월하답보를 접하기 전부터 월하답보를 극성으로 익힌 상태였다.
“월하검문의 후계자 진호충. 월하답보를 극성으로 익혀 스승님께 무림 출도를 허락받았습니다.”
‘벌써 극성까지 익히다니···. 가히 천년기재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아이로다.’
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인과 현진을 향해 말했다.
“···너희는 아직도 미련이 남느냐?”
“······.”
“······.”
현인과 현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벌써 일문의 무공을 극성까지 익혔는데 어떻게 제자를 내어달라 할 수 있겠는가.
현인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호충을 나무랐다.
“호충이 너는 뭘 그렇게 빨리 익히고 그래! 적당히 놀면서 기초나 다지고 있을 것이지.”
“흐흐. 삼도상단이 뭘 취급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내공이 더해지니 문파의 무공을 익히는데 거침이 없었지요.”
“···!”
“···!”
현인과 현진은 삼도상단이 취급하는 무림의 보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영단!’
‘영단!’
“안 그래도 화산에 드리려고 빼온 참입니다. 장문인 제가 드리는 성의이니 받아주십시오.”
호충은 품에서 자기병 하나를 꺼냈다. 보통 나무 상자에 넣어 하나씩 판매하는 물건이지만, 물건을 직접 생산하는 하오문이라 대량으로 가지고 다닌 것이다.
“···상자가 아니야?”
“상자에 넣으면 부피가 너무 커서 한 곳에 담았습니다.”
“어디···.”
퐁!
무환이 자기병을 막고 있던 뚜껑을 열자 청아한 향이 장문인의 처소에 가득해졌다.
“흐흡. 이게 대체 몇 개야?”
자기병 내부에 가득 쌓인 영단이 보인 것이다.
“아마 한 이십 개쯤 될 겁니다.”
영단이 무림에 선을 보인 이후 금 이천오백 냥까지 올라갔던 영단이었지만, 지금은 이천 냥으로 떨어져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 영단이 이십 개나 들어있었으니···.
“그, 그럼···. 사만 냥?”
“화산파에서 매화검수를 많이 키워내자면 영단은 필수일 것입니다.”
무인의 성장에 영단의 필요성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호충아!”
“저는 이미 충분히 먹어서 더는 필요가 없습니다.”
무환은 이미 사종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송 문주를 생각했음이다.
“네가 이러면 내가 송 문주를 어찌 보겠느냐.”
“아휴. 괜찮습니다.”
“이를 어찌할꼬.”
“스승님도 다 아십니다. 제가 화산파에서 기초를 닦았음을 아시니 영단을 내어주셨지요.”
“어허.”
그래도 선물을 불편해하는 무환 장문인에 호충은 더 불편할 물건을 꺼냈다.
“스승님께서 이건 제가 직접 전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어 가져왔습니다.”
“······.”
호충이 꺼낸 거무튀튀한 표지의 책자는 상당히 지저분했고, 언뜻 보랏빛이 감도는 두터운 종이는 손을 대기에도 꺼림칙했다.
“안 열어보십니까?”
“진 공자. 이건 뭔가?”
“또 다른 화산의 보물이지요. 어렵게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화산의 보물?”
현인과 현진도 크게 관심을 보였다.
“그, 그럼 또?”
“화산의 무공 비급이라는 말이냐?”
호충은 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무환 장문인은 방금까지 더러워 만지고 싶지 않았던 책자에 떨리는 손을 가져갔다.
스륵.
제목도 읽을 수 없는 겉장을 넘기니 그제야 글귀가 보였다.
[대화산파의 장문인이 아니면 서책을 더 이상 넘기지 말지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