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와 호구
***
무태 장로가 일어나 일장 연설을 늘어놨다.
“자하신공이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는 진 공자의 말에 지극히 동감하는 바이고, 월하검문과 화산파가 형제로 지내자는 제안도 환영합니다. 하지만! 고작 매화검법을 익히도록 허락하는 정도로 이 은혜를 갚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진 공자는 화산의 은인패를 갖고 있으니 그냥 매화검법을 익히게 해달라고 청했어도 들어주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화산의 무자배 원로들과 현자배 각주와 당주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하고 있었다.
“은인패의 가치는 매화검법에 상응하고도 남아.”
“맞아. 게다가 가져온 진 공자가 달라면 내줘야 옳지.”
“그것도 아예 밖으로 가져간다는 것도 아니고 혼자 익힌다는데···.”
“그래서?”
“장문인께서 연무각주 현인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뭐, 뭐라? 너도 현인에게 물들었더냐!”
현인이 청했던 것은 호충이 자하신공을 익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하신공은 장문인만 익힐 수 있었기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화산의 자하신공은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될 화산의 지고한 보물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익히기 쉽지 않음도 전해지고 있지요. 단숨에 개화검결을 익힌 진 공자라면 자하신공을 금방 익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익히면! 진 공자를 화산의 장문인으로 만들기라도 할 생각인가!”
“진 공자는 화산의 은인이라 칭하기도 부족합니다. 진 공자에게 자하신공을 내리고 명예 장문인으로 삼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진 공자가 화산의 매화검법을 쓰기위해 속가제자를 자청했으나, 속가제자가 아닌 명예 장문인이 더 확실한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명예 장문인?”
“말 그대로 이름만 주는 것입니다.”
이름뿐이라지만, 그 이름은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명예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어도 화산파의 장문인인 것이다.
“다만 자하신공과 매화검법을 얻었으니, 훗날 진 공자가 무림의 천하제일인이 되어도 화산을 아껴주겠지요.”
“···당대 천하제일인!”
‘옳은 말이야. 진 공자는 무조건 당대의 천하제일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무환은 과거 호충이 보인 개화검결과 월하검문의 문주가 보여주었던 월하답보를 떠올렸다. 이미 월하답보를 극성으로 익혔다고 했으니, 당장 무림 대회전이 벌어져도 호충을 상대할 이가 없을 것이다.
“어찌 여기까지 생각했을꼬. 진 공자에게 명예 장문인 자리를 내주면 천하제일인의 명성을 월하검문과 화산파가 공유할 수 있겠구나. 이것이 네가 바라는 것이 맞느냐?”
“···부끄럽습니다.”
당장이 아니라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명예 장문인을 제안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화산에 조금의 손해도 없이 이익만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매화검법으론 부족하겠지. 자하신공 정도는 되어야···.”
“당대 천하제일인이 익힌 무공에 화산의 것이 없으면 아쉽지요. 하지만 매화검법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명예 장문인으로 삼으시며 자하신공을 내리셔야 합니다. 이렇게 처리하시면 장문인만 익힌다는 자하신공의 원칙에 위배되지도 않지요. 또한 익히기 어려운 자하신공이 실전될 위험도 분산할 수 있습니다.”
무환 장문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 또한 무태 사제의 뜻을 충분히 공감하는 바···.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과 자하신공(紫霞神功)을 진 공자에게 내리고 화산파의 명예 장문인으로 삼겠다. 이에 반대하는 화산의 제자가 있는가?”
““장문인 뜻대로 하소서.””
호충이 없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무태 장로는 자하신공(紫霞神功)을 진 공자에게 전하라.”
“예! 장문인!”
***
회의장을 나선 현인과 현진은 호충을 화산의 장경각으로 데려갔다. 호충을 자리에 앉힌 현인은 얼른 책장 사이로 들어가 비급 하나를 빼왔다.
“여기 네가 가져온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다.”
“개화검결도 다시 가져다 줘야지 이 사람아.”
“아차차. 내 정신 좀 보게.”
현인은 얼른 개화검결도 가져다가 호충 앞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읽어봐.”
“예.”
호충은 개화검결을 한 손으로 들고 팔랑팔랑 넘겼다.
읽는 것이 아니라 몇 장이나 되는지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끝.”
“···지금 뭐하는···.”
“개화검결 다 봤습니다.”
“···뭐 이미 전에 익히긴 했으니까.”
이미 전에 한 번 보고 익혔으니, 안 봐도 상관없다고 여긴 것이다.
턱.
하지만 호충은 매화검법도 같은 방식으로 한장 한장 빠르게 넘기고 내려놨다.
“끝.”
“······.”
“······.”
“이제 나가죠. 여긴 너무 답답하네요.”
“···다 봤어?”
“설마···.”
매화검법은 읽는다고 익힐 수도 없지만, 방금 호충이 보인 모습은 읽기만 했다고 보기에도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호충아. 아니지?”
“매화검법이 그렇게 쉬울 리가···.”
“화산파에서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배우는 배분이 이대제자였던가요?”
“···그렇지. 현자배도 익히긴 하지만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이대제자들이다. 아직 삼대제자는 개화검결까지야.”
“어휴. 백준 녀석은 아직 손도 못 댔겠네요.”
“대제자는 예외지. 녀석은 한참 전에 개화검결을 끝내고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에 입문했다.”
“오오.”
호충은 백준이 화산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사이 상당히 익힌 모양이네?’
현인은 호충이 계속 딴 소리를 하자 의심하며 말했다.
“너 그냥 읽는 척만 한 거지?”
현인의 말에 현진도 맞장구쳤다.
“···그렇구나. 네 녀석이 매화검법을 익히겠다고 한 것은 핑계에 불과했어! 자하신공의 대가를 받았다는 핑계 말이다!”
“아니거든요? 다 익혔거든요?”
“하!”
“무슨 수로 상승 검법인 매화검법을···.”
“그럼 보세요.”
호충의 품에서 빠져나온 짧은 칼이 허공을 수놓았다.
휘리릭. 파라라락.
짧은 칼의 궤적에 붉은 매화가 한 송이 한 송이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화산의 쾌와 환을 완벽하게 접목해 그려낸 매화였다.
“······.”
“······.”
“매화검법이 개화검결의 상위 검공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화산의 매화검법을 깊이 익힐 필요는 없잖아요. 그저 양문파가 무공을 교류했다는 흔적이면 충분하죠.”
호충이 너무도 당연히 생각한 일에 문제가 있었다.
“···깊이 익히지 않으면 매화를 못 피우는데?”
“매화는 어찌 그리 선명하게 피워낸 것이야? 쾌와 환 중에 어디에 더 중심을 뒀지? 그리고 화산의 내공은? 어째서 네가 피워낸 매화가 더 진한 향을 풍기는 것이냐?”
“어···.”
호충이 답하지 못하는 동안 현진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칼은 대체 뭐야! 그따위 칼로 매화를 피우다니! 그건 대화산의 매화검법에 대한 모독이야!”
“아···.”
호충은 회칼을 얼른 품으로 가져갔다.
“이게 손에 익다보니···.”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 아냐?”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아, 아니 그건···.”
“현진의 의심에 나도 공감한다. 지금 비급을 읽었는데, 어떻게 곧장 매화를 피워내겠느냐!”
“······.”
호충이 현인과 현진의 압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화산 대회합을 마친 무태가 이들을 찾아왔다.
“진 공자.”
“어? 무태 장로님.”
호충과 안면이 있었다. 자장에서 서안으로 갈 때 무성을 비롯한 무자배 원로들과 마주쳤고 그때 무태 장로와 만났기 때문이다.
“이걸 받으십시오.”
무태는 자하신공(紫霞神功)을 두 손으로 내밀고 있었다.
“어···. 전 이거 읽으면 안 되는데···.”
“보십시오.”
“보기야 봤죠.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몰라서 보기야 했는데···. 그냥 글만 읽었어요.”
“장문인께서 진 공자가 익히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
“오오! 역시 장문인!”
현인은 자신의 청을 들어주었다 생각한 것이다.
“흠···. 이건 쉽지 않겠지.”
현진도 호충이 자하신공을 보는 것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이걸 보고 선보여야 매화검법을 먼저 익혔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겠어.’
“······.”
호충은 꺼림칙한 얼굴로 자하신공을 받았고, 조심스럽게 한장 한장 넘기며 읽었다. 그래봤자 넘기는 속도만 조금 더뎠을 뿐 매화검법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앉지도 않고 일어선 채로 대충 읽고 있었다.
“···다 봤습니다. 이제 가져가세요.”
“······.”
“······.”
“······.”
“화산의 보물을 이렇게 막 들고 다니시면 안 됩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꽁꽁 숨겨두셔야죠.”
무태 장로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할 때 현인과 현진이 나서서 물었다.
“이것도 바로 시연을 보여준다면 네가 매화검법을 오늘 익혔다는 것을 믿지.”
“나도 마찬가지다.”
“하아. 저는 영단을 수시로 먹어서 내공이 부족하지 않아요. 익히기만 하면 바로 쓸 수 있다고요.”
얼마 전 신화경 끝자락에서 현경으로 올라섰기에 서로 다른 내가기공의 충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깨달음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자하신공의 운용이···.’
호충은 방금 읽었던 자하신공의 구결을 따라 내공을 돌리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호충이 자하신공을 운용하자 호충의 등 뒤로 무시무시한 자색 기운이 뭉글뭉글 피어나기 시작했다.
“!”
“!”
“!”
호충의 몸에 이글거리는 자하신공의 보랏빛 기운은 의념이 가는 방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자색 기운은 오른쪽 손에 집중되었다가, 다시 왼쪽 손으로 옮겨갔고, 허공에 손을 휘젓자 그 사이에서 둥글게 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보랏빛 기운이 허공에서 회전하는 모습은 모두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화려한 색도 색이지만 그 안에 거대하고 강력한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파앗.
호충이 손을 털어내자 투명한 자색 구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
“······.”
“······.”
“방금 보여드린 것은 자하신공(紫霞神功) 초반부인 자하강기(紫霞鋼氣)의 일부입니다. 나머지는 파괴력이 너무 과한지라 여기서 보이기엔 좀···.”
“······.”
“······.”
“······.”
셋은 방금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부비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무태 장로였다.
“······화산의 장문인께서 진 공자에게 자하신공(紫霞神功)을 내리시며 한 가지 직분을 내리셨습니다. 이미 자하신공을 익히셨으니 무를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뭔가 코가 꿰이는 기분이긴 한데···. 말씀하세요.”
“화산은 월하검문의 진호충 공자를 화산의 명예 장문인으로 칭하며, 모든 화산의 제자들은 진 공자를 장문인과 같은 배분으로 여기어 공경을 표할 것입니다.”
“···코 꿰인 거 맞네.”
그저 속가제자로 인정해 달라고 했는데, 명예 장문인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게다가 무태 장로의 입에서 나온 명예 장문인은 바로 그 즉시 효력을 발휘하는 모양이다.
“현인이 화산의 명예 장문인을 뵈옵니다.”
“현진이 화산의 명예 장문인을 뵈옵니다.”
“무태가 화산의 명예 장문인을 뵈옵니다.”
“···갑자기 이러기 있어요? 나 그냥 집에 가요?”
“명예 장문인의 존재는 화산의 모든 제자에게 공표될 것이고, 제자들은 존장의 예를 지키지 않으면 파문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
“부디 명예 장문인께서 이해해주십시오.”
“아니, 선물하러 온 사람한테 왜 이러신 답니까!”
현인과 현진은 명예 장문인의 칭호를 부담스러워하는 호충이 우스워죽을 지경이었다.
“푸흐.”
“크흐흐.”
“지금 이게 웃깁니까? 웃기는 뭘 웃어요!”
“크하하하. 죄송합니다. 명예 장문인. 자꾸 웃음이 나네요. 하하하.”
“푸하하. 우리 장문인께서 선물을 받고 제대로 보답했습니다. 하하하.”
“아놔. 차라리 돈으로 달라고 할 걸 그랬어.”
호구에게 당한 호구의 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