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232)

허락

***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각. 호충은 화산의 여러 계곡 중 가장 기운이 충만한 곳을 찾아 좌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기운이 유형화되어 눈에 보일 정도로 짙은 기운이 가득했다

“흐흡.”

주변을 소용돌이치던 옅은 안개와 같은 기운은 모조리 호충의 코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번쩍.

옷 위로 하얀 밤이슬이 앉아 있었지만, 호충이 눈을 뜨자마자 내부로부터 기운이 폭사되며 젖은 옷이 말라버렸다.

파앙!

“충전 완료.”

호충은 밤사이 백준에게 넘겨준 내공을 이곳에서 다시 보충한 것이다.

“쩝쩝.”

호충은 화산의 기운을 맛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영산은 영산이야. 아주 진하고 달콤하군. 뭔가 오묘한 맛도 있고···. 실로 독특해.”

호충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볍게 발을 굴렀고,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파앗!

.

.

.

호충이 자리를 떠나고 검고 긴 형체의 무언가가 나타났다. 촘촘한 숲을 통과한 햇빛이 검은 비늘에 반사되며 거대한 형체의 꾸물거리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르륵.

어른 몸통만한 굵기의 뱀이 수풀이 움직이며 이동 중이었다. 본래 이곳은 검은 이무기가 똬리를 틀고 영력을 쌓던 곳인 까닭이다.

“시싯. 싯.”

검은 혀를 날름거리며 주변을 탐색하던 거대한 이무기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주변을 계속 돌았다. 가득했던 영기가 온대간대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이이이싯.”

화가 난 듯한 소리를 내던 검은 이무기는 곧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화산에 이곳만 영기가 가득한 것은 아니었기에 다른 곳을 찾아 나선 것이다.

***

호충은 장문인의 처소에서 이별을 고했다.

“며칠 더 머물다가지 않고···.”

“어차피 장문인께서도 진가장으로 간다하셨지 않습니까. 장문인도 안 계신 화산에 제가 오래 머물 필요는 없지요. 그러다가 명예 장문인이 진짜 장문인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무환은 호충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명예 장문인의 직분도 부담스러워한 호충이 화산의 장문인이 되려고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충은 월하검문 문주의 하나뿐인 제자가 아니던가.

“현검 태사조께 말씀 들었네. 백준에게 기연을 베풀었다지?”

“벗의 빠른 정진이 기꺼워 작은 호의를 보인 것뿐입니다.”

“명예 장문인이 화산에 보인 호의를 모두 더하면 화산파의 지분 팔(八)할은 될 것이야.”

“오오. 그렇게나 후하게 쳐주십니까? 하하하.”

“당연하지 않겠나.”

개화검결, 매화검법에 이어 영단과 자하신공을 선물한 호충이다.

개화검결과 매화검법은 화산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무공 비급이었다. 또한 여기에 자하신공을 더했으니 화산의 중요 무공 전부가 호충의 손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그에 더해 화산을 향한 지극한 호충의 마음까지 생각하면 팔(八)할이 아니라 구(九)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명예 장문인이면 싸게 먹혔네요?”

“하하하. 그렇지. 화산이 제법 머리를 잘 쓰지 않았는가?”

“장문인께서는 앞으로도 지혜롭게 화산을 이끌어 가실 것 같습니다. 마음이 놓입니다.”

“······.”

무환은 여전히 욕심 한 자락도 보이지 않는 호충의 태도에 절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진짜 작별입니다. 저는 세상을 주유하며 무림의 정의를 펼쳐 보겠습니다.”

“진 공자는 분명 무림의 정의가 될 것이네.”

그리곤 작은 탁자 밑에서 목제 상자 하나와 봉투를 꺼냈다.

“그건 뭡니까?”

“상자에 든 것은 화산의 명예 장문인을 상징하는 패일세. 명색이 장문인이니 장문인패 정도는 있어야하지 않겠나.”

“뭐···. 맞는 말씀이니 받고요. 봉투는요?”

“세상으로 나서는 화산의 명예 장문인께 드리는 작은 노자일세.”

“아휴. 뭘 이런 걸 다. 주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눼눼.”

호충은 단 한 번의 거절도 없이 봉투를 품에 넣었다.

“장문인패를 먼저 가져가야지.”

“헤헤. 깜빡했네요.”

어차피 허울뿐인 장문인이지만, 패를 받으니 진짜 장문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에헴. 이제 “이걸 보아라 내가 화산의 장문인이다!” 해도 되는 겁니까?”

“물론! 관부에서 진 공자의 상승 무공을 트집 잡거든 보여주시게.”

“하하. 제가 딱 원하던 물건이네요.”

‘현경에 오른 그대라면 무림의 절대자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오.’

이미 현검을 통해 호충의 경지를 들은 무환이다.

***

이후 호충은 화산에서 인연을 맺은 현자배와 무자배, 화자배의 제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고, 백준과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별했다.

“······.”

“······.”

서로 말로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호충. 무림에서 너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백준아. 네가 언제 커서 나랑 비등해지겠니. 이번 생은 틀렸으니, 내세에나 노려봐야 할 걸?’

물론 말하지 않았으니 통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

호충은 화산의 정문을 나서고 나서야 봉투를 꺼냈다.

“장문인이 노자를 얼마나 넣으셨을라나? 손이 너무 작은 것은 아니시겠지요?”

호충은 실눈을 뜨며 봉투를 열었고, 그 안에서 전표 몇 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호충의 고개가 봉투와 화산파가 있는 방향을 몇 번 왕복하며 갈팡질팡했다.

“아니 이 사람이···. 손이 왜 이렇게 큰 거야?”

십만 냥짜리 전표가 세 장이나 들었기 때문이다. 삼십만 냥이면 일전에 개화검결과 매화검법을 돌려주었을 때 받았던 이십만 냥보다 더 많은 금액이었다.

“화산 재정이 좀 넉넉해졌다고 이렇게 막 쓰면 어쩝니까? 예?”

그래도 화산의 재정이 넉넉함을 알고 있기에 화산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뭐. 안 그래도 백준 놈 품에 주머니 하나 넣어주고 왔으니 그걸로 퉁 칩시다.”

.

.

.

백준은 나중에서야 자신의 품에 들어 있는 비단 주머니를 발견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전표와 서찰을 확인했다.

[명예 장문인이 각별히 삼대제자를 챙겨준 것이니, 군소리 말고 애들 걷어먹여라. 화산파 명예 장문인 진호충.]

“이 놈은 대체 언제 이걸 내 품에 넣고 간 거야···.”

곧 전표를 확인했는데, 전표에는 백 냥이라고 적힌 황금전장의 전표가 다섯 장이나 들어있었다.

“···돈이 썩어 나냐?”

삼대제자 전부가 앞으로 몇 년은 풍족하게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대체 이걸 다 언제 갚으라고.”

일전에 받았던 것도 갚지 못했는데, 추가로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돈은 나중에라도 갚을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전해준 내공은 갚을 방법조차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

‘결국 반 강제로 자유로워지겠네.’

이러한 마음의 짐은 무공 수련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갚을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 호의는 잊어야 했다.

‘당장은 잊겠다. 하지만 너를 다시 만나면 그땐 내가 너에게 많은 것을 내어줄 것이다.’

.

.

.

백준이 호의를 어찌 갚을지 걱정하는 호충은 이미 많은 것을 받아 화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공짜로 생긴 삼십만 냥을 어디다 쓰지?”

화산에서 받은 삼십만 냥은 거저 생긴 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

호충은 삼십만 냥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자신의 씀씀이를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내가 쓰긴 어디다 써···.”

낭비와는 거리가 먼 자신의 소비 행태가 주르륵 떠오른 것이다. 거액이 생기면 하오문에서 고생하는 문도들을 위해서 쓰기 바빴다. 문도들에게 상급이라며 푹푹 퍼주고 그들이 기꺼워하는 모습에 만족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나다. 내가 남들처럼 살 필요가 있겠는가.”

돈 많은 거부들처럼 살지 않는 자신이 본래의 자신인 것이다.

“남경에서 고생하는 문도들에게 줄 상급으로 님겨해두어야겠어.”

호충은 유도영과 호위대가 기다리는 화산 아래 객잔으로 발을 굴렀다.

타닥. 팟.

호충의 신형이 길게 늘어지다가 어느 순간 바람처럼 사라졌다.

***

전대 가주에 이어 전전대 가주가 죽은 진가장은 익숙하게 조문객을 받고 있었다.

무림의 인사들은 삼도상단의 상단주로 알고 있었던 옥비연이 진가장의 가주로 올라선 것에 놀라워했고 비연은 이미 아는 얼굴들을 맞으며 인사를 주고 받았다.

“허허허. 삼도상단의 상단주께서 진가장의 피를 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도 이를 안지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 가주.”

당세천을 비롯한 무림의 인사들은 이미 옥비연과 안면이 있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옥비연이 삼도상단의 상단주로 올라서며 무림 방파의 수장들을 만나온 까닭이다.

옥비연은 속속 도착하는 조문객들을 맞다가 멀리서 도착한 세가의 조문객을 맞이했다.

“···크흠.”

“남궁가주님!”

비연은 얼른 앞으로 나서서 깊이 허리를 숙이며 포권했다. 앞으로 자신의 장인이 될 남궁가의 가주였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제 가주가 되셨으니 그리 인사하실 것 없소이다.”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삼도상단이 남궁가에 입은 은혜를 갚으려면···.”

“어허. 남궁 세가 또한 삼도상단에 받은 은혜를 갚으라는 뜻으로 들리오?”

짐짓 무게를 잡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비연은 미소로 화답했다.

“하하. 설마 제가 그런 뜻으로 말씀드렸겠습니까.”

남궁곤도 표정을 풀며 미소로 화답했다.

“하하하. 같이 들어갑시다. 가주.”

“가주께서 오실 것 같아 가장 좋은 별채를 남겨 두었습니다.”

새로 단장한 별채는 본래 진가장의 원로원이었다.

“흠흠. 나만 생각해서 준비하진 않았을 것 같소?”

남궁곤은 뒤쪽에서 따르는 딸 소선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

“······.”

비연과 눈을 마주친 소선은 부끄러운 듯이 얼른 고개를 숙였고, 비연의 얼굴엔 미소가 더해졌다.

“조문객을 계속 세워둘 참인가? 따로 만날 사람이 있으면 우리부터 안으로 들여보내고 만나시게.”

“아! 죄송합니다. 가주님. 안으로 드시지요.”

남궁곤은 자신의 말에 바짝 기합이 들어 따르는 옥비연의 태도가 기꺼웠다.

‘허허허. 내 사위가 삼도상단의 상단주이자 무림 세가의 가주라니···.’

하지만 남궁곤의 기쁨은 다음날 도착한 제갈가의 가주로 인해 긴장으로 바뀌었다.

“남궁 가주님. 여기서 또 뵙습니다.”

“제갈 가주···.”

“······.”

“······.”

둘은 이미 자신들의 여식이 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우린 논의가 필요하겠지요?”

“······.”

둘은 진가장의 별채로 걸음을 옮겼고, 거기서 둘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하나만 포기하면 쉬울 일을···.”

“전 같으면 고민이라도 했겠지만, 이젠 아닙니다.”

“난 고민한 역사도 없소.”

남궁곤은 애초부터 무림의 고수이자 상단의 후계자인 옥비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아니면 어디서 그만한 사위를 또 얻을 수 있겠는가.

“제 말을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옥 공자가···. 아니 진 공자가 제갈가에 비급을 가져다주었을 때를 떠올리고 드린 말씀이지요. 저 또한 포기할 수 없습니다.”

“흐음···.”

“이미 제 여식이 마음을 주었는데 어찌 다시 고민할 수 있겠습니까.”

아비로서 자식의 마음이 가는 이를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반대할 이유도 없는 번듯한 사윗감이었다.

“정녕 어려운 일이오. 하필이면···.”

다른 집안이라면 남궁가의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었을 것이나, 상대는 제갈 세가였다. 제갈가와 남궁가는 화산, 월하검문과 더불어 사종(四宗)의 일원이기도 했다.

“전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지 않았습니까.”

“···옥 공자는 잘나도 너무 잘났지.”

“그 잘난 옥 공자가 이젠 진 가주가 되었지요. 용이 날개를 달았습니다. 하늘로 날아가기 전에 붙잡아야 할 때입니다.”

“······.”

제갈진은 비연이 가주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저도 포기할 수 없고, 남궁 가주님도 포기할 수 없으니 방법은 하나입니다. 상단을 운영하던 상방주와 세가의 주인인 가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두 가문의 여식을 한 사람에게 시집보내자는 뜻이었다.

“···그나마 부끄러움을 덜 수 있겠소.”

“제 말이 그것입니다.”

“······.”

“이제 일을 매듭지읍시다. 괜히 시간 끌어봐야 또 다른 문제만 생길 것입니다.”

“후우. 남궁가에 상단 하나가 늘어나나 했더니···.”

“누군 아니랍니까? 제갈가에 삼도상단과 월하검문이 더해졌다면 정파 무림의 지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엔 이리되고 마는군.”

사종을 구성하는 네 무림 방파 중 셋이 혼인을 통하여 다시 강한 결속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또한 청하지 않았음에도 옥비연이 두 여인과의 혼인을 허락받는 순간이었다.

“화산파가 빠졌지만 거긴···.”

“월하검문의 후계자가 화산과 인연이 있다 하지 않습니까.”

“잠시 화산에서 수련했다지만, 그것이 전부라 조금 아쉬울 뿐이오.”

남궁곤의 아쉬움은 곧 도착한 화산파의 장문인 무환을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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