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세월
***
이후 진호현은 진가장 무사들과 함께 돌아온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 소자 어머니께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제가 가문에 더 신경 써야 했건만···.”
“아니다. 나야 잠시 바깥 구경했다 치면 되지.”
자신을 찾으러 온 무사들을 통해 옥비연이 가주가 된 것은 들었으나, 호충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서문희와 자신을 진가장 밖으로 쫓아낸 호충이 어찌 됐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나저나 녀석은 어떻게 처리했느냐?”
또한 맹주인 자신의 아들이 돌아왔으니 호충이 무사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있었다.
‘녀석을 진가장 밖으로 쳐내야 해!’
서문희를 통해 호충이 전대 가주인 진원우의 친아들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녀석은 가문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잘 되었군. 가문의 핏줄도 아닌 녀석이 남아있을 이유가 없지.”
“···가문의 핏줄이 아니라고요?”
“녀석은 전대 가주님의 아들이 아니었어. 나도 둘째의 말을 듣고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
“나도 작은 의심은 있었지만, 정말로 그 놈이 다른 놈의 자식일 줄은 몰랐다. 제 얼굴이 고운 것만 믿고 진가장에 다른 씨앗을 들이다니···. 죽어도 싸지.”
모용소군은 지금도 북궁초연에게 가졌던 악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하!”
‘네 놈이 진씨 가문의 수장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미신을 이유로 가문에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 가문과 연이 없었기에 가주로 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모용소군은 과거 자신이 행했던 일도 말할까 고민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맹주가 되신 아드님이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
“아버지도 알고 계셨을까요?”
“어찌 모르겠느냐? ···본인이 만들지 않은 손을 자신의 손이라고 할 때부터 알지 않았겠느냐. 그 놈도 자신이 진가의 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고 들었다.”
“허! 제대로 농락당한 기분입니다. 감쪽같이 속았습니다.”
형제로 대해준 적도 없는 호현이다.
“나도 속았다. 다음에 녀석을 만나거든 꼭 되갚아주어야 할 것이다.”
“······.”
녀석에게 앙갚음하기 위한 지독한 독분(毒粉)이 지금도 자신의 품에 들어 있었다.
“물론이지요. 꼭 갚아주고 말겠습니다.”
호현은 어미와 가주전으로 향하며 향후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제가 어머니를 모시지요. 저와 함께 사천으로 가서 삽시다.”
“···아드님이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이 어미가 있어야겠지.”
모용소군은 오랜만에 방긋 웃을 수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자신과 함께 살기를 원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앞으로 모용가와 황궁의 연줄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물품이 있습니다. 진가장을 통해 황궁에 납품할 터이니 어머니께서 모용가에 말씀을 해주십시오.”
“···황궁과 모용가의 인연은 가볍지 않다.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음이야. 어차피 진가장과 우리는 연이 없거늘 뭐 하러 위험을 감수하며 일을 진행하겠느냐?”
호현은 누가 들을까 모용소군의 귀에 조그맣게 말했다.
“삼도상단에서 야광주와 수은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상당한 양이라고 합니다.”
“!”
“보주를 납품하면 황실의 태자전하께서 모용가를 얼마나 더 어여삐 보시겠습니까.”
“정녕 야광주가 있다고?”
“예. 삼도상단의 상단주인 숙부가 공언했습니다.”
“호호. 집안의 우환이 떠나니 좋은 일만 생기는구나.”
“흐흐. 호충이 녀석이 우환이라는 뜻이지요?”
“···그야 물론이지.”
모용소군이 속으로 생각했던 우환은 호충이 아니었다. 호충이 남의 집 자식이라도 집안에서 말썽을 부린 일도 없었고, 가주의 자리도 진가장의 핏줄에게 돌려주지 않았겠는가.
‘시아버지야말로 진가장을 좀먹는 진짜 우환이었단 말이다!’
모용소군은 시아버지 진무검이 과거 얼마나 자신의 남편을 두들겨 팼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무검이 죽어서 상을 치르고 있음에도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진무검이 원로원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은 것은 진가장의 발전을 위한 최고의 사건이었다.
“가주라는 놈은 언제까지 그 자리에 둘 생각이더냐?”
“···글쎄요.”
모용소군은 아들이 맹주인 이상 진가장의 가주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는 호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천년만년 무림맹의 맹주자리를 지키겠는가. 숙부가 하오문에 진 부채를 해결하고 진가장의 성세가 돌아오면···. 그땐 숙부를 밀어내고 내가 가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더 두고 봐야겠지요.”
“내가 오늘 가주를 확실히 눌러놓겠다. 어서가자.”
“예. 어머니.”
이때까지만 해도 진호현은 어머니가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다.
.
.
.
둘은 곧 가주전에 들었고, 모용소군은 상복을 입고서도 가문의 일을 살피는 옥비연을 만날 수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빛이 종이를 비췄고, 하얀 종이에 반사된 빛은 은은하게 비연을 돋보이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어두운 가주전에서 홀로 빛을 발하는 용모였다.
“······.”
‘소문이 과장인줄 알았더니···.’
삼도상단의 상단주가 빼어난 용모를 지녔다는 소문이 여인들 사이에 돌았기 때문이다. 삼도상단이 초기에 여성을 위한 화장용품을 주로 취급했기 때문에 삼도상단의 후계자는 여성들 사이에서 각별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가주를 뵈옵니다.”
“아! 처음 뵙습니다. 큰형수님께 이제야 인사 올립니다.”
모용소군은 절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없던 호의까지 샘솟고 있었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진가의 핏줄이 가주에 올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굴러들어온 돌을 반갑게 맞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여 미움을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답니다.”
“설마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진가장이 하는 일에 모용가의 각별한 협조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리 만들 것입니다.”
“아드님께 들으신 모양입니다. 차마 꺼내기 힘든 부탁이었는데, 먼저 말씀해주시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호호. 진가장이 성세를 되찾는 것은 곧 저의 일이기도 하지요.”
“그렇지요. 제가 진가장의 가주가 되었지만, 형수님이야 말로 가문의 가장 웃어른이십니다.”
“가주께서는 염려 놓으세요.”
“저는 형수님만 믿겠습니다.”
“호호호. 그럼요.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
진호현은 방금까지 가주를 눌러놓겠다던 어미의 바뀐 태도에 어처구니없는 얼굴이었다.
‘누르긴 뭘 누릅니까···.’
오히려 어미가 잔뜩 수그리고 숙부를 띄워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나중에나 꺼내야할 모용가의 협조도 미리 다 까발려 버렸으니, 이제 뭘 갖고 가주와 거래할 수 있겠는가.
“어쩜 이리 헌앙하십니까. 마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형수님이야 말로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전대 가주이신 형님께서 형수님께 얼마나 지극한 마음을 주셨을지 짐작될 정도입니다.”
“어머나.”
“하하하.”
“······.”
진호현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어미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니를 이곳에 남겨두면 될 일도 안 되겠구나.’
호현은 진가장에 어머니를 남겨두면 큰일이 벌어지지 싶었다.
“아직 혼인 전이라도 들었는데, 만나는 여식은 있으십니까?”
“···아. 그것이···.”
비연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아직 허락을 구하지 못했으나, 마음을 주고받는 여인은 있습니다.”
“가주께서는 신부를 잘 고르셔야합니다. 투기가 심한 부인은 집안을 말아먹는답니다. 이제 가주가 되셨으니 상대의 집안도 따져보셔야 하고요.”
“형수님 말씀을 뼈에 새기겠습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나도 손을 걷어붙여···.”
호현은 숙부의 혼인까지 관여하려는 어미를 얼른 말렸다.
“어머니. 오늘은 간단히 인사만 나누시지요. 상중에 혼인에 대한 것도 좀···.”
“네가 아직 있었구나?”
비연의 용모에 정신이 나갔던 모용소군은 아들이 옆에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래. 오늘만 날이 아닐 것이니···.”
정신을 차린 것도 잠시였다.
“형수님. 자주 오셔서 담소를 나누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직 가문에 모르는 것이 많아서···.”
“호호호. 물론이지요. 제가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비연이 친근하게 말을 건네자 다시 본래의 환한 얼굴로 맞이하고 있었다.
“···갑시다. 어머니.”
“넌 맹주가 되어서도 사람을 이리 재촉한다니···.”
“으득. ···가주께서 하실 일이 많으십니다.”
비연은 누구를 공략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형수님. 원하시면 일이야 얼마든지 미룰 수 있습니다. 이까짓 일보다야 형수님의 의중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말씀도 어쩜 이리 곱게 하시는지···.”
“어머니···.”
모용소군은 아들의 이어진 재촉에 얼굴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 또 찾아뵙지요.”
“가주전 문은 항상 형수님을 향해 열려있답니다. 언제든 와주십시오. 형수님.”
“호호호.”
“가자구요. 좀!”
***
모용소군이 진호현에 붙잡혀 밖으로 나가자 비연은 웃고 있던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며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맹주 놈이 아니라도 모용가와 연줄을 유지하기 어렵지 않겠어.’
진호현을 통해서 연결할 사람이 바로 모용소군이었으니, 모용소군을 직접 감당할 수 있다면 중간에 발을 걸친 진호현을 빼도 좋을 것 같았다.
‘빚 갚기 쉽지 않군.’
아름다운 두 여인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일은 이쯤하고 별채로 가볼까?”
비연이 가주전을 나서자 이삼과 미가 나타나 따라붙었다.
“······.”
“······.”
“둘은 언제 혼인할 생각입니까?”
“······.”
“······.”
“괜히 더 미루지 말고 얼른 혼례 올리세요.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
“······.”
“이삼 호위가 답이 없으니, 미(嵋) 호위가 서운해 합니다만?”
“!”
그 말에 놀란 이삼이 얼른 미(嵋)를 돌아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는 연인의 얼굴이었다.
“······.”
“···서운했나?”
무표정 속에 정말 서운한 기색을 읽었기 때문이다.
“임무 중입니다. 사적인 대화는 삼가주세요.”
미(嵋)의 냉랭한 말투에 비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거보세요. 이삼 호위가 너무 무심했어요. 가주인 제가 허락할 터이니 괘념치 말고 혼례부터 올립시다.”
“······.”
미(嵋)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볼에 작은 홍조를 띄고 있었다.
“두 분은 이만 가보세요. 나도 지금부터는 사적인 시간이라···.”
비연이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가주님 명에 따릅니다. 가자. 미(嵋)”
“예···.”
간다던 둘은 비연을 배웅하고 몇 걸음 못 가 멈추었다.
“······.”
“······.”
괜히 어색한 기운이 둘 사이에서 풍겨왔다.
“···혼례 올리자.”
미(嵋)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멋없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연인이 불만이었다. 특히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가주의 지시에 따라 혼례를 올리자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도 가주의 명령에 따른다고?’
“싫어요!”
미(嵋)가 획 돌아서 가자 이삼은 지체 없이 따라붙었다.
저벅.
미(嵋)가 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계속 옆에 붙어서 말을 걸었다.
“싫다고?”
“······.”
저벅.
“왜? 왜 그러는데?”
“······.”
저벅.
“···난 너 밖에 없어.”
우뚝.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멈춘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이삼이 말을 보탰다.
“지금까지 가주를 호위했지만, 사실 난 너를 호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미(嵋). 이제 너만의 호위무사가 되겠다. ···오래전부터 생각한 일이야.”
“······.”
스륵.
미(嵋)가 이삼을 향해 돌아서서 입을 우물쭈물했다.
“···그럼 일찍 좀 말하지.”
“···미안.”
“···얼른 가요. 일도 끝났는데···.”
“답은 해줘야지.”
“······몰라요.”
미(嵋)가 다시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지만, 이삼은 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으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가주께서 물꼬를 틔어준 덕분이다.’
진가장 대문을 나선 그들이 지나는 길가에 노란 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다시 여름이 오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으며 그렇게 시간은 물 흐르듯 흐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