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화 (210/232)

역천대계의 시작

***

호충은 남경과 위장성, 하오문 본단을 오가며 대계를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일전에 유도영의 말로 마교가 급하게 움직이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느긋한 마음이었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다.

“진 가주에게서 서찰이 왔습니다.”

비연이 진가장의 가주로 올라서고 벌써 삼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여전히 하오문 상방의 상방주를 겸하고 있었지만, 이젠 진가주라는 호칭이 더 어울렸다. 그 사이 남궁가와 제갈가의 여식을 맞아들여 혼례까지 치렀기에 하오문의 의형제들 사이에서 위아래가 없다는 타박을 듣는 비연이다. 형제들 중에 가장 먼저 혼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유 단주가 먼저 확인하면 그만이잖아?”

“그래도 문주님이 읽으셔야죠.”

“그래서 뭐라고 하든?”

보통 서찰이 도착해도 호충이 직접 확인하지 않고 유도영이 따로 확인하고 있었다. 어차피 호충이 읽어도 유도영에게 전해질 것이라 이렇게 지시한 것이다.

“현재 진가장에서 진행 했던 일의 결과를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별거 없으면 넘어가지.”

별일이 아니었다면 유도영도 넘어갔을 것이다.

“···거액의 하사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여 진가장이 지고 있던 일부의 채무를 갚겠다고 합니다.”

“벌써? 비연이 어디서 그렇게 돈이 생겼어?”

“정확히 따지자면 진씨 세가에서 모용가를 통해 황실에 물품을 진상하며 얻어낸 것이지요.”

지금까지 받은 보고 중에 황실에 대한 얘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서찰 가져와봐.”

호충은 비연이 직접 작성한 서찰을 통해 지금까지 진가장이 진행한 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모용소군을 통해 태자와 연줄을 잇고 거래를 위해 노력한 일들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미친···. 그걸 왜 황궁에다가···.”

황실을 전복하고 황권을 되찾아올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황제에게 방사능 야광주를 넘길 생각은 없었다. 야광주를 하나만 넘겼다고 하지만 하나도 치명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유도영은 문주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보고 변명하듯 말했다.

“문주님. 형제가 피를 보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황제를 아버지의 손에 죽게 만들지 말자는 것인가?”

“예. 직접 황실 형제의 피를 보는 것은 삼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선례를 남기면 이후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음입니다.”

“···후.”

“보주를 넘긴 덕분에 황실로부터 거액을 하사 받았고, 향후 황실에 필요한 물품을 납품할 권한까지 얻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황궁 내부에서 직접 충당하지만, 일부는 외부에 할당하지요. 황궁에 납품한다는 명성만으로 삼도상단의 위상이 수직으로 상승할 것입니다.”

“또한 부족했던 황궁의 정보를 더 캐낼 수 있겠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성과겠지요.”

“······.”

호충은 안 그래도 건강 상태가 예전과 다르다고 했던 황제의 용태를 떠올렸다.

‘종사현 대학사께서 황제의 용안에 그늘을 보았다고 했는데···.’

남경에서 포섭한 대신들과 장군들을 종종 만나 대계에 관해 논의하는 호충이다. 종사현 대학사는 직접 황제와 대면할 수 있는 신하임에도 최근엔 용안을 뵙기도 힘들다고 했다. 마지막에 대면했을 때엔 피부 빛이 거무죽죽해서 마치 목내이를 보는 듯 했다고 전했다.

‘자주 자리를 비우고 황태자가 대신들과 대소사를 의논해 결정하게 한다지?’

이 덕분에 태자의 결정이 곧 황제의 결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야광주를 납품한 시점이 세 달 전이군.”

“예. 수은도 함께 납품했지요.”

“······.”

이미 그 전부터 용태가 나빴던 황제다. 언제 갑자기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유 단주. 서둘러야겠다.”

“···결국 황제가 서거하기 전에 일을 진행하시렵니까.”

탁.

“야광주가 황제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긴 하다. 아버지도 형님인 황제를 직접 처리하고 싶지 않으실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지금 황실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이는 태자라는 점이었다.

“야광주는 황제가 아니라 태자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

비연이 황궁에 진상한 야광주를 황제에게 넘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욕심 많은 태자가 갖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호충은 그다지 애정이 없지만, 아버지는 동생을 아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내가 벌인 일로 동생 녀석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 내가 아버지를 무슨 낯으로 보겠느냐.”

“휴. 대계가 너무 늘어지긴 했지요. 보안을 위해서라도 곧 진행해야 했을 것입니다. 근래 마교의 동태도 조금 변화가 있었지요. 정확히 파악은 할 수 없었지만···.”

마교까지 움직였다면 더 미룰 이유가 없었다.

“준비했던 작업을 진행하자.”

“예. 입이 무거운 최측근으로만 인력을 준비해두었습니다. 하오문의 수뇌부에도 남경에서 벌일 일들을 정확히 알지 못하지요.”

“다음 달 오늘. 거사를 치를 것이다.”

“···빠듯하겠습니다. 곧 남경 저잣거리에 예언석을 올리지요.”

“나는 남경의 대신들을 만나고, 위장성에 다녀오겠다.”

“남경의 대신들이야 문주께서 만나서야 하지만 위장성까지 오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내가 가야 빨라. 위장성에서 대장군이 출발하지 않으면 대계를 완성시킬 수 없잖아.”

“그러다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수습할 수 없습니다. 그곳보다 여기가 더 중요합니다.”

대계를 준비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유도영은 대계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었다.

“문주께서 이곳을 지키시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장성에서 시일을 맞추지 못하거나, 이곳에서 진행하는 일에 변수가 발생하면 누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

호충은 무슨 변수가 생겨나도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유 단주가 오늘따라 약한 소리를 하네?”

“문주님이 이곳에 계셔야 예상치 못한 변수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교의 동태가 수상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알았어. 흑림방 녀석들의 경공도 끌어올렸으니, 많이 늦진 않겠지.”

그간 흑림방 호위대와 함께 위장성과 남경을 오갔기에 그들의 경공도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서 있었다.

“문주께서 계시면 정보단은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끝까지 마음 놓지 마. 아버지가 용상에 앉을 때까진···.”

“예. 문주님.”

마교가 숨죽인 동안 하오문은 더욱 팽창하고 단단해졌으며, 정파 무림은 하루가 다르게 커나갔다. 무림의 상승 무공은 이제 당연시 여겨지고 있었고, 마교와 종종 일어나는 충돌도 이제 할만하다는 평이 주류를 이루는 중이었다. 그 사이 정파 무림에서 많은 고수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정파 무림이 성장한 배경에 하오문의 영단과 비급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태자의 여러 무림 방파의 상승 무공 제한을 철폐한 것이야말로 정파 무림의 성장에 크게 일조했다고 할 수 있었다.

초기 화산파와 남궁 세가, 제갈 세가만 얻었던 상승 무공 허락이 지금은 소림을 비롯한 종남, 점창, 청성, 형산 등의 불가와 도가를 포함하고 있었고, 여기에 진씨 세가와 서문 세가, 모용 세가, 당씨 세가까지 최근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무림의 주축을 이루는 대부분의 무림 방파가 상승 무공 제한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러니 원로원에 숨죽이던 정파 무림의 고수들이 세상으로 드러났고, 마교는 이들의 등장에 오히려 몸을 움츠렸다.

“일이 너무 수월하게 진행되는 기분이야.”

“하늘의 뜻이 한 곳으로 흐르는 것이지요.”

남경의 장원에서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마교도 실제 움직임을 재계하고 있었다.

***

“때가 되었다. 대계를 시작하라.”

“예. 부교주님.”

마교의 지시를 받는 약재상은 양귀비액의 납품을 점차 늘려갔고, 이제 그 효과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태자궁에서 일이 시작되었다.

.

.

.

“전하···.”

어여쁜 용모의 기녀가 옷고름 한쪽을 반쯤 푸르고 태자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는 태자와 궁녀의 은밀한 신호였다.

“희가 이쪽으로 온다는 말은 없었으니···. 이리 오너라.”

“예. 전하.”

스륵.

둘의 가쁜 숨이 오가던 시간이 지나갔고, 궁녀는 얼른 태자의 옷을 추스르고 자신도 몸을 단정히 했다.

“······.”

“왜?”

본래 일이 끝나면 조용히 자리를 피하던 궁녀가 오늘은 멀뚱히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태자 전하. 소첩이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네가?”

평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궁녀다. 어려서부터 끓어오르는 욕정만을 풀어주고 그녀는 의무를 다했다는 듯이 물러갔기 때문이다. 작은 선물이나 돈을 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자신을 빈으로 삼아달라는 청도 올린 일이 없었다.

‘이제 너도 나이가 들었으니···.’

빈으로 삼아 달라 청해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쫓아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전하께서 태어나신 때의 일을 알려드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더냐?”

이미 자신은 황제의 업무를 대행하며 황제가 될 준비를 진행 중이었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실은·········.”

하지만 궁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태자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내용의 연속이었다.

“!”

자신이 황제의 친아들이 아니었으며, 황제가 죽이려 했던 왕야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친부모로 알고 있었던 황제와 황후는 사실 백부와 백모인 셈이었다.

“···그 분은 현재 남경의 사가에서 숨어 지내고 계십니다.”

“누, 누가 또 이 사실을 아는가.”

“폐하를 비롯한 황실의 어른들은 모르시지만, 그 분을 보호하는 신교의 교인들과 신교의 수뇌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태자는 아연한 얼굴이었다.

‘이 년을 죽여도 입막음을 할 수 없구나.’

당장 궁녀를 죽여 입을 막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태자는 아무리 오래 자신과 몸을 섞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일 수 있는 심성을 갖고 있었다.

“사실···. 신교에서 얼마 전까지 이(二) 왕야를 뫼시고 있었사온데, 황제폐하를 따르는 세력이 왕야를 납치, 살해하였습니다. 왕야께서는 본래 교와 함께 역천을 준비하고 계셨나이다.”

“!”

“다른 이들이 전하의 진실을 알기 전에 움직이셔야 하옵니다.”

“···물러가라. 황망한 얘기를 들어 혼란하구나.”

“······예. 전하.”

궁녀는 태자를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

태자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진짜 태자와 날 바꿔치기 했다?’

자신이 태자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한 일이 없었다.

평생을 태자로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어찌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 아버지가 죽은 이(二)왕야였다니···.’

애초에 죽었다고 알고 있었기에 얼마 전에 죽었다는 소식도 크게 감흥은 없었다. 당장에 문제될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사실 이것이 가장 큰 위험이었다. 이지(理智)가 흐려지기 시작한 황제였다. 오래 전부터 복용한 아편(阿片)으로 인함이지만, 그저 노환으로 인한 것이라 알고 있었다. 태자는 황제인 아버지가 서거하면 당연히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시간만 흐르면 당연히 내가 가질 것인데···.’

만약 자신이 황제의 아들이 아닌 왕야의 아들임이 밝혀지면 황제의 자리는 물론이고 목숨까지 위험했다. 황제가의 후사가 없음은 문제가 아니었다. 황제가 죽으면 자신이 아니라도 황실의 방계의 혈족들이 저마다 다음 황제가 되겠다며 나서지 않겠는가. 설령 황실의 혈족이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대신들이 다음 황제를 찾아내어 보위에 앉힐 것이다.

‘천마신교···. 이들이 내 목줄을 잡고 있었구나.’

빠져나갈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황제 폐하를 따르던 이들이 태자궁으로 들이닥쳐 자신을 잡아갈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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