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연(黑鳶)
***
태자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중에 일단의 인물들이 길을 막아섰다. 검은 복면을 쓰고 갑자기 나타난 이들은 물경 오십에 이르고 있었기에 태자를 호위하던 금의위들은 태자를 둘러싸 보호했고, 금의위를 이끄는 이가 앞으로 나섰다.
“웬 놈들이냐!”
“······.”
“국법이 무섭지도 않느냐! 이 분이 뉘시라고!”
“······.”
복면인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기에 태자가 나섰다.
“길을 터라. 나와 볼일이 있을 것 같구나.”
“대인···. 위험하옵니다.”
태자의 신분을 밝힐 수 없기에 대인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지만, 태자는 이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그대들이 나서지 않겠는가. 잠시 대화하는 정도는 괜찮을 것이야.”
태자는 이들이 천마신교와 적대하는 세력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견제 세력이 있다면 끈을 이어두어야 해.’
“어서!”
태자의 명에 금의위 위사들이 분분히 길을 트자 복면인 중에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태자도 자신이 겁먹지 않았음을 보이기 위해 마주 걸었다.
그리고 마주오던 인물은 멀찌감치 멈춰서 깊이 허리를 숙이며 포권했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
태자는 전음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하는 참이었다. 그리고 전음을 전하는 이는 하오문 정보단의 연락에 부리나케 뛰어온 호충이었다.
[금의위에서 들을까 싶어 전음으로 전하고 있사오니, 부디 저희 말을 들어주십시오.]
“···네 놈의 정체부터 밝혀야 옳지 않겠느냐?”
[···정체를 밝힐 수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방금 마교의 인물들을 만나고 나왔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알리고자 무례하게 전하의 길을 막았습니다.]
“······.”
[전하께서 보신 인물은 마교의 부교주와 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저희는 이들의 행보를 꾸준히 지켜보고 있었기에 안에 있는 이들이 마교의 인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
‘이 놈들의 능력도 상당한 모양···.’
태자의 상념은 이어진 복면인의 말에 끊기고 말았다.
[녀석들 손에 놀아나시면 큰일입니다. 전하에 대한 정보는 그들과 우리 외에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
태자는 정보라는 말에 놀란 것이다.
‘이 놈들도 나에 대해서 안단 말인가?’
[혹시 전하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고 들었다면 모두 거짓입니다. 전하를 이용하려는 놈들은 오직 마교 놈들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인가?”
[저희는 전하께서 허락하신 무림의 세력. 전하께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마교를 감시하고 그들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마교의 정보는 저희 손아귀에 낱낱이 들어오고 있으니···.]
“아편도 아는가?”
호충은 아편이라는 단어를 통해 마교가 황제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황제에게 아편을 먹이고 있었구나. 그래서 황제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어.’
호충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받았다.
[저희는 황궁에 힘을 쓸 수 없었기에 황제 폐하께 진상하는 물품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도 알고 있었군. 천마신교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더니···. 뛰는 놈 위에 더 한 이들이 있었군. 하하하.”
[저희가 은혜를 입은 것은 전하이기에 전하께만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무림은 은원이 분명한 곳입니다.]
“무림맹에서 왔더냐?”
[맹은 아닙니다. 그저 무림의 정의를 지키고자하는 모임이지요. 현 무림에서 잊혀진 저희지만, 나라의 일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마교의 수작을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움직였습니다.]
“······.”
[부디 전하께서 중심을 잡고 마교의 손을 뿌리치소서.]
“···너희가 원하는 것은 그저 은혜를 갚는 것뿐이냐?”
[그러하옵니다. 이미 태자 전하께 받은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전하 덕분에 저희가 이렇게 세상에 나와 활보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희의 말을 따르길 얼마나 다행인지···.”
모용희에 조언에 따라 무림의 상승 무공을 폐하였기에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조언드릴 것이 더 있나이다.]
“말하라.”
[전하의 몸에서 기이한 혈기가 새어나오고 있나이다. 이는 마교의 수작으로 보이는 바···.]
“!!”
태자는 얼른 자신의 몸을 돌아봤지만, 혈기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빼어난 무림인만이 알아볼 정도로 미미한 혈기입니다. 하지만 마교에서 태자 전하께 수작을 부린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혈기는 인간의 욕구를 자극하고 이성과 본능의 경계를 흐리게 하지요. 혹시 평상시에 드시는 음식들 중에 의심할만한 것이 있으십니까.]
“······.”
‘녀석들이 폐하께만 손을 쓴 것이 아니었구나. 내게도 수작을 부렸어. 그래서 녀석이 당당했던 거야.’
태자는 자신이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려봐야 했다.
‘대체 언제···.’
태자는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들을 가만히 떠올리다가 매(昧)가 가져오는 탕약을 떠올릴 수 있었다.
“!”
‘바로 그것이었구나. 그 탕약을 먹으면 항상 살심과 음욕이 치솟았지!’
살심과 함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주는 탕약이었다. 덕분에 탕약을 끊지 않고 꾸준히 복용하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근래 입수하신 보주(寶珠)를 멀리하소서.]
“!”
보주(寶珠)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얼마 전에 황궁에 들어온 야광주를 뜻하는 것이다.
‘그건 희의 가문을 통해 진가장에서 진상한 것이거늘···.’
[마교의 수작에 보주(寶珠)가 바꿔치기 되었다 들었나이다. 황궁으로 들어간 보주는 해악을 주는 보주이니, 곁에 두지 마소서. 어찌나 은밀하게 해악을 끼치는지 초기엔 표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보주는 결국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 독성을 뿜어냅니다.]
“···덕분에 큰 위험을 피했노라.”
[저희 용건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다만, 오늘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길 간곡히 청하옵니다.]
“용서하겠다. 너희 덕분에 큰 위험을 피할 수 있었는데 어찌 죄를 물을 수 있겠느냐.”
호충은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천세천세천천세. 전하께서 강녕하시기를 바라옵니다.]
“하하하. 실과 득이 함께한 날이로다.”
호충이 손짓하자 복면을 쓴 이들이 멀찍이 물러났고, 태자와 금의위는 그 사이를 걸어 황궁으로 돌아갔다.
“······.”
호충은 태자 일행이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하오문 정보단 일행에게 손짓했고, 그 손짓에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호충도 그들 틈에 끼어들어 자리를 피해다.
‘태자 놈이 헛짓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니 변수 하나는 막았군.’
마교의 움직임을 파악하기도 힘든데, 태자까지 움직여 버리면 대계가 물거품으로 변할 수 있었기에 움직인 것이다.
‘부교주 이 새끼를 죽여 말아···.’
과거 녀석과 마주했던 때에도 상대할 수 있었지만, 비등한 경지였기에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현경에 오르고도 몇 년이 흘렀기에 부교주를 잡아 죽여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괜히 다른 놈이 오면 일만 복잡해질지도···.’
부교주를 살려두는 것은 상대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대계를 원활히 진행시키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조만간 네 놈의 목을 따러 가마.”
그렇다고 살려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
황궁으로 돌아온 태자는 방금 복면 무림인에게 들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천마신교의 부교주와 나눴던 대화까지 모조리 다시 생각해야 했다.
‘이제 어찌한다.’
이제 자신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지만 원하는 것이 있었다.
‘놈들의 계획에 동참할 필요가 없어졌으나, 원하는 일은 같으니···.“
천마신교가 원하는 것처럼 황제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번뜩 떠올랐다.
‘보주(寶珠)가 있었구나! 이를 폐하께 넘기면 일석이조로다!’
태자는 입수한 야광주를 황제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이승에서 고통 받지 마시고 어서 저승으로 가시오. 폐하.’
“흐흐흐흐.”
이는 호충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몸에 이롭지 못하니 그저 다른 곳에 보관하는 방식으로 떼어놓으라는 뜻이었는데, 태자는 마교 대신 황제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흐하하하.”
‘진정 내 세상이 다가오는 구나.’
태자궁에서 태자의 웃음소리가 새어나가고 있었다.
.
.
.
며칠 뒤 황제는 태자가 선물했다는 보주를 손에 넣었다.
“······.”
“폐하. 태자께서 어렵게 구했다 하옵니다.”
“···맑고 깊은 빛을 내는 신비로운 보주로다.”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하니 곁에 두소서.”
“이제 태자가 나의 건강까지 챙기는가. 허허. 태자에게 곁에 두겠다고 전하게.”
“예. 폐하.”
황제는 푸른빛을 내는 보주에 손을 올렸고, 내관의 말대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허허. 실로 영험한 빛이로다.”
***
남경 저잣거리에 거대한 비석이 솟아올랐다. 많은 이들이 저잣거리를 오가던 중에 홀연히 솟아오른 비석이었다.
우르르릉.
“어! 저게 뭐야?!”
“갑자기 길 중앙에 돌이 생겨났어!”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신기해했지만 차마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다. 하지만 용기 있는 이들은 거대한 비석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 글이 적혀 있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알려줄 사람 없나?”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좀 읽어봐!”
이 시대의 문맹률은 상당한 수준이라 대부분의 백성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애초에 나라에서 교육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도 이곳이 남경인지라 나라에서 치르는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이들이 몇몇 있었고, 이들은 비석에 새겨진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지상(地上)을 어지럽힌 진황(眞皇)은 천벌(天罰)···.]
“히익!”
여기까지 읽은 문인이 화들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남경에서 황제를 욕하는 말을 했다간 자신의 출셋길이 위태로웠고, 여차하면 목숨까지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하오문 정보단이 나서서 큰 소리로 비석에 적힌 글을 읽어야 했다.
“지상(地上)을 어지럽힌 진황(眞皇)은 천벌(天罰)을 받아 천형(天刑)을 얻을 것이다!”
“헙!”
“지, 지금 저들이 뭐라는 건가···.”
정보단원은 누군가 알아보기 전에 한 문장만 읽고 군중 사이로 숨었고, 그 뒤의 문장은 또 다른 정보단원이 나서서 읽었다.
“진황(眞皇)이 천형(天刑)을 얻기 전 남경 하늘에 화우(火雨)가 내려 경고할 것이다!”
“화우···. 불비가 내린다는 건가?”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떻게 하늘에서 불비가 내리겠어?”
정보단은 관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돌아가며 비석의 글귀를 큰 소리로 읽고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말을 타고 들이닥친 관인들이 비석을 둘러싸 보지 못하게 만들었고, 곧 더 많은 관인들이 와서 비석을 캐 관부로 가져갔다.
남경 관부로 압송(?)되었던 비석의 글귀들이 황궁에 알려졌고, 태자는 황제를 대신해 이를 조사하고 있었다.
“감히 폐하를 음해하다니! 여봐라! 당장 이런 짓을 벌인 놈들을 붙잡아 대령하라!”
“예! 전하!”
단서 하나 남기지 않았기에 범인을 잡을 가능성을 따질 수 없었지만, 태자의 명에 반기를 들 간 큰 관인은 없었다.
***
“에효. 바쁘다. 바빠.”
대계를 시작한 터라 호충은 더욱 바빴다.
“맡길 사람도 마땅치 않고 말이야.”
특히 대계의 특수성으로 인해 믿을 수 있는 하오문의 정보단 일부만 동원해야 했기에 인력부족이 심각했다.
호충은 높은 순도로 정제한 술과 섞은 기름통을 준비된 물건들에 하나씩 매달고 있었다. 지금 호충이 준비하는 것은 불비였다. 다른 정보단원들은 불비가 내릴 지역 곳곳에 모레와 물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혹시 불비로 인해 남경이 불바다가 되는 상황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연(鳶)은 제대로 뜨는 거지?”
“물론입니다. 문주님. 줄까지 검게 칠했기에 안력이 좋은 이라도 쉬이 연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호충과 유도영은 거대한 흑연(黑鳶)을 몇 개나 만들어 두었고, 오늘 연을 띄워 남경 하늘에 불비를 내릴 작정이었다.
“문주님께서 오르신다 하시어 미리 연을 띄워보기도 했습니다.”
“설령 줄이 끊어져도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연이 안 뜨면 내가 직접 움직이지 뭐.”
호충의 경신공부는 중원 무림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천상제(天上梯)를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무림인은 호충 외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직접 호충이 연(鳶)에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을 불비가 내리는 날로 결정한 것은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북서풍이 부는 구나.”
위에서 빗겨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 연을 띄워야 했고,
“그믐달이라 시위도 어둑하니 좋지요.”
달이 밝지 않은 시기를 선택해야 했다.
“시작하자!”
“예!”
연을 잡은 정보단원들이 동시에 연을 하늘로 던졌고, 끈을 잡은 정보단원들은 연을 하늘로 띄웠다.
호충은 유도영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검은 연은 자신이 육안으로 확인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은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