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
***
호충은 오랜만에 만난 의형제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남경에 마련한 하오문 지부로 돌아갔다.
“오늘 거물 한 놈 잡았으니, 간단하게 한 잔?”
“저희야 좋지만, 유 단주 잔소리가···.”
내일이 대계를 실행하는 날이었는데, 전날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가볍게 먹자는 거지. 오랜만에 형제들을 만났는데 그냥 지나갈 수 없잖아.”
왕호도 호충의 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럼 따돌리기로 하죠. 흑림방에서 정보단을 교란시키면···.”
“···따돌리긴 누굴 따돌립니까?”
“누구긴 누구야? 유 단주를···.”
왕호는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돌아보다가 말을 줄였다.
“저 벌써 들어왔습니다만.”
“······.”
“······.”
“······.”
어느새 유도영이 이들 사이에 들어와 있었다.
“술은 당연히 금지입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술입니까? 정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유 단주의 경신이 상당합니다? 언제 이렇게···.”
사중환은 유도영의 경신술에 놀라는 중이었다. 기척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넌 알았냐?”
왕호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몰랐습니다.”
옥비연도 유도영의 말을 듣고 나서야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저는 술 안 먹어요. 유 단주님.”
말동은 유도영의 등장에 발뺌부터 했다.
“······.”
호충은 유도영의 경신 공부가 깊어진 것이 자신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으라고 죽어라 경신 공부만 시켰더니···.’
유도영의 무력은 방주들에 비해 상당히 부족하지만, 경신 공부만큼은 비등하거나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유도영이 들어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유 단주. 딱 한 잔만 하자. 응?”
“···문주님.”
“오늘 마교 부교주 새끼도 잘 잡았잖아.”
“···내일이 거사일입니다만?”
“마교도까지 싹 정리해서 남경에 남은 변수가 없는데?”
“변수는 예측할 수 없으니 변수라고 하는 겁니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압니까?”
“······.”
“음주 금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기어코 드시려거든 거사 끝내고 마음껏 드십쇼.”
“에라이.”
“중원 각지에서 손꼽히는 명주를 준비해드리지요. 그러니 오늘은 제발···.”
호충이 사중환과 왕호, 옥비연을 돌아봤다.
“오늘은 쫑이다.”
“에이.”
“딱 한 잔인데···.”
“유 단주는 잘 챙겨 놨다가 주쇼.”
지휘부의 일탈을 막은 유도영은 곧장 일부터 시작했다.
“내일 맡을 곳부터 일러드리지요. 먼저 부문주께서는 남경을 호위하는 군의 중간 지휘자들을 붙잡아 주셔야 합니다. 루방과 패방이 동시에 진행하는 일이니, 부문주님이 통솔하셔야 합니다.”
“···계획은 다 세워져 있지 않았는가.”
오늘 처음 나온 계획이 아니다. 한참 전부터 계획된 일이기에 인원 배분은 물론 맡은 임무까지 모두가 숙지하고 있었다.
“점검 차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흑림방주님입니다.”
“남경으로 진입하는 대장군의 호위지. 기억하고 있어.”
“절반은 은신한 상태로 호위를 이어가야 합니다. 갑자기 황궁 금의위가 나타나 반격할지 모릅니다.”
“숙지하지.”
“상방주께서는 황궁을 맡아주셔야 합니다. 흑림방 무인 일부와 패방 무인 일부, 루방의 기녀들까지 투입되니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중간 조율에 힘써주십시오. 황궁 진입 시점부터 움직여야 하니 그 전까진 절대로 드러나선 안 됩니다. 흑림방주께서 합류를 도우실 것입니다.”
황궁의 금의위를 상대하는 일이라 오늘 부교주를 잡으러 출동했던 하오문의 고수들이 총출동해야 했다.
“황궁 지도를 검토하여 동선을 다시 점검하겠네.”
“마지막으로 문주님.”
호충이 맡을 임무는 간단했다.
“부디 가만히 계십시오.”
호충은 내일 거사가 성공하면 황제에 오를 왕야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인재를 왜 안 써먹겠다는 건지···.”
“아시지 않습니까. 내일 문주께서 직접 나서시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누가 날 호위하래?”
내일 거사에 호충의 호위를 맡은 흑림방 호위대가 서천량 대장군과 진휘평을 호위하기 위해 빠져나가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면 호충은 홀로 남게 되니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다.
“나 호위 필요 없거든?”
유도영은 호충의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지시만 했다.
“마지막에 대장군과 왕야께서 황궁에 진입할 때 합류하시면 됩니다.”
“에잉.”
“그 전까진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마시고 여기 숨어계십시오. 방주들을 믿어주셔야 합니다.”
“못 믿는다는 말은 아니고···.”
“거사는 내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긴 시간이 아닙니다. 거사는 급박하게 진행될 것이니 맡은 임무를 확실히 마무리하십시오.”
황군과 변방군의 대치를 오래 끌지 않으려함이다. 짧은 시간 내에 거사를 끝내야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었기에 임무를 맡은 이들은 서로의 일을 제 시간에 끝내야 했다.
“사흘 뒤 저희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합니다. 그 세상을 오게 만드는데 한 몫을 하시겠지만, 얻을 것은 문주님의 영광뿐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마십시오.”
공신이 될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었다.
“유 단주. 그거 월권이다?”
“···문주님.”
“공신이 되고 말고는 폐하가 정한다. 네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야.”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하지 말자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안 주면 내가 주면 되잖아.”
“······.”
“공신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몫은 잡아야지. 지금까지 황제의 권력으로 꿀을 빨던 대신들이 한 둘이야?”
호충은 대학사로부터 황궁 대신들의 횡포를 들어 알고 있었다. 작게는 청탁 뇌물을 받은 놈이 있었고, 크게는 나라의 공물을 빼돌려 제 주머니를 채운 놈이 있었다. 과거 시험문제를 유출하는 것은 애교에 속했고, 상납금이 충분하면 엉뚱한 답을 써내도 과거에 합격시켜주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놈들 가산을 몰수하면 너희부터 챙겨줄 것이다. 그렇다고 목숨 걸고 하라는 말은 아니야. 희생이야 이미 예정되어 있으니, 대치가 조금 길어져도 상관없다. 너희 목숨은 너희가 잘 챙기라는 말이야.”
맡은 임무가 실패해도 목숨을 남기라는 명이었다.
“뒈지는 놈은 내가 저승까지 따라가서 멱살을 잡을 것이니 알아서 해.”
““충!””
***
“크하하. 한 잔 받게.”
“가득 따라봐.”
루방은 전부터 친밀하게 지낸 이들을 공짜 술로 불러낸 것이다.
“남경 기루가 오늘 제대로 보답하는 군.”
“지금까지 우리가 갖다 바친 돈을 생각하면 이 정도야 당연하지 이 사람아.”
이들 곁에서 술시중을 들던 기녀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오라버니. 저희가 오늘만 대접했사옵니까?”
“하하하. 전에도 종종 크게 대접받았어. 내 잊지 않았어.”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얼마나 많겠사옵니까. 자주 찾아주셔요.”
의심을 피하려 전에도 이와 같은 행사를 주관했었다. 다만 오늘은 남경에 위치한 기루 전부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다는 점이 달랐다. 기루뿐이 아니었다. 일부 객잔에서도 하위 군관들에게 공짜 술을 대접하고 있었다.
남경에서 술을 파는 곳은 전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황궁을 지키는 금의위 중 비번인 이들과 남경 관아에서 일하는 포쾌, 남경 밖을 지키는 방위군의 지휘자들이 주축이 된 술판이었다.
“오늘 일하는 놈들은 아쉬워서 어쩌나?”
오늘은 비번이라 성곽 경비를 쉬고 있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아무도 쳐들어오지 않을 성벽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아휴. 저희가 그 원성을 어찌 듣겠습니까. 그쪽에도 따로 술을 보냈답니다.”
“하하하. 기루의 일처리가 우리보다 낫군.”
“잔 받으셔요. 오늘 마시는 술은 전부 기루가 내는 것이니 제대로 즐겨주셔야죠.”
“하하하. 오늘 기루의 술이 다 떨어질 때까지 마실 것이다!”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 기녀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부어라마셔라 이어지던 술판은 예상과 달리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끄응. 오늘따라 술이 빨리 취하네. 흐허. 어으으으.”
쿵.
나뒹구는 술병 사이로 한 사람이 꼬꾸라졌다.
“푸하하. 저 놈이 막 마셔댈 때부터 내 알아봤지.”
웃던 놈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기녀의 애교에 술 몇 잔을 더하더니 그도 곧 같은 꼴이 되었다.
쿵.
“하하하. 마셔. 마셔.”
모두가 취한 덕분에 술에 곯아떨어진 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남은 이들도 곧 같은 꼴이 되어야 했다.
쿵. 쿵. 쿵.
“······.”
기녀들은 모두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밖에서 사람을 불렀다.
“들어오세요.”
곧 패방의 인물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하나, 둘···. 일곱. 이 방은 이들이 전부인가?”
“예. 전부 혼약에 취했으니,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술만 먹고 쓰러질 이유가 없었다. 이들이 마신 술에 잠에 빠지게 만드는 혼약이 섞여 있었기에 견디지 못한 것이다.
“전부 광으로 옮겨서 묶어둬라.”
“예!”
우르르 들어온 패방의 인물들이 쓰러진 이들을 챙겨갔다.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
루방은 대부분 임무를 성공했지만,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지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교교. 오늘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오라버니.”
교교는 오늘따라 술을 마시지 않고 자신을 향해 답을 요구하는 관인이 난감했다.
“나 적산걸. 오늘은 꼭 교교 너의 답을 들어야겠다.”
“하아.”
“대체 왜 답을 주지 않는 것이냐? 내가 뭐가 부족해서!”
“산걸 오라버니. 제가 언제 오라버니가 부족하다고 했사옵니까.”
“또 네 출신이 미천해서라는 이유를 데려하느냐?”
“···오라버니. 저는 기녀이고 오라버니는 관부의 높은 직책을 가지셨어요. 제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현숙한 부인을 맞이하실 수 있잖아요.”
적산걸이 교교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부인이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다른 여자는 필요 없다. 오직 너여야 한다.”
“···오라버니.”
교교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빨리 관인을 재우고 패방에 넘겨야 했는데, 술은 입에 댈 생각도 없어 보였다.
“우선 술이라도 마시면서···.”
“아니! 난 오늘 네 답을 듣고 나서 멀쩡한 정신으로 관아에 돌아갈 것이다.”
“······.”
답이 없는 상황이라 교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녀오겠어요.”
“어딜! 답을 주고 가거라!”
“···루주께 여쭤는 봐야지요.”
“···하하. 하하하하.”
적산걸은 교교의 답이 긍정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서 다녀오너라. 어서!”
“······.”
교교는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밖으로 나갔고 곧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너는 뭐야?”
“나? 지나가는 취객. 여기 술이 많네. 좋구나. 좋아. 끄윽.”
“뭐?”
기루에서 이런 일을 겪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자신은 관부의 인물이었다.
“나는 남경 관아의 적산걸 포쾌장이다!”
비틀.
“아휴. 이 아까운 술을···.”
취객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적산걸 앞으로 다가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바스락.
고이 접힌 종이를 펼치자 하얀 가루가 보였고, 그는 곧 술잔에 가루를 쏟아 부었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술잔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뭉치지 말고 잘 섞여라.”
“···지금 내 앞에서 뭐하는 건가?”
“몸에 좋은 약을 만들었다네. 힘이 불끈 솟아오르지.”
“허!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만?”
“그래도 먹어. 너 먹이려고 열심히 만들었거든.”
“···뭐?”
적산걸이 의문을 느끼는 사이 취객의 손이 번개처럼 품을 다녀갔다.
투둑.
“!”
적산걸은 자신이 몸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았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점혈법! 고수로구나!’
“안 먹으면 강제로 먹어야지 어쩌겠어.”
“!”
취객은 자신의 입을 강제로 열어 하얀 가루를 탄 술잔을 들이부었다.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여기 있는 술을 마음껏 마시지.”
꿀럭.
“나 혼자 다 먹기는 좀 많아···. 너 조금 더 마실래?”
취객은 술병을 들어 뒤집었다.
“컥컥.”
적산걸은 곧 자신의 눈이 흐려짐을 알 수 있었다.
‘······마교도였던가.’
“잘 자. 술은 잘 먹을게.”
쿵.
적산걸이 정신을 잃고 나서 교교가 방으로 들어왔다.
“부문주님. 괜한 수고를 끼쳤습니다.”
“내가 여기 있어서 다행이었다.”
취객이라 주장한 이는 사중환이었다. 당연히 술에 취한 것도 아니었다.
“···부디.”
교교도 적산걸에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살살 다뤄주셔요.”
“왜. 진짜 이 녀석과 살림이라도 차리려고?”
“···아닙니다. 그저 멀쩡하게 돌아갔으면 싶었습니다.”
적산걸에게 자신이 부족하다 했던 것은 진심이었다. 기루에서 험하게 굴러온 자신에게 관인은 어울리지 않았다.
“전에 남경에서 마교를 몰아낼 때 네 공로가 작지 않다고 들었다. 네가 원하면 이 녀석과 살림을 차려도 좋다.”
“······.”
교교는 약에 취해 쓰러진 적산걸을 돌아봤지만,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자신 없으면 특별 임무를 내릴까?”
“···특별 임무요?”
“관인과 혼인해서 앞으로도 쭈욱 감시를 이어가는 임무지.”
“!”
“임무의 종료 시한은 관인이 죽을 때까지.”
“···부문주님.”
“네가 기녀라고 기죽지 마라. 넌 루방의 인재고 하오문의 소중한 문도이기도 하다.”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부문주의 명이 더해지면 없던 용기도 낼 수 있었다.
‘그래. 난 하오문의 명으로 이 사람과 함께하는 거야.’
“······감사합니다. 부문주님.”
사중환이 적산걸을 가볍게 들고 나가며 말했다.
“이 놈은 멀쩡하게 돌려줄 테니 염려 마라.”
“···예. 부문주님.”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지면 패방이 나서서 무력으로 진압했기에 남경의 밤은 곧 고요해졌다.
그리고 수도 성문밖에 불빛이 나타났고, 그 불은 둥글게 회전했다. 멀리서도 확연히 보이는 불빛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