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비의 계획
***
호충은 환복하고 하오문에 속한 이들과 함께 황궁을 나섰다. 역천대계는 오늘로 완전히 끝이기 때문이다.
“밤이슬이 상쾌합니다. 문주님.”
“어찌어찌 끝은 봤습니다. 크흐흐.”
“홀가분합니다.”
저마다 시원하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얼굴이 굳어졌다.
송 영감의 말 때문이다.
“어허. 다들 말을 삼가게! 태자 전하께 예를 갖추게!”
“아차!”
“전하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
“얼굴도 보면 안 되는 거 아닐지···. 고개부터 숙여.”
“에이. 놔두지는···.”
“전하. 자칫 전하께 누가 될 수 있는 일이옵니다.”
호충은 환관들의 눈칫밥으로 족했다. 황궁을 나와서까지 송 영감에 시달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호충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아직 황궁 내의 불순한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는 바. 송 노사께 한 가지 부탁이 있소.”
“하명하소서.”
“황궁에 남아서 폐하를 지켜주시오.”
“······.”
“믿을 만한 이는 송 노사뿐이라오. 게다가 송 노사는 폐하와 오래 함께하셨으니, 폐하와 마음도 잘 맞으시지 않겠소?”
“···저를 떼어놓고 가시렵니까.”
호충은 점잔 떨던 말투를 버리고 편히 말했다.
“가면 고생만 진탕한다고. 괜히 그 먼 곳까지 먼지 먹으며 달리지 말고, 여기서 편히 쉬어.”
“···명하시면 따르겠사옵니다.”
“폐하를 지키라는 건 진심이야. 진패 놈의 처(妻)가 모용가의 여인이잖아. 모용가는 태자와 태자비를 보호한다며 상주 무인들을 파견했어. 만약 모용가에서 수를 쓰면 위험하니까 송 영감이 잘 지켜봐.”
“···최대라고 해봤자 모용 가의 석성신공이겠지요.”
송 영감의 경지는 한참 전부터 모용 세가의 가주가 익히는 석성신공을 깔봐도 될 정도였다.
“큼. 폐하께서 영감을 많이 챙기시잖아. 옆에서 말동무도 해드리고, 엉기는 놈 있으면 지그시 눌러주고 해야지.”
“제가 남는 것이 태자 전하께 도움이 된다면 남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폐하께 도움이 된다니까 그러네.”
“······.”
송 영감이 침울해 있어 호충은 한 명을 더 붙였다.
“상방주도 황궁에 남아.”
“옛? 제가 왜요?”
옥비연은 자기 뭘 잘못했냐는 듯이 따졌다.
“어허. 말이 많다. 남으라면 남을 것이지···.”
“마교 새끼를 족치러 가는데 제가 빠지면 섭섭하죠.”
“야. 상방이 황궁 직속 상단으로 성장할 기회를 놓칠래?”
“!!”
황제가 뒤바뀐 혼란한 상황이지만, 그 황제는 문주의 아버지였고, 문주는 태자로 봉해졌다. 삼도상단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를 때였다.
“이젠 모용가도 없이 네가 직접 황궁과 거래를 틀 수 있는데?”
“······.”
“그리고 송 영감이 저 나이 먹고 직접 뛰랴? 네가 대신 뛰어야지 새끼야. 송 영감이 상방의 전대 방주다?”
“···에효. 남겠습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필요했다.
“흠양신 너도 남아서 황궁에 침입하는 놈이 있나 감시해.”
“···저도요?”
“황궁 금의위를 우리가 다 작살내 놨잖아. 그 전까진 집을 지켜야지. 아무리 서천량 대장군의 군대가 금의위를 대체해도 그들로는 부족해. 어차피 네 놈이 마교 교주 잡는데 따라가 봐야 도움이 될 것도 아니고···.”
“······도방 애들 소집하겠습니다.”
도둑이 황궁을 지키게 생겼다.
“패방주와 흑림방주는 나와 같이 간다.”
“옙! 감사합니다. 전하.”
“헤헤. 따르겠습니다요. 전하.”
“대신!! 오늘은 다 같이 가자. 유 단주가 술상 봐놨단다.”
출정이 급하긴 하지만, 대군의 출정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서천량 대장군에게 아무리 빨라도 내일 저녁은 되어야 출정 준비를 마칠 수 있다고 전해들은 호충이다. 남경 안의 혼란을 잠재우고 선황제를 따르던 이들을 정리해야 했으니, 내일 저녁도 빠른 것이다.
“하하하. 오늘은 먹고 죽읍시다.”
“가자!”
***
“······.”
“······.”
“······.”
“······.”
“······.”
남경 하오문 지부에 도착한 방주들은 자리에 착석해 부동자세였다. 술상을 준비한 유도영도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있었다.
문주 호충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한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어, 언제 왔어?”
“저도 출정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유 단주가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왔더니 술상을 차리고 있기에 돕고 있었답니다.”
궁에서 환복하며 따로 나왔던 화진이 술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먼저 환복하고 나왔는데···.’
화진과는 나중에나 다시 합류할 생각이었다.
“루방에 먼저 안 들렀어?”
어젯밤부터 남경에서 관인들을 비롯해 남경 수도군의 지휘관들을 붙잡느라 수고한 루방에 먼저 가보리라 여겼는데, 이곳에 먼저 왔기 때문이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언제나 태자 전하 곁이랍니다.”
“······.”
“······.”
부문주 사중환을 비롯한 방주들은 루방주 화진을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이제 태자의 반려인 태자비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이런 날 술을 드셔야지요.”
쪼르륵.
화진이 호충의 잔에 향기로운 술을 채웠다.
“그럼 먹어도 되는 거지?”
어차피 기루에서 여인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방주들과 편히 술을 마시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기에 호충은 방주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술잔을 들었다.
“자자. 들자. 들어.”
“···예.”
“그, 그럼 저도···.”
하지만 이어진 화진의 말이 모두의 행동을 멈췄다.
“폐하를 곤란케 만든 마교의 교주만 잡는다면 뭐가 문제겠어요.”
“······.”
“······.”
잔을 들던 호충도 슬며시 다시 잔을 내려놨다.
“어제 마교의 부교주 놈을 잡긴 했는데···. 교주 놈은 도주할 가능성이 크거든.”
“못 잡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죠?”
“대략 오 할.”
사실 호충은 교주를 잡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지 않았다. 부교주의 수급이 도착하기 전에 교주가 남경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받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부교주의 수급을 보낸 것이다.
“그 와중에 술을 드실 생각이었어요?”
“······.”
“선황제의 진짜 아드님도 찾으셔야 한다면서요?”
“···그게 두 번째 목적이긴 하지. 하나는 마교의 말살, 다음은 선황제의 아들을 진패 놈과 바꿔치기한 관련자를 찾아 진짜 황실의 핏줄을 찾는 것. 마지막이 교주 놈을 잡는 것.”
호충도 잊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선황제의 아들이 바꿔치기 된 것도 이십년 전의 일이라 쉽지 않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부문주님?”
“예, 옙.”
“지금 신강으로 뛰셔야할 것 같습니다만···. 교주가 도주하기 전에 막아야겠지요?”
“···바로 가겠습니다!”
사중환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소리쳤다.
“신강으로 가자! 교주 놈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천라지망을 더 촘촘하게 펼쳐둘 것이다!”
사중환은 밖으로 나서면서 말동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너도 같이 가야지 뭐하냐! 개방이 숫자가 제일 많잖아!”
“우엑!”
화진의 시선이 유도영을 향했다.
“남경의 혼란을 변방에서 전쟁이나 치르던 병사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정보단이 움직여야 내일 조금이라도 빨리 대군이 출정할 수 있지 않겠어요?”
“옙. 제가 정신이 빠졌나 봅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유도영은 화진의 명에 후다닥 술자리에서 도주했다.
“상방주.”
“저, 저는 황궁에 남기로···.”
황궁에 남는 것은 우선이 아니었다.
“지금 신강에 무림맹에 속한 무림 방파들을 불러들였다고 알고 있어요.”
신강의 마교를 하오문이 홀로 감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교는 정파 무림 전부의 일이었다. 그래서 마교의 본부가 있는 신강의 정보를 무림맹에 흘렸고, 무림맹은 이번에야말로 마교를 뿌리 뽑겠다며 나선 상태였다.
“이번 출정에 남궁가와 제갈가, 화산파가 포함되어 있고 진가장의 무사들도 포함되어 있지요. 근래 맹주의 교체에 관한 주장도 맹에서 크게 다뤄지고 있고요.”
맹주 호현의 무위가 문제였다. 맹주의 무위가 크게 부족하다는 소문이 돌면서 새로운 맹주를 추대해야 한다는 무림 방파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었다.
“이번 마교 토벌에 크게 공로를 세운 무림인이 맹주가 될 가능성이 큰데, 손 놓고 있으실 겁니까?”
“···누구를 맹주로 세우는 것이 좋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화진의 말을 듣던 호충이 입을 열었다.
“화산파로 하지. 아니면 네가 할래?”
“상방의 일이 바빠서···. 저는 나이 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맹주의 임기는 오(五)년으로 하고, 중임까지만 허락하는 것으로 해서 최장 임기를 십(十)년으로 정하자. 그래야 다른 무림 방파의 수장들이 돌아가면서 맹주의 자리를 앉을 수 있을 테니까.”
“합당하신 말씀입니다. 맹의 규약을 변경해보겠습니다.”
“화진이 상방주가 나서라고 했는지 짐작은 해. 나도 같은 생각이고.”
“남궁가와 제갈가를 처가로 둔 진가주가 나서서 화산파를 밀어주면 화산파의 장문인 무환이 맹주로 추대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번 마교 토벌에 나서지 않으면 감히 의견도 내지 못하겠지요.”
“화진의 생각이 옳아. 마교 토벌에 나서지 않은 무림인이 맹의 일에 왈가왈부 할 수 없겠지. 상방주는 이곳의 일을 잠시 미뤄두고 토벌에 다녀오자.”
“···예. 전하.”
“그래도 술 한 잔은 괜찮···.”
화진은 나중에 가라는 것이 아니었다.
“서 대장군의 대군과 함께 갈 이유가 없으니, 지금 출발하세요. 진가주는 신강으로 출발한 무림맹 토벌대와 합류해야 하지 않겠어요?”
“옙!”
옥비연도 후다닥 뛰쳐나갔고, 남은 것은 흑림방주 왕호와 도방 흠양신 그리고 송 영감이었다. 송 영감은 화진이 왜 방주들을 내보냈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자리가 이리 되었으니 저는 이만 폐하께 가보겠습니다. 마마.”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송 노사.”
왕호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저는 유 단주를 도와 남경의 일을 마무리하지요.”
“···부탁해요.”
흠양신도 눈치 빼면 시체였다.
“제가 깜빡하고 도방 놈들에게 소집 통보를 안했지 뭡니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남은 사람은 호충과 화진 둘이었다.
호충이 잔을 들어 마시는 동안 화진은 살포시 호충 곁에 앉았다.
꿀꺽. 탁.
“에효. 결국 다 쫓아냈네.”
“···우리 너무 오랜만이잖아요.”
“태자비도 한 잔 줘?”
“황송하옵니다. 태자 전하.”
쪼르륵.
호충이 잔에 따른 술을 단숨에 들이키는 화진이다.
“크흐. 이게 얼마 만에 술인지.”
시아버지가 곁에 있는데 어찌 술을 마셨겠는가. 진휘평과 함께하며 몇 년간 술은 냄새도 맡지 못했던 화진이다.
“고생 많았어. 오래도록 아버지 곁을 지킨 화진을 먼저 챙겨야 했는데, 내가 시커먼 놈들만 챙겼지?”
“···잘 하셨어요. 고생한 문도들을 챙기셔야지요.”
“잘했다면서 다 쫓아내?”
“훗. 그래도 저는 제가 먼저인 걸요? 잘 하셨지만, 저는 괜찮지 않으니까요.”
“큭. 그럼 우리끼리라도 먹자.”
화진이 술을 한 잔 마시긴 했지만, 둘이 같이 술자리를 하자는 뜻은 아니었다.
“···가가. 제 나이가 몇인 줄 아세요?”
호충이 올해 스물넷이다. 화진이 처음 호충을 만났던 때에 이미 화진은 스물다섯이었다. 화진의 겉모습은 여전히 이십대로 보이지만, 실제론 서른을 한참 넘겼기에 마음이 조급했다.
“···왜 또 나이 얘긴 꺼내? 화진이 얼마나 젊고 예쁜데···.”
“저 급해요. 술잔 내려놓고 올라와요.”
조급한 정도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일을 치러야 했다.
“어, 어?”
“어차피 폐하께 허락도 받았고 태황후마마도 뵈었잖아요. 빨리 애부터 가져야겠어요.”
이를 위해 방주들을 모조리 내보낸 화진이었다.
“애? 우리 아이를 갖자고?”
“더 늦으면 애도 못 낳는다고요!”
“아, 아니 그래도 혼례는 치러야···.”
“선황제의 상을 치르고, 폐하 즉위식하고···. 언제 우리 혼례를 치러요? 그날이 오기는 한데요?”
선황제의 상이 치러지는 중에 혼례를 치를 수야 있겠는가. 나라의 최고 권력자였던 선황제의 상을 치르자면 몇 년은 우습게 지나간다.
“······.”
‘상(喪)중에 애를 낳는 건 괜찮고?’
의문이 들었지만, 호충은 화진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빨리 올라와욧! 앞으로 회임이 될 때까지 시도할 테니 그렇게 알아요!”
아무리 무신(武神)이라 불리는 호충이라도 조장지처는 그 위였다.
“아, 알았어.”
호충은 신강으로 가는 내내 합방 확정이었다.
화진이 괜히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황궁의 법도에 따르다 보면 언제 아이를 갖을 수 있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애를 못 낳으면···. 끝장이야!’
태자는 길일을 정해 합방 날짜를 정하고 그 날이 아니면 합방도 할 수 없는 황궁의 법도가 있었다. 그렇게 합방 날을 기다리다 언제 아이를 갖겠는가. 화진은 황궁에 정식으로 태자비가 되기 전에 무조건 아이 먼저 가질 생각이었다.
‘만약 다른 빈궁을 들이기라도 하면···.’
화진은 거기까지 생각하면 까마득했지만, 지금은 애가 우선이었다.
“나도 신강에 가봐야 하는 건 알지?”
“누가 안 보내드린다고 했어요? 나도 같이 가면서 애 만들 거라고요!”
“······.”
호충은 회임이 될 때까지 시도한다는 말의 의미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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