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잠(金簪)
***
소야는 작은 봇짐을 등에 메고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가고 있었다.
뒤에서 자신을 배웅하는 마한로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돌아보면 떠나지 못할 것 같아 돌아설 수가 없었다.
[소야 사형. 사형이 어디서 살던 우리가 맺은 인연이 사라지겠습니까.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갈 것이니, 지금은 앞만 보고 가십시오.]
소야는 마한로의 전음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크흑.”
[스승님이 사형께 모든 것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스승님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굳게 먹으십시오.]
“그래. 언제까지 남에게 기대 살 것인가. 나는 나의 세상을 살겠다.”
소야는 눈물을 훔치고 당당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고, 곧 태자와 황군을 마주칠 수 있었다. 스승의 말대로였다.
“소야가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오.”
호충은 소야가 달라졌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영단으로 이토록 짙은 서기(瑞氣)를 얻을 줄이야···.”
“영단이 아닙니다. 스승님께서 제게 전해주셨습니다.”
“스승님은 무탈하신가?”
“···저 때문에 힘을 잃으셨습니다.”
“저런···.”
“황궁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는 낫다.”
호충은 노야산 정상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얼른 몸을 돌렸다.
‘언젠가 다시 연이 이어지겠지요.’
***
소야는 노야산 밑으로 내려가 자신을 기다리는 마차를 볼 수 있었다. 휘황찬란한 마차가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자연스럽게 마차에 오르는 소야였다.
소야는 자신과 함께 마차에 오른 호충을 향해 물었다.
“제 아버지께서는 어찌되셨습니까?”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듣기는 했지만, 정확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야 자신의 길도 정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너도 황족이 되었으니, 다 알아야겠지.”
호충은 소야의 아버지인 선황제가 어떻게 황위를 차지했는지 부터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전대 황제가 본래 후계자로 삼았던 진휘평을 누르고 어떻게 황위를 차지했는지, 또 그 이후에 동생을 어찌 추적했는지로 이어지는 길고 긴 이야기였다.
“······.”
“곧 폐하의 즉위식이 있을 것이고, 이후에나 선황제 폐하의 상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 사이 황제에 빌붙어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던 못된 신하들을 숙청해야 하고, 황제의 지배력이 부족한 곳에서 사병을 기른 지방 호족들의 힘을 빼고 토지를 몰수해야 하며, 대신들의 권한도 축소해 강력한 황권을 만들어낼 것이다.”
말은 간단했지만, 사실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이제 막 황위에 오른 황제가 무얼 알고 대신들을 숙청하겠는가. 황궁 내부의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호족은 정말 문제였다. 오랜 시간 지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한 호족은 무림세력과 붙어 권세를 누리고 있었기에 이들을 처리하자면 대신들의 거센 반발을 감당해야 했다. 대신들도 호족 세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습니다.”
“큭.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더냐?”
소야는 태자 진호충이 하오문의 문주를 겸한다는 사실을 방금 들은 터였다.
“대신들의 비위는 이미 모두 파악해두었고, 지방 호족 세력의 동태와 보유한 무력도 모두 파악하고 있다. 특히 무림은 걱정할 것도 없지. 너는 선황제 폐하의 뜻에 따라 편히 살면 된다.”
“전하. 일을 나눠주십시오. 저도 한 몫을 하겠습니다.”
“하하. 네가 돕겠다면 나야 좋지.”
***
호충은 돌아가는 길에 신강에 들러 마무리를 했고, 황궁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성과를 보고했다.
“백성을 혹세무민하던 마교를 해체하였고, 역모에 관련한 이들을 잡아들여 모두 참수하였나이다. 또한 폐하께서 그토록 기다리시던 선황제 폐하의 아드님을 찾아왔나이다!”
“수고하였다. 태자. 정말 수고가 많았느니라.”
“다만 마교의 수장인 교주를 잡지 못하였나이다. 벌하여주소서.”
호충은 이 말을 전하며 은밀하게 황제에게 전음을 날렸다.
[잡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잡지 않았습니다.]
“!”
[교주는 제가 미리 손을 쓴 덕에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었나이다. 교주의 몸은 지독한 독을 뿜어내고 있는 바. 더러운 몸을 폐하 앞으로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교주가 죽으면 그 시신을 가져와 벌하겠나이다. 교주의 가문은 대가 끊겼으니 이후의 일을 걱정할 것도 없나이다.]
“허허. 거기까지 손을 써두었더냐. 태자는 입으로 뱉은 말을 모두 지켰노라.”
이후 어색한 용포를 입은 소야가 황제의 앞으로 나왔다.
“만세만세만만세. 소야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너로구나.”
진휘평은 용상에서 내려와 소야에게 다가왔다.
“네가 형님의 아들이로구나.”
“······.”
“늦었지만, 네 자리를 찾아 다행이로다. 대소신료는 들어라.”
““예. 폐하! 하명하소서.””
“선황제이신 형님의 아들 소야를 양자로 삼을 것인 바. 소야에게 이황자의 지위를 내릴 것이다.”
““예. 폐하. 영명하신 결정이시옵니다.””
***
이후 호충은 하오문과 황궁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이어갔다. 황궁에선 황제 다음가는 황태자의 지위였고, 무림에선 하오문의 문주였고, 또한 무림을 뒤에서 조정하는 장막 뒤의 지배자였다.
흑림방 내부에선 호충의 이러한 행보에 무신(武神)이라는 별호와 더불어 다른 칭호를 붙여 부르곤 했다.
“흑림의 황제 무신(武神).”
흑림방주 왕호가 흑림의 왕이라는 별호를 쓰고 있었으니, 문주에겐 그보다 높은 황제라는 별호를 붙인 것이다.
“야. 문주님이 네 친구냐? ”
“아. 그럼 흑림의 황제 폐하 무신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누군가 그들 사이에 들어와 대꾸했다.
“너무 길다.”
“그치 길지? 그냥 흑림의 황제라고만 부를까?”
아직 새로운 인물을 눈치 채지 못한 동료에게 흑림방도는 조용히 전음을 날렸다.
[넌 그 입 좀 다물어.]
“왜 갑자기 전음이야?”
고개를 돌린 흑림방도는 검은 야행복을 입은 문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헤헤. 언제 오셨답니까.”
“네가 흑림의 황제 무신(武神)이라고 부를 때부터?”
“딸꾹.”
“아버지께서 멀쩡히 살아계시는데 날 황제로 불러? 너 날 역모로 몰아갈 셈이냐?”
“딸꾹!”
“네가 뒈질라고 작정을 했지.”
“죄, 죄송합니다. 문주님. 살려주십시오.”
“네가 앞으로 할 일을 일러주마.”
호충은 말을 함부로 내뱉은 흑림방도에게 합당한 벌을 줄 생각이었다.
“예, 옙! 하명하십시오!”
“너는 황궁 수호 신위 하나와 자리를 바꾼다. 동서남북, 매란국죽 중에서 골라라.”
“힉!”
황궁의 수호 신위는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지고한 신분이었지만, 흑림방도에겐 자유를 앗아가고 퇴근을 보장할 수 없는 최악의 일자리였다. 지금 수호 신위를 맡고 있는 이들도 본래 호충을 호위하던 흑림방 호위대 중에서 차출되었기에 바꿔주기만 한다면 얼씨구나 하며 흑림방으로 돌아올 것이다.
“고르라니까!”
“으······.”
“네가 못 고르겠다면 내가 골라주마. 근래 국(菊)을 맡은 녀석의 부인이 애를 낳은 모양이더라. 애가 태어났는데, 아비가 없으면 집이 얼마나 허전하겠느냐. 앞으로 네가 국(菊)을 맡을 것이다.”
“허흐흥. 들어가면 언제 나올 지도 모르는데···.”
“금의위 장군급 녹봉이 나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이야.”
“···흐흑. 지금 받는 거랑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요.”
“그래도 네 자식은 아비가 하오문 무사인 것보다 황궁의 금의위인 것이 자랑스러울 것이야.”
“···흠흠. 그렇긴 합니다요.”
호충은 말을 주고받던 다른 흑림방도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같이 역모를 꾸미던 네 놈도 벌을 받아야겠지?”
“저, 저는 아무런 말도 안 했습니다요!”
“너도 이 녀석이 하는 말을 들었잖아. 새끼야. 듣기만 해도 죄다.”
“크허엉.”
“큼. 남(南)을 맡은 남강청은 쌍둥이를 낳았다고 했어. 너는 딱 이 년만 수고해라.”
“흐흑. 남 조장은 황실 호위 중에 애는 또 언제 만들었답니까.”
남강청은 예전 자장 흑패에서 흑조 조장을 맡고 있었기에 아는 이들은 남 조장이라고 불렀다.
“그러게 말이다. 어쨌든 네가 수고 좀 해라.”
“···예. 문주님. 대신 딱 이 년만 입니다.”
“내가 약속은 확실하게 지키잖냐. 남 조장은 우선 북문 금의위 위장으로 옮겨두고 나중에 꼭 바꿔줄게.”
황실 수호 신위의 가정사를 해결한 호충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 환복하고 아버지를 만났다.
“폐하. 소자 저녁 문안인사 드리옵니다.”
“잘 왔구나. 안 그래도 부를 생각이었다.”
진휘평은 근래 신하들의 등쌀에 골이 지끈거리고 있었다. 황제파 신하들을 내치고 실력 있는 신하들을 남긴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익힌 학문에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었다.
“유학자들이 저마다 제 말이 옳다며 상소를 올려대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본래 정치라는 것이 이렇다. 다 같이 황제의 아래에 위치한 신하들이지만, 당과 파를 나눠 서로를 헐뜯고 자신을 추켜세우기 좋아했다.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며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하기 좋아한다. 맹자는 인을 강조한 이유가 유학자들의 이러한 행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한을 넘겨주셔야 합니다.”
“응? 권한을 넘겨줘?”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호족 세력까지 견제하는 중이었다. 권한을 신하들에게 넘기면 황권이 약화되지 않겠는가. 호충의 주장은 지금까지 실행한 황권강화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었다.
“권한을 넘기면 당파 싸움이 더욱 심화되지 않겠느냐? 황제의 힘은 어쩌고?”
“두 곳에 넘겨주면 그리 될 것이나···.”
호충의 생각이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내리면 당파 싸움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모두에게?”
호충은 입법과 행정, 사법과 재정, 감찰, 군을 세분화해 맡고 있는 각 기구에 저마다 서로를 감찰 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정 제도의 완전한 개편이나 다름없었다. 황제조차 감찰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신하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함과 동시에 황제를 향해서도 이 칼날을 겨눌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다보면 당파의 색은 옅어지고 오직 조직에 충성하는 이들만 남게 됩니다. 이들은 서로를 탄핵하며 반목할 것입니다. 지역으로 이어진 유학자들의 학파, 혈연으로 이어진 수직적 관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를 향해 의심의 눈을 거두지 못하는데, 당파가 어찌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
“또한 이로서 황실의 중앙 집권은 더욱 힘을 얻게 되지요. 이들에게 감찰 권한을 내려준 분은 바로 황제 폐하이시기 때문입니다. 폐하께 올라오는 저들의 상소는 서로를 탄핵하는 상소로 뒤바뀔 것이니, 권한 나눠 주며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지요.”
“하! 명료한 답이 아닌가!”
“오래전부터 가져온 생각이나, 나라가 안정화 된 다음에나 실행할 수 있는 안건이라 늦게 고했나이다. 게다가 지금은 황위 교체로 국정 개편으로 인한 혼란이 용인되는 시점입니다.”
“옳다. 지금이 적기다.”
“다만 이와 같은 목표는 누구도 몰라야합니다. 그저 자신들이 황제의 감찰 권한을 나눠가질 수 있다는 점만 부각하소서. 그래야 더욱 이 정책이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중앙의 권한이 더욱 막강해지겠구나. 좋구나. 좋아!”
“폐하. 이것만 기억하소서. 나라도, 황제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는 법이옵니다.”
호충은 어렴풋이 기억나는 민본(民本)을 설파한 것이다.
“짐은 언제나 태자에게 배우노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하하하. 태자는 가서 주명이를 데려 오너라. 기분이 좋아 주명이를 보아야겠다.”
주명은 호충과 화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화진은 자신의 바람대로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토록 많은 밤을 보냈으니 아기가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밤이 늦어 잠들었을 것입니다.”
“에잉. 고 귀여운 녀석을 봐야 짐이 하루를 마무리할 것인데···.”
“···깨워서 데려오지요.”
“잠깐만 보겠노라.”
진휘평은 아들이 낳은 손자가 예뻐서 뭐든 해주고 있었다. 선황제가 애지중지했던 보주까지 장난감으로 주명에게 내려준 일이 있었다.
이제 고작 돌이 지난 주명에게 보주는 그저 빛이 나는 신기한 구슬일 뿐이었다.
‘아기가 그 큰 보주를 어떻게 가지고 놀라고···.’
화진은 호충의 부름에 아들 잠든 아들을 품에 안고 황제의 거처로 가야 했다.
“······.”
“폐하께서 얘를 너무 예뻐하시네.”
호충도 화진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예뻐하시면 좋죠. 태자비는 너무 기쁘답니다.”
“전혀 기쁘지 않은 표정인데?”
억지웃음을 짓던 화진이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일찍 자야 잘 큰다면서요. 이러다 깨면 한참이나 못 잘 텐데···.”
“그러니까 내가 오기 전에 문안 인사를 드리라고···.”
황실의 예법이 있는데, 태자비가 저녁 문안을 빼먹었겠는가. 주명과 함께 저녁 문안인사를 올리고 돌아가 잠에든 참이었다.
“문안 인사는 드렸거든요?”
“···그래?”
“오늘만 세 번째로 뵙는다고요. 오늘은 한 말씀 드려야겠어요.”
“워워. 아직 주명이가 어려서 그러실 거야. 조만만 더 크면 징그럽다고 하실 걸?”
“···해본 말이죠. 어쨌든! 전하는 끝나고 태자비의 궁으로 오세요.”
“당연하지. 혹여 주명이가 놀자고 하면 내가 놀아줄 터이니 그대는 편히 자도록 해.”
호충은 자상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이를 실제로 화진과 아들 주명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름 행복한 황궁의 생활이었다.
“둘째를 빨리 만들어야 하니 오시라는 말씀입니다만?”
“···두, 둘째?”
“주명이 혼자는 외롭잖아요.”
“······.”
또 시작이었다.
“이러다 밤을 새겠네요. 저 먼저 가요.”
화진은 시간을 지체했다는 듯이 급하게 아기를 안은 몸을 돌려 어전으로 향했다.
그녀가 틀어 올린 머리엔 과거 북궁초연이 귀하게 여기던 금비녀가 꼽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