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오(十五)년
***
어느 날 한 사람이 황궁에 관을 들고 찾아왔다. 관병들은 창과 방패로 저지하려고 했지만, 관을 어깨에 둘러맨 이의 용력이 대단하여 막지 못했고, 윗선에 보고했다. 그리고 황실 금의위가 나섰다.
“감히 폐하께서 계시는 황궁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네 이 노오옴···.”
남문 금의의 위장는 호기롭게 나섰지만, 말끝을 흐렸다.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마형?”
“남강청. 네가 금의위가 되었더냐?”
관을 든 마한로는 과거 자장 흑패의 일원이었던 부하 남강청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당시에도 흑조의 조장을 맡았던 남강청은 황제의 수호 신위에 소속되어 있다가 금의위로 이동한 것이었다.
남강청은 병졸들부터 뒤로 물렸다.
“다들 창을 거두고 물러서라!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강청은 얼른 마한로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마형이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그 관은 또 뭐고요?”
마한로는 관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전엔 미안했다. 내 일찍이 사죄해야 했지만, 이제야 사과를 전하는구나.”
“아휴. 옛날 일이 아닙니까. 흑패는 당연히 때리고 맞으면서 살아야 정상이지요.”
“허허허. 나는 가슴에 대못처럼 박혀 있었던 일이나 너는 다 잊은 것 같구나.”
“자장에서 마형과 함께했던 모두가 같은 마음입니다. 오히려 이 황자 전하처럼 나서지 못한 것에 못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요.”
“이 황자라···.”
소야가 이 황자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직접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던 탓이다.
“혹시 태자 전하께 과거의 잘못을 물으시려 오셨다면 제가 모른 척 해드릴 터이니 어서 돌아가십시오.”
“설마 내가 태자 전하께 무례하게 굴겠느냐. 태자 전하의 명으로 가져온 관이니 전하께 고해다오. 이들이 날 들여보내주질 않아 난감한 차였다.”
“태자 전하의 명이시라고요?”
남강청은 관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일전에 태자 전하를 만났다. 그리고 태자 전하께서 이 주검을 가져오라 명하시었기에 황궁으로 가져온 것이다.”
“마형은 잠시 기다려 보세요. 제가 얼른 안에 고하겠습니다.”
곧 남강청이 돌아와 말했다.
“마형. 태자 전하께 직통으로 전달되는 편에 말씀을 전했으니, 마형의 말이 사실이면 곧 나오실 겁니다.”
“아는 사람이 있으니 이리 편하구나. 고맙-.”
피잉.
고맙다는 말을 하던 마한로는 남강청의 뒤통수에 날아드는 단검을 알아차리고 움직였다.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서 홀로 움직이는 듯한 속도였다.
척.
“마형?”
남강청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마한로를 자신의 뒤에서 찾을 수 있었다.
“······.”
마한로의 검지와 중지에 단검의 날이 잡혀 있었다. 멀리서 남강청의 뒤통수로 단검을 날린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다리는 다 치유된 모양이군. 다행이야.”
호충이 용포를 입고 마한로 앞에 나섰다. 마한로는 얼른 단검을 잡은 손가락을 풀었는데, 단검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스스로 날아 호충의 품으로 들어갔다.
피잉.
‘태자께서 나를 시험하신 것이로구나. 막지 않아도 남강청이 위험하지 않았을 것을···.’
“마한로. 잘 있었는가?”
“천세천세천천세.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하하. 그 사이 예까지 익혔어?”
“······.”
마한로는 가만히 엎드려 호충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호충은 마한로가 들고 온 관에 잠시 눈길을 주고 물었다.
“···결국 갔는가?”
“예. 스승님께서 영단까지 먹이며 치유를 위해 노력하셨지만, 병세는 큰 차도가 없었습니다.”
“쉬이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불치의 병이었지.”
“···저는 사형은 잘 지내는지 궁금하옵니다.”
호충도 마한로도 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죽은 이의 주검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들어가세. 오랜만에 봤으니 서로 인사는 해야지.”
“아니옵니다. 저 또한 스승님을 따라 선계로 가려 노력하는 몸. 인세에 괜한 미련을 둘까 두렵습니다.”
마한로는 그간 연만호와 함께 선계 수련을 지속하며 오욕칠정을 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대의 스승에게 이미 말하였으나,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로구나. 오욕은 노력으로 떨쳐낼 수 있으나, 칠정은 쉬이 내려놓기 어렵다. 여기까지 와서 사형을 만나지 못하면 마지막까지 후회로 남을 것이야. 차라리 직접 대면하여 그대의 정이 얼마나 깊고 진한지 확인하는 편이 좋다.”
당시 연만호와 심어로 대화했기에 마한로가 듣지 못한 것이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쉬이 내려놓을 수 없었사옵니다.”
“가자. 가서 보고 천천히 내려놓아라.”
“예. 전하.”
호충은 관을 금의위에 맡기고 마한로와 함께 황궁으로 들어갔다.
***
소야는 그간 익히지 못한 문(文)을 익히며 황실의 일에 적응하려 애써왔다. 예전 같으면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거북이처럼 느린 습득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소야는 한번 자리에 앉으면 두 시진 이상을 집중력을 발휘해 문(文)을 익혔고, 지금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유학자의 투서를 읽고 문맥을 파악할 정도가 되었다.
이는 태자 호충의 명령이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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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였다. 소야. 그릇은 일정한 용도에 쓰이기 위해 저마다 다른 크기를 갖는다. 하지만 군자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호충은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말을 통해 소야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그럼 저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모든 것을 갖추고 폭 넓은 지식을 쌓아라. 그래야 만백성을 이해할 수 있다. 더 협소하게 한정하면 위정자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더 작게 말하면 내 가족과 친지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앎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깊고 넓게 익히겠나이다.”
.
.
.
덕분에 소야의 배움은 문(文)에 그치지 않고 농사와 기술, 상업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나라는 넓었고 배움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제는 배우는 것을 즐기는 정도였다.
‘스승님께서 마지막에 내게 베푼 힘 때문이겠지.’
막힌 상단전의 혈이 뚫리며 발휘한 효과이니 소야의 생각은 옳은 것이었다.
휘이잉.
“!”
서책을 들여다보던 소야는 바람으로 전해지는 작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사방이 막힌 이곳에서 어찌 바람이 부는가.’
이는 바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연만호가 평소 천기를 읽을 때 느끼던 감각과 같은 것이었다.
‘헌데 바람에서 어찌 그리움이 느껴질 수 있는가.’
연만호가 소야에게 넘긴 서기가 발휘한 힘이었다. 천기를 읽는 힘이 소야에게도 생긴 것이다.
소야는 곧 밖에서 환관이 전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 황자 전하. 태자 전하께서 오셨나이다.”
소야는 지난 몇 년 황실의 생활에 익숙해졌기에 익숙하게 답할 수 있었다.
“어서 뫼시어라.”
소야는 자신의 거처로 들어오는 태자에게 허리를 숙이다가 우뚝 멈춰버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
태자의 뒤로 그리운 얼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 반갑더냐? 그냥 보냈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
소야는 마한로를 그렁그렁한 눈으로 보다가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강녕하십니까.”
“······.”
‘조금 회복하셨지만, 손자를 살리겠다며 기운을 쏟아 부으셔서 전보다 더 안 좋으십니다.’
마한로는 차마 소야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여전하십니다. 과거 잠시 기운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셨으나, 금방 회복하셨지요.”
“다행입니다. 사제는 어찌 지냈습니까.”
“···스승님과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멀고도 먼 길이지요.”
“사제는 잘 해낼 것입니다.”
“···어찌 지내셨습니까.”
“나는······.”
둘의 대화중에 호충이 나섰다.
“언제까지 문 앞에 손님을 세워두고 있을 참이야?”
“아. 죄송합니다. 태자 전하. 상석에 앉으시지요.”
호충은 둘이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었다.
“나까지 앉을 필요 있나. 마한로와 담소 나누도록 해. 끝나면 마한로는 내게 다시 찾아오도록. 환관이 안내해줄 것이야.”
“예. 태자 전하.”
호충은 소야와 마한로를 두고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
***
“폐하. 황궁에 마교 교주의 주검이 도착했나이다.”
마교의 교주는 부관참시(剖棺斬屍)라도 해야 할 역적의 수장이었다.
“지난 일이나 본보기를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일.”
“옳은 말씀이십니다.”
호충은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황제에게 전음을 보냈다.
[교주의 주검에 독이 여전합니다. 성문에 효시하면 백성들이 상할까 두렵사옵니다.]
“!”
[일전에 사형당한 다른 죄인의 목을 걸어 교주가 죽었음을 공표하시고 교주의 주검은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원 땅에 교주의 주검이 남으면 주변을 오염시킬 것입니다.]
‘죽어서도 그 정도로 강한 독성이 남았단 말인가.’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명령을 내렸다.
“사이한 교단을 해체하고 역모를 막아낸 태자가 아닌가. 역적의 수괴를 처분하는 것 또한 태자의 뜻에 따를 것이니, 태자는 원하는 대로 행하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호충은 기껏 들고 온 교주의 시신을 온전히 돌려보내줄 생각이었다.
‘나의 작은 호의로 여겨주시오.’
***
호충은 태자의 집무실에 찾아온 눈이 퉁퉁 부어있는 마한로를 만날 수 있었다.
“얼씨구? 아예 칠정의 끝을 보셨어?”
“···부끄럽사옵니다. 전하.”
“그래도 후련하지?”
“예···. 전하 덕분에 제 깊고 진한 마음을 알아 볼 수 있었고, 미련하게 남았던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떨칠 수 있었나이다.”
“나도 귀동냥으로만 들었지만, 선계에 드는 일이 쉽지 않을 거야.”
무림인이 무공을 익히는 근원적인 목적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 있지 않았다. 본래 신선이 되고자 무공을 쌓는 것이 무공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상사가 관여하고 남들보다 위에 서려는 개인들의 욕심이 더해져 현재의 무림이 된 것이었다. 호충도 무림인이니 어찌 신선의 도를 듣지 못했겠는가. 황궁 비고엔 신선의 도를 설파하는 비급도 상당히 많았다.
“쉬운 길은 도(道)가 아닙니다. 어려우니 도(道)이지요.”
“어떤 이는 쉽게 가고 어떤 이는 어렵게 가니 도(道)이기도 하다.”
“전하는 아는 것도 많으십니다. 허허.”
“황궁에서의 볼일은 끝인가?”
“본래 맡겨진 일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그래?”
마한로는 품에서 작고 투명한 구슬을 하나 꺼냈고, 서찰도 꺼내 내려놨다.
“스승님께서 태자 전하께 전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구슬은 무엇인가?”
서찰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영롱한 빛을 발하는 구슬은 짐작할 수 없었던 탓이다.
“스승님께서 신선의 도를 닦으시다 시공(時空)의 공능을 조금 깨달으셨다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따른 결과물이지요.”
“!!!”
“또한 천기를 깊이 읽어 조만간 태자 전하께 변고가 생길 것이라 말씀하시며 이 구슬과 서찰을 주셨습니다.”
“서찰부터 읽어보지.”
호충은 얼른 서찰을 펼쳐들었다.
[태자여. 그대에게 이 서찰을 쓰는 것은 둘째 제자가 이해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네. 또한 태자가 시공을 초월해 이곳에 있다는 것은 누구도 몰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긴 그걸 누가 믿겠어?’
직접 자신의 과거를 읽은 연만호가 아니라면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나는 손자가 죽고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졌다네. 하지만 이 때문에 신선의 도에 진보를 볼 수 있었으니, 기이한 일이지.]
소야를 보내며 칠정의 일부를 내려놨고, 손자 소문을 떠나보내며 칠정의 대부분을 내려놓은 것이다.
[둘째 제자에게 모든 것을 전했기에 이제 인세 남은 미련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네.]
거의라는 말은 완전하지 않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리고 내게 태자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네.]
‘내가 그에게 미련을 남긴 원흉이었던가.’
이어진 연만호의 글은 마한로가 입에 올린 변고와 구슬에 관한 것이었다.
[태자의 변고를 미리 경고하고 이를 대비하는 것으로 우리의 은원을 끝내고자 하네.]
‘은원이라···.’
사실 은원이라 부르기는 어려웠다. 서로를 향한 호의가 전부가 아니었던가. 호충이 은원을 따져야 할 것은 교주 연소문이지, 연만호가 아니었다.
[근래 높아진 도력으로 천기를 읽으니, 흐트러진 천기가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네.]
‘근래 자꾸 마음이 불안하긴 했지···.’
호충은 천기에 대해서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다. 무위가 현경을 뛰어넘으며 깨달음이 높아진 결과였다.
[허나 그리 급하게 바뀌진 않을 것이네. 앞으로 열다섯 해가 남았네.]
‘열다섯 해?’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열다섯 해 뒤 일(日)과 월(月) 사이에 혜성(彗星)이 지나는 때에 태자는 본래의 위치로 귀환할 것이네.]
“!!!!”
호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여전히 서찰을 손에 들고 있었다.
[둘째 제자의 손에 전한 구슬은 그대의 영(靈)이 바다 속으로 전이 되었을 때 사용하라고 준 것이네. 그대와 함께 시공의 공능을 뛰어넘을 구슬이니 소중히 여겨주시게. 그 구슬에 연씨 가문의 비술을 통해 그대의 공력을 가득 채워 넣고 삼키시게. 그대라면 가문의 비술을 행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니···.]
‘내공이 문제가 아니라, 막을 방법을 찾아줘야지 않소!!!’
연만호는 호충의 귀환을 기정사실로 확정하고 있었다.
[태자는 이곳에 남고 싶을지 모르나 천기의 운행은 그대를 이미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였네.]
“···하. 이걸 믿으라고?”
연만호를 볼 때만해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남고 싶은 마음이 반반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만약 태자가 순순히 돌아가지 않는다면, 주변에 화가 미칠 것이네. 먼저 황제가 승하할 것이고, 태자비에게 불치의 병이 찾아올 것이며, 그대가 낳은 자식들에게도 그 화가 미칠 것이네. 결국 황실 모두가 천기의 불같은 화를 감당해야 한다는 뜻일세. 태자 때문에 황실에 이런 일이 미친다면 태자는 견딜 수 있겠는가? 그로인해 벌어질 나라의 혼란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그대가 천기를 거슬렀을 때 발생할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네. 먼저 나라의 근간인 황실이 흔들리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변방의 나라들이 쳐들어올 것이네. 황제의 위에 오른 그대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나설 것이야. 황제는 광인이 되어 중원을 피바다로 만들고 있었네. 중원뿐이 아니라 주변국에도 그 화가 미쳤고, 모든 왕실의 피붙이가 태자의 태산 같은 검강에 명을 달리했지. 나는 비범하고 호탕한 태자가 살귀(殺鬼)로 변하는 것을 원치 않네.]
“!!”
정말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살귀(殺鬼)가 아니라 살신(殺神)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는 이미 천기가 결정한 일. 인간의 힘으로 막아내기는 역부족이네. 부디 태자가 천기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기를 바랄 뿐이네.]
“······.”
연만호의 서찰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앞으로 십오(十五)년.”
중원에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