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별
***
화진과 하루를 보낸 호충은 다음 날 아들을 다시 마주했다.
“아들.”
“예. 아바마마.”
“네 어미와 동생을 부탁하노라.”
“···걱정 마소서. 아바마마께서 하사하신 무공은 침식(寢食)을 잊고 익히고 있으며, 방심(放心)을 구하며 문(文)을 익히고 있나이다.”
방심(放心)을 구한다는 것은 맹자의 고자편(告子篇)에 기록된 말이었다.
학문지도무타(學問之道無他) 구기방심이이의(求其放心而已矣)라 하는데, 학문의 길은 다른데 있지 않고,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데 있다는 뜻이었다. 주명은 맹자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자신의 학문을 익히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너를 보면 내가 걱정이 없도다. 폐하께서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근래 염려가 많으십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네가 있는데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
아들이 의심쩍은 눈으로 호충을 봤지만, 호충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현이가 어디까지 갔나 보고 오겠다.”
“···공주가 길을 떠나고 사흘이 지났습니다. 거기까지 다녀오시렵니까?”
“마차로 가봐야 얼마나 갔겠느냐.”
“···아바마마는 촌각이면 다녀오시겠지요.”
“하하. 그래. 촌각이면 갈 수 있지.”
호충은 방문을 열고 발걸음을 떼었는데,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주명은 그 뒤에서 인사를 올렸다.
“다녀오십시오. 아바마마.”
주명은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임을 알 수 없었다.
***
태자의 딸인 공주마마는 마차의 행렬 중간의 가장 화려한 마차에 올라 있었다.
탁.
그리고 그 위에 호충의 신형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나타난 인물에 흠칫 놀란 황궁의 호위무사들이 달려들려 했지만, 그들 모두에게 전음이 전해졌다.
[아비가 딸을 보러 왔노라. 너희는 소란을 만들지 말아라.]
척. 척.
호충의 신위는 신강에서 함께했던 황군을 통해 궁궐 내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태산과 같은 검강으로 하늘을 둘로 쪼갠다는 황태자의 무위는 살아있는 전설과 같았다. 그런 황태자가 공주의 마차위에 갑자기 나타났으니 이상할 일이 아니었고, 현재 황궁의 호위 대부분이 하오문 흑림방에서 비롯되었기에 호충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도 있었다.
호충은 마차 지붕에서 미끄러지듯이 내려가더니 마차 문을 열고 훌쩍 안으로 뛰어들었다.
“!”
마차에서 창밖을 구경하던 공주는 반가운 얼굴을 보고 품에 안겨왔다.
“아바마마!”
“하하하. 오냐. 유람은 즐겁더냐?”
“혼자라 아쉬운 참이었어요.”
“네 어미라도 오라고 할까?”
“어마마마께서 오시면 벗의 집안이 시끄러워 질 걸요?”
“하하. 네가 가는 것은 괜찮고?”
태자비나 공주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같은 황실의 인물이 행차하니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저야 어려서부터 뵈었으니 괜찮아요.”
“그건 공주 혼자의 생각이니라.”
호충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조잘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빙긋 웃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딸아.’
당장 오늘 밤부터 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 촌각도 아쉬운 참이었다.
“···아바마마. 왜 울고 그러셔요. 무슨 일 있으셔요?”
빙긋 웃는 호충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 내가 눈물을 보였더냐? 네 말이 너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벗의 모친들이 여전히 질투심이 가득하고 말씀드렸는데···. 이게 재미있을 일인가요?”
“그 집안은 항상 그렇다. 그저 재미로 들어주어라.”
“맹주는 너무하세요. 여인들이 접근하기 전에 알아서 막았어야죠.”
“너도 맹주의 용모를 보아 알지 않더냐. 막는다고 막아질 용모가 아니다.”
“···맹주가 잘나긴 하셨지요. 중년이 훌쩍 넘어서도 벌이 꼬일 정도라니···.”
“현아. 너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을 봐야 할 것이다. 속마음을 지혜로 가득채운 배필이야말로 너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바마마.”
“사랑하는 현아. 부디 행복하게···. 행복하게 살아라.”
“저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함께라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답니다.”
“······.”
호충은 슬픈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조심히 잘 다녀오너라.”
“예. 아바마마.”
호충은 달리는 마차를 빠져나가 문을 닫고 다시 연기처럼 사라졌다.
***
호충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네 스승을 만난 전대 황실의 비동이었다.
“······.”
자신이 거쳐 간 길을 다시 지나 스승님들의 비석을 세운 곳에 다다랐다.
“오늘이 지나면 수백 년 후에나 뵐까 싶어 미리 인사드립니다.”
호충은 정성껏 절을 올렸다. 심상에 스승님들이 있지만 그들이 진짜 영이 아님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인형이 사용하는 무공은 모두 호충 스스로의 잠재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는 그들이 송재호 스승의 비술로 창조되었다는 뜻이었다.
“비동은 누구도 찾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비동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비급이 들어 있던 각 방에는 더 많은 비급과 예술품이 가득가득 채워져 있었고, 첫 관문을 지나고 눈을 현혹했던 황금 덩어리도 모두 이곳으로 옮겨온 다음이었다. 호충은 비동을 출입하는 장치를 부수어 자신만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같은 시대일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비동이 그대로 있다면 다시 인사 올리겠나이다.”
호충은 비동을 나오며 손을 뻗어 내부의 기관장치를 망가트렸다.
파삭.
굳게 닫힌 비동의 입구는 이제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
다음으로 호충이 들른 곳은 화산이었다. 화산파 정문엔 용사비등한 필체로 대화산파(大華山派)를 상징하는 현판이 걸려 있었고, 이는 황실에서 내려준 것이라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누구든 이곳을 지나가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차앗!””
연무장에서 삼대 제자들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과거엔 백준을 비롯한 백자배가 삼대 제자였으나, 지금은 청자배를 지나 명자배가 삼대 제자였다.
무환 장문인은 무림맹의 맹주로 단 오년의 임기를 채우고 다음 맹주에게 자리를 넘겨주었고, 남궁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남궁곤은 다시 제갈진에게 맹주자리를 물려주었고, 이후 옥비연이 맹주를 차지해 두 번째 임기를 맞고 있었다.
무환이 맹주를 거쳐 은거의 길로 들어섰기에 화산은 다음 장문인을 뽑아야 했고, 그렇게 선출된 이가 연무각주를 지낸 현자배의 현인이었다.
“······.”
현인은 장문인의 처소에서 나와 화산 경내를 거닐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충은 은형술로 모습을 감추고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안녕히 잘 계십시오.’
호충이 홀로 작별을 고하는 가운데 현인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어디 영기를 채운 용이라도 안 지나가나? 왜 나는 용을 못 봐서 벽을 넘지 못하는 가. 청진 사조께선 분명 용을 보시고 벽을 넘으셨거늘···.”
호충은 현인의 말에 웃음이 터질 뻔 했지만, 그의 성정과 잘 어울리는 말이라 여기며 슬며시 화산 경내를 빠져나가 그가 내려다보는 숲으로 갔다.
‘마지막 선물입니다. 현인 도장.’
호충은 현인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고 아름다운 용을 그려낼 작정이었다.
호충의 손에서 대월천룡권이 펼쳐졌다.
[진(眞) 대월천룡권(大月天龍拳) 극의(極意)]
그리고 금빛용이 창공을 비상하기 시작했다. 실로 아름다운···.
“어, 어···. 헙!”
놀라움의 탄성은 산 밑을 바라보는 현인이 아니라 호충 입에서 나왔다.
대월천룡권이 실패해서가 아니었다. 대월천룡권은 호충이 손에서 제대로 펼쳐져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었다.
“끼이에에에엑.”
천지를 진동시키는 이 울음소리가 그 원인이었다.
분명 호충이 펼친 것은 단 하나의 대월천룡권이었는데, 금빛용 곁으로 흑룡이 함께 비상하며 용이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지, 진짜 용이 있었다고? 화산에?”
흑룡은 금빛용과 함께 춤을 추며 탈피를 시작했다. 검은 비늘이 벗겨지며 영기 가득한 푸른 동체를 드러냈고, 곧 금빛과 잘 어우러지는 청룡이 되어 구름을 뚫고 사라졌다.
“······.”
환상적인 광경에 호충은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산 밑을 보던 현인도 다르지 않았다.
“화산에서 쌍룡이 승천하다니···. 허! 허! 허허허!”
현인은 자신의 깨달음을 얻을 순간이 날아갔음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호충은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화산 경내로 은형술을 발휘해 들어갔다. 만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쌍룡이 승천한 덕에 밖이 소란했지만, 호충이 찾아온 이는 묵묵히 좌공에 빠져 있었다.
“······.”
백자배의 대사형 백준이었다.
호충은 백준의 무위를 가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숙한 화경. 녀석은 최근에야 벽을 마주했구나.’
백준은 젊은 나이에도 절정의 벽을 넘어 화경에 도달했고, 빠른 속도로 완숙한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호충은 친우에게 다시 작은 호의를 보이고 싶었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충의 손바닥이 백준을 향했다.
‘이것이 현경의 깨달음이다.’
연씨 가문의 비술이나, 호충의 의지대로 현경까지의 깨달음만 담은 비술이었다.
“!”
좌공에 빠진 백준은 뇌리로 전해지는 기이한 상념에 그대로 빠져들었다. 이후 화산에서 검왕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호충은 거기까지 알 수 없었다.
호충은 조용히 백준의 처소를 빠져나가 하늘로 솟구쳤고, 다시 남경으로 쏘아져 나갔다.
***
황궁으로 돌아온 호충은 황제를 배알했다.
“폐하. 저녁 문안 올리옵니다.”
“근래 짐의 수련에 진전이 있었는데 네가 봐주겠느냐?”
“기꺼운 일이옵니다.”
타앗!
황제는 오래도록 익힌 월하답보의 초식에 내공을 실을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고, 곧잘 검기를 내뿜으며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샤라락. 슈욱.
호충은 아버지가 선보이는 월하답보에서 눈을 떼고 곁에서 함께 지켜보는 송 영감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송 영감은 아직 현경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지고한 경지에 올라 노환을 늦추고 있었다. 이러다 주명의 아들은 물론이고 손자까지 볼 태세였다.
[영감. 아버지와 아들을 부탁해.]
[···정녕 오늘 가십니까.]
황제의 무공 스승 자리에 익숙해진 송 영감이다. 본래 송 영감에게도 자신이 돌아간다는 것을 숨기려 했지만, 그에게 마지막을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기를 무슨 수로 막겠어. 미물은 천기를 벗어날 수 없음이야.]
[···부디···. 어디서든 강녕하소서.]
[영감이 키운 진짜 진호충도 잘 부탁해. 그동안 속여서 미안했어.]
[···공자님은 제게 크나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제 제가 다시 갚아야겠지요.]
“차앗!”
황제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월광을 그렸고, 월광은 뜰에 떨어져 폭음을 일으켰다.
콰앙!
“훌륭하십니다. 폐하!”
“대성을 감축 드립니다.”
아들과 스승의 치하에 황제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
호충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화진의 처소였다.
“가가.”
“황매.”
둘은 예전처럼 서로를 불렀다.
“아무런 말도 하지 마셔요. 제발···.”
호충이 무슨 말이라도 하면 눈물부터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충의 입은 화진의 바람을 무시하며 열렸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뱉어냈다.
“사랑하오.”
“크흑.”
“깊이 사랑하오. 죽는 날까지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이오. 사랑하오. 너무나 사랑하오.”
“허흐흑.”
“이 마음을 전하지 않고 어찌 갈 수 있겠소.”
“가가. 흐흑. 가가.”
화진은 호충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지만, 차마 이를 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켜야 했다.
“부디 다시 태어나시오. 다시 태어나 나와 만납시다.”
“다시 태어나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알아보지요? 당신은 날 어떻게 알아보지요?”
“우리의 인연은 언제고 다시 이어질 것이오.”
호충은 붉은 실을 꺼내 화진의 소지(小指, 새끼손가락) 끝에 묶었고, 그 끝을 자신의 소지에 묶어 연결했다.
“사랑하는 이들은 이렇게 서로 붉은 실이 엮여 태어난다고 하오.”
“···가가.”
“내가 알아보지 못하면 그대가 알아봐 주오. 그대가 알아보지 못하면 내가 알아보리다.”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찰라와 같은 헤어짐의 시간을 영원처럼 보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나 보오.”
“···지금 제 모습이 추하진 않겠지요?”
“너무나 아름답게 웃고 있다오.”
“제 웃음만 기억해주시어요.”
“영원히 기억하리다.”
호충은 연만호가 주었던 구슬을 꺼내 자신의 모든 내공을 담았다.
슈우우욱.
멀리 혜성이 해와 달 사이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호충은 텅 비어버린 자신의 내공을 느끼며 구슬을 삼켰다.
“부디 평안하시오.”
“가가도 부디 평안하시어요. 모두 잊고 평안하게 사시어요.”
눈물로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화진은 환히 웃고 있었다.
혜성이 전한 파문이 전해졌고 호충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와 동시에 호충의 소지에 묶여있던 붉은 실이 풀려 아래로 떨어졌다.
“아, 안 돼. 가가. 가가···.”
화진은 풀린 실을 주섬주섬 끌어 당겼다. 그리곤 다시 실을 묶으려 고개를 들었다.
“!”
같은 얼굴의 호충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전과 달랐다.
“그는···. 갔습니다.”
“······.”
“저를 홀로 있게 해주십시오.”
“······.”
깊은 허탈함에 화진은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똑같은 모습에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기억을 되찾아도 그는 자신이 연인이 아니었다.
‘떠나셨구나. 내 님이 떠나셨구나. 나를 홀로 두고 가셨구나···.’
활짝 웃던 화진의 얼굴이 깊은 슬픔으로 가득해졌다.
“허어어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