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연(紅緣)
***
“꾸륵.”
물의 압력이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뿐이었지만, 호충은 자신이 깊은 바다 속에 들어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로 돌아왔어.’
숨이 막혀 왔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그의 평온한 마음과 달리 그의 몸에선 거친 내공이 뿜어져 나왔다.
쿵.
쿵. 쿵.
쿵. 쿵. 쿠훙!
시멘트로 채워진 드럼통이 터져나갔다.
‘나의 내공이 시공을 뛰어넘어 다시 내게로 전해졌다.’
연만호의 비술이 담긴 구슬이 제 역할을 해낸 것이다. 호충은 깊은 바다를 솟구치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촤악.
“푸학.”
호충은 멀리 떠나는 배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드럼통에 넣어 바다에 던지고 돌아가는 배였다.
주변엔 저 배 외에 다른 배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실례.’
호충은 바다로 잠수해 배를 향해 나아갔고, 곧 배 밑에 붙어있는 따개비 하나를 붙잡을 수 있었다. 나아가는 배의 속도에 바닷물이 거세게 밀려들었지만, 호충의 팔은 배에 찰싹 붙어 있었다.
‘뭍으로 가는 동안 몸을 점검해야겠군.’
호충은 그 모습 그대로 내공을 순환하며 몸을 정상으로 돌리려 노력했다. 전과 같이 단련된 몸이 아니었기에 해저에서의 내공발출로 상당한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호충은 자신의 몸을 점검하며 아직 완전하게 몸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련이 필요해. 최소 오 년은 단련해야 예전의 무위를 되찾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화경급 무위는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지금 수준만으로 무쌍을 찍기야 하겠지만 말이야.’
퉁퉁퉁퉁.
호충은 배가 뭍에 정박하려 속도를 줄이는 시점에 눈을 뜨고 다시 바다로 잠수해 들어갔다.
‘내가 대한민국에 돌아왔다.’
호충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빨래 줄에 옷이 걸린 민가였다. 드럼통에서 빠져나오며 입었던 옷이 모두 사라졌기에 새로운 의복이 필요했던 탓이다.
호충은 대충 걸칠 수 있는 옷을 찾아 걸치고 할머니들이 신는 빨간 고무 신발까지 신었다. 그리곤 얼른 부둣가로 향했다.
자신을 바다에 빠트렸던 이들에게 얻을 것이 있었다.
***
호충은 마지막까지 담배 하나도 물려주지 않은 놈의 얼굴을 보고 활짝 웃었다.
“미친놈인가?”
그는 호충의 얼굴을 보고도 알아 볼 수 없었다. 한겨울에 어울리지도 않는 가벼운 옷을 입은 녀석은 머리까지 산발이었기에, 시골 동네에 하나쯤 있다는 광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네 놈들이 알아볼 얼굴이 아니지.’
호충은 자신의 얼굴을 마한로의 우락부락한 얼굴로 바꿔둔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호충은 그들 일행의 곁을 지나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손을 썼다.
슈슈슉.
“헤헤. 헤헤헤헤.”
호충은 그들을 지나쳤고, 그들도 괜히 미친놈의 심기를 건드릴까 싶어 그대로 지나쳤다.
어촌 마을 구석으로 들어온 호충은 품이 넓은 바지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어휴. 현금이 상당하시네?”
호충이 손을 써 가져온 것은 그들의 지갑이었다. 잠깐 사이 녀석들의 호주머니를 턴 것이다. 호충은 지갑에서 현금만을 꺼내고 지갑은 버려두었다.
투둑. 툭.
녀석들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25세기파의 누구도 자신이 돌아왔음을 의심하지 않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제 가볼까? 아니지. 먼저 옷값을 치러야하는구나!”
호충은 먼저 자신이 옷을 훔친 집에 훔친 현금의 절반을 떼어 내려놨다. 그리고 시내로 가서 옷가게 들렀고, 사이즈에 맞춰 옷을 골라 입었다.
거울이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자니 진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
호충의 얼굴이 짙은 슬픔이 어렸다.
‘화진아. 주명아 주현아···. 아버지.’
과거에 두고 온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 명을 다하고 저승으로 갔을 것이다.
주륵.
절로 눈물이 흘렀다.
“크흥.”
호충이 우는 모습에 가게 주인의 표정이 구겨졌다.
“옷이 오염되었으니 무조건 사서야 해요.”
[···어차피 살 생각이었소.]
“조선족?”
“···아차.”
저도 모르게 고대의 중원 언어로 말한 것이다.
“살 겁니다. 사과하는 의미로 같은 사이즈 하나 더 고르죠.”
“한국말을 잘하시네?”
“···한국인입니다만?”
“조선족은 중국인입니다만?”
“···조선족 아닙니다. 토종 한국인입니다. 중국어는 배우는 중이라 저도 모르게 나온 거고요.”
“아···. 쏘리.”
“유어웰컴.”
“오오. 한국사람 맞네.”
“영어로 말했는데 어떻게 또 한국인이라고 합니까?”
“토종 본토발음이잖아요. 유어웰컴!”
“큭. 재미있는 분이셨네.”
“신발은 계속 그거 신으시려고요?”
호충의 발엔 아직도 빨간 고무신이 신겨져 있었다.
“아···. 신발도 주시죠.”
“여기 옷가게잖아요. 신발은 옆집으로 가숑.”
가게 주인과의 만담으로 잠시 슬픔을 잊은 호충은 옷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와 옆 가게에서 신발을 샀고, 이내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바로 아지트로 갈 생각이었다.
“여긴 경기도행 고속버스가 없는데···.”
“······.”
시골 깡촌이라 고속버스가 없었다.
“위에 속초로 가야 있을 겁니다. 아니면 조금 돌아가도 타고 가시던가.”
“속초까지 가는 버스는 있습니까?”
“없으면 내가 말을 했겠어요?”
“···속초행 표 하나 주십시오.”
호충은 속초로 가는 터미널 버스에 탑승했다. 옷과 신발을 고르느라 택시를 탈 현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
호충은 속초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경기도에 도착했고, 곧장 동탄의 아지트로 향했다.
‘화란이가 불었으면 아무것도 없겠지만···.’
우선 이곳에서 생활하자면 현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아지트가 털렸다면 그때 다른 수단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호충은 아파트 근방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내렸고, 그때부터 조금 긴장하며 주변을 의식했다.
‘녀석들이 지키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예상외로 평온한 아파트였다. 그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에 들어갈 때까지 의심스러운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화란이가 왜 여길 그대로 두었지?’
누가 이곳을 침입했을 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설치한 샤프심이 방금 자신이 문을 열면서 부러져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이 이곳을 떠난 다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혹시···.’
호충은 아직도 화란이 25세기파의 감시를 받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털썩.
소파에 앉은 호충은 탁자에 놓인 담뱃갑을 들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금연은 쉽겠네.”
오래도록 태우지 않은 담배를 다시 입에 물일은 없을 것이다.
잠시 고개를 소파에 기대며 여유를 만끽한 호충은 곧장 행동을 시작했다. 지금 쉬는 것은 사치였다. 서랍을 열고 여러 종류의 휴대폰 중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회칼을 두 자루 골라 왼쪽과 오른쪽에 차고 여유분으로 마련해둔 자동차 키를 집어 들었다.
“현금은···.”
호충은 안방의 붙박이장을 열었다.
그곳엔 거대한 크기의 금고가 들어있었다.
삐삐삐삐삐삐. 끼리릭. 끼릭. 촤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다이얼락을 돌리고, 열쇠를 꽃아 금고문을 여는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여전히 기억이 생생해.’
철컥.
호충이 손잡이를 눌러 내리자 금고문이 활짝 열렸다.
가득히 쌓인 현금과 금괴 덩어리가 호충을 반겨주었다.
‘피로 쌓은 돈. 죄로 가득한 돈이구나.’
여태 사람을 죽여 벌어들인 돈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지은 죄가 내게 돌아왔을 것이다.’
중원에서 높은 무공을 쌓고 황제를 아버지로 두었던 태자의 신분까지 되었지만, 결국 크나큰 슬픔을 품에 안고 이곳으로 돌아왔으니 하는 말이다.
척.
호충은 몇 뭉치의 현금을 잡아 빼내고 다시 금고의 문을 닫았다.
“돈이 죄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지.”
돈까지 챙긴 호충은 옷장에서 굵은 뿔테 안경에 손을 가져가다가 손을 멈췄다.
“···이제 변장은 필요 없는데 깜빡했네.”
우드드득.
호충이 손을 쓸어내리자 얼굴은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했다.
***
호충이 차에 올라 향한 곳은 전에 25세기파의 회장 김수철을 죽이고 증거물을 처리한 곳이었다.
“묻어두길 얼마나 다행인지···.”
당시의 증거물이 고스란히 그곳에 묻혀 있었다.
증거물을 획득한 호충의 눈이 반짝였다.
“형이 금방 간다. 기다려라.”
호충이 탄 차는 다시 국도를 달려 서울로 향했다.
***
현재 25세기파는 수장의 죽음으로 인해 경찰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이인자 장국철을 포함한 조직의 수뇌부는 경찰의 눈을 피해 잠수 중이었다.
호충은 25세기파의 김수철을 처리하기 위해 그들이 차명으로 보유한 주택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다섯 채의 차명 주택을 모두 기억하는 호충이다. 당시엔 써먹을 일이 없어 헛된 수고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너무나 소중한 정보였다.
호충은 첫 번째 주택에서 조직의 관리자급 인물들이 모여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두 번째 주택엔 하부 조직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음을 확인했다.
세 번째 주택은 상당히 화려했고, 주차장엔 검정 세단과 스포츠카가 주차되어 있었다.
‘과거의 수고 덕분에 고생을 덜었어.’
장국철이 타는 고급 세단이었다. 그가 이 집에 있었다.
호충은 어두운 밤, 높은 담을 넘어 삼층 높이의 개인 주택에 숨어들었다. CCTV의 화면과 경보장치의 센서를 교묘하게 피한 사각지대였다.
호충은 넓은 안방에 들어와 잠들어 있는 남녀를 볼 수 있었다.
‘얼씨구?’
여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TV에서 많이 보던 얼굴이었다.
‘조폭 새끼가 연예인까지 데리고 사냐?’
애초에 25세기파에서 밀어줘 연예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알 바 아니고요.’
툭. 툭.
호충의 손이 둘의 혈을 짚어 깊이 잠에 빠지게 만든 다음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가져온 장갑을 끼고 증거물을 들어 남은 지문을 지운다음 녀석의 지문을 잔뜩 찍어 두었다. 다른 증거물도 마찬가지였다. 이후의 작업은 집 내부가 아니라 밖에서 진행되었다. 호충은 잠깐 사이 작업을 끝내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고, 손에 흙을 한 움큼 움켜쥐고 있었다.
“흙장난할 나이는 아니지만···.”
부스럭거리며 작업을 끝낸 호충은 조용히 다시 집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근처에서 마지막 지하철에 올라 먹잇감을 골랐다.
‘누가 좋을까···.’
호충은 자신의 기준에 맞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곧 지하철에 어깨가 축 늘어진 남자가 들어와 지하철 손잡이를 잡았다. 호충은 그의 주머니가 불룩한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에 딱 맞군.’
호충은 그를 지나치며 빠르게 손을 썼다. 부둣가에서 사용했던 기술과 같았다.
호충은 다음 칸으로 넘어가 그의 지갑을 열었다. 그곳에 그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
‘중소기업 과장? 역시 평범하니 좋네.’
호충은 남자의 명함만 빼고 지갑은 슬며시 의자에 내려놨다. 다른 손에 그 남자의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지갑과 함께 빼낸 것이었다.
호충은 얼른 지하철에서 내려 남자의 휴대폰으로 112에 전화를 걸었다. 112 비상 전화는 비번이 걸려있어도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전화 감사합니다. 112 경찰 신고센터입니다. 신고하실 일이 있으신가요?”
“아. 제가 제대로 걸었네요.”
“무슨 신고로 전화 주셨을까요?”
“제가 방금 목격한 일인데요······.”
호충은 방금 본 것처럼 범죄자의 사후처리를 묘사하고 있었다.
“···거기서 막 피 묻은 칼하고 옷을 구겨 넣더니 땅에 묻더라고요. 마침 대문이 열려 있어서 제가 다 봤습니다.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급하게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누구를 살해한 것 같았어요. 팔뚝에 뱀 문신도 보이더라고요. 저는 무서워서 얼른 몸을 숨겼습니다.”
“먼저 신고자분의 성함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절대 위험한 일은 없으실 겁니다.”
호충은 경찰 교환원의 새빨간 거짓말을 들으며 신원을 밝혔다.
“아. 저는 XX기업 영업부 과장으로 일하는 박민수라고 합니다.”
남자의 명함에 적힌 내용이었다. 이 정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피의자 측으로 넘어갈 수 있는 정보였다.
“아. 박민수님. 신고 감사합니다. 아까 봤다는 위치를 다시 확실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범죄와 관련되어 있을 것 같아서 집주소도 확인해 놨습니다. 거기가 어디냐면···.”
호충은 25세기파 이인자 장국철이 숨어있는 곳의 위치를 설명했다.
“당장 잡으러 가셔야 하지 않을지···.”
“신고에 따라 출동 예정입니다. 신고자께서도 그곳으로 와주실 수 있습니까?”
“감사합니다. 역시 민중의 지팡이! 저도 근처에 있습니다. 바로 가죠.”
“이 전화로 다시 전화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112와 전화를 끊고 택시를 잡아탄 호충이 차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어디 구경하러 가보실까?’
호충은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하고 경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고, 곧 경찰차가 불빛을 번쩍이며 다가왔다.
호충은 얼른 나가서 경찰을 맞이했다. 호충은 지하철에서 만났던 남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빨리 오셨네요. 제가 신고자 박민수입니다.”
호충은 상대가 자신을 신뢰할 수 있도록 명함까지 내밀었다.
“XX테크 박민수 과장님···. 목격하신 집은 어디입니까?”
“이 집입니다.”
호충이 가리키는 집의 대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있었다.
“음···. 확인해보겠습니다.”
경찰복을 입은 둘이 먼저 열린 대문을 두고 벨을 눌렀다.
띵동. 띵동.
‘···벨을 누르면 어서옵셔 하겠냐?’
하지만 경찰도 무단으로 침입해 증거물을 확보하고 용의자를 잡을 권한이 없었다. 영장도 없이 신고만으로 이뤄진 출동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십니까?
“경찰입니다. 동대문서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안에서 인터폰을 받은 장국철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경찰이 어떻게 여기까지···.’
-밤이 늦었습니다. 용무가 있으시면 내일 오시죠.
“잠시면 됩니다. 신고 전화가 들어와서 확인해야 합니다.”
-무슨 신고 전화가 들어왔다고 그럽니까! 못 들어오니까 그렇게 아세요!
“······영장 받아오면 조금 귀찮아 지실 텐데 괜찮으십니까?”
-하! 그럼 영장 받아오세요!
딸깍.
전화를 끊어버린 장국철은 불안한 마음에 습관적으로 엄지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퉤! 퉤!”
엄지손톱에 잔뜩 묻은 흙이 입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게 뭐야?”
.
.
.
밖에 있던 경찰은 호충을 향해 다시 물었다.
“진짜 피 묻은 칼을 보신 것 맞죠?”
“물론이죠! 조폭들이 쓴다는 사시미! 그거였어요.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경찰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를 들어 상부에 연락했고, 호충은 그들의 일이 진행되기를 기다렸다.
‘일이 끝날 때까지 나를 숨긴다.’
장국철에게 복수를 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나, 앞으로 이들과 엮이지 않고 살려면 공권력의 힘을 빌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곧 상부와 의논을 끝낸 경찰이 다가와 알려주었다.
“문 열려 있으니 정원까지는 들어가도 된답니다. 아까 증거물을 묻었다는 곳이 어딥니까?”
“문 안에 보이는 뜰의 나무 옆입니다. 아까 묻었으니 표가 날 겁니다.”
호충은 밖에서 경찰들이 증거를 확보하길 기다렸고, 그들은 진짜 피 묻은 회칼과 옷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상부에 연락했다.
“증거물 확보했습니다. 동물의 피가 아니라 사람의 피가 확실해 보입니다. 긴급 영장 발부 요청합니다.”
호충은 속속 도착하는 형사들과 경찰차를 보며 슬며시 뒤로 빠졌다.
그리고 멀리 수갑을 차고 집을 나서는 장국철을 볼 수 있었다.
“아니야!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난 자고 있었어!”
“조용히 갑시다. 조사하면 다 밝혀집니다.”
‘너 잘 자더라. 국철아. 하지만 CCTV에 네가 삽으로 땅을 파고 증거물을 묻는 장면까지 다 찍혔어.’
호충이 장국철의 얼굴로 변해 CCTV앞에서 증거물을 파묻은 것이다. 빠져나갈 수 없도록 확실히 누명을 씌우기 위함이었다.
‘그럼 선의의 신고자는 이만 가보실까?’
호충은 몸을 돌려 소란한 현장을 빠져나갔다. 이후의 일은 경찰이 알아서 진행할 것이다.
***
호충의 예상대로 화란은 아직 25세기파 부하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분명 호충이 다른 장소에 현금을 모아두었으리라 여긴 것이다.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돈이라 출처를 소명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도 같은 부류의 일을 하고 있어서 현금을 숨겨두길 좋아했다.
“며칠만 더 고생하자.”
“그냥 몸으로 눌러주면 저 년도 다 불지 않을까요?”
“잘만 숨기면 애하고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데 너 같으면 말하겠냐?”
“······.”
“그리고 애 엄마는 여자가 아니야. 괜히 건드리면 골치 아플 수 있어. 가만 두면 알아서 우리를 안내할 거다.”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당연히 저 년이 움직일 때까지 아니겠어? 오래 참지는 못할 거야.”
“밤도 늦었는데 내일 다시 오죠? 이번에 깔쌈한 년이 룸에 새로 왔는데 말입니다···.”
우우웅. 우우웅.
“기다려봐 새끼야. 전화 좀 받자.”
휴대전화에 표시된 발신자는 25세기파의 전담 변호사였다.
“예. 김 변호사님. 전화 받았습니다. 밤늦게 무슨 일···.”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 장 사장님이 경찰에 연행되셨습니다!
“!!”
-경찰이 장 사장님 애인 집에서 피 묻은 칼과 옷가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 그럼 그 자리에서 바로 잡히신 겁니까?”
-장 사장님은 분명 누가 꾸민 일이라고 하십니다.
“······형님이 대타 찾으라고 하셨습니까?”
-빨리 찾아주셔야겠습니다.
장국철은 자신을 대신해 누명을 뒤집어 쓸 누군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직 CCTV에 명확한 증거가 남았음을 모르고 있기에 대타를 찾고 있지만, 대타를 찾아도 별 소용은 없을 것이다.
“에이 썅. 이게 무슨 일이야? 당장 그리로 가겠습니다.”
이들이 탄 차량이 빠져나간 다음 호충이 빌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
호충은 차량의 붉은 미등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빌라로 올라갔다.
***
“···괜찮아. 아가야.”
화란은 아직 불러오지 않은 배를 쓰다듬으며 아기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몇 년 만 참으면 우리 같이 행복하게 살 수···.”
화란은 스스로 뱉은 우리라는 말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 분명한 자신의 연인이 떠올랐다.
“흐흑. 오빠···. 우리 아기도 못 보고 간 우리 오빠.”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를 잃었고, 자신은 미래를 약속했던 연인을 잃었다.
“크흥.”
화란은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다. 당장은 먹고 죽으려 해도 돈이 없었지만, 연인은 자신과 아이를 위해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그 돈을 챙길 때까지는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예비 엄마였다.
“···절대로 들키지 않을 거야. 오빠가 물려준 걸 지켜내고 말 거야.”
“그럴 거면 애초에 날 숨겨줬어야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란은 기겁하며 놀랐다.
“!!”
“걱정 많았지?”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은 전처럼 빙긋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오, 오빠!!!”
화란이 뛰어와 품에 안겨왔다.
“······.”
호충은 화란을 품에 안고 있었지만, 중원에 두고 온 화진을 떠올렸다.
‘우리의 인연이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이미 자신의 아이를 가진 화란이 있는데, 그녀가 다시 태어나도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연인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호충의 품에 안겼던 화란은 뭔가 생각난 듯이 후다닥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오빠! 얼른 가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조폭 새끼들 올까봐?”
“그래! 빠져나왔으면 숨었어야지 여길 왜 와!”
“···네가 위험하면 내가 지켜줘야지. 누가 널 지켜 주냐?”
다른 때 들었다면 로맨틱하다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라고!”
“그보다 화란이 너. 왜 임신했다고 오빠한테 얘기 안 했어? 내가 그딴 새끼들한테 내 마누라가 애 가진 소릴 들어야겠냐?”
“···오빠 손 씻으면 말할 생각이었단 말이야.”
“에효. 어쨌든 여기선 나가자. 동탄 아파트로 가서 조금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할 거야.”
“알았어. 바로 짐 챙길게.”
호충은 화란이 급하게 싼 짐 가방을 챙기고 화란을 태워 이동했다. 화란은 여전히 불안한 듯이 차에서도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떨고 있었다.
“이제 걱정할 것 없어.”
“···어떻게 된 건지 말해줘. 오빠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녀석들이 오빠를 죽일 것 같았단 말이야.”
“죽이려고 하기야 했지. 녀석들이 날 드럼통에 넣어서 바다에 빠트렸는데···.”
“악!”
“겨우 빠져나왔다.”
걱정했던 것보다 간단한 설명이었다.
“아, 안 들키고?”
“안 들키고.”
호충은 화란이 안심할 수 있도록 장국철의 소식도 전해주었다.
“날 죽이려고 했던 조폭 두목 새끼는 아까 경찰에 잡혔어. 내 대신 살인 용의자가 되었거든.”
“!”
“앞으로 놈이 바빠질 예정이라 너를 신경 쓸 수 없을 거야. 나는 죽을 줄 알고 있을 테니 더욱 그렇고.”
“하아···.”
호충은 운전하며 크게 한숨을 내쉬는 화란에게 말했다.
“우리 해외로 나갈까?”
“···해외로 나가야 안전해?”
“아마도? 몇 년은 해외에서 살고 돌아와야 안전할 거야.”
“···갈게.”
“할 줄 아는 외국어는 있냐?”
“···있을 것 같아?”
“에효. 학원부터 다니자.”
“오빠는 할 줄 아는 외국어라도 있어?”
[네 남편은 능숙해.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걱정이지.]
호충의 입에서 쏟아진 능숙한 중국어에 화란은 입을 삐죽거렸다.
“쳇. 중국어는 어디서 배운 거야?”
“예전에 삼합회 조선족 새끼들하고 엮였을 때.”
삼합회나 하오문이나 밑바닥 인생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럼 중국으로 가려고?”
“아니. 유럽 아니면 미주대륙.”
“에에?”
“중국은 살기 불편하잖아. 중국은 가끔 여행이나 가자.”
화진과 자신의 아이들이 살았을 그곳에서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헐. 오빠는 생각부터가 글로벌하네.”
“그래서 나도 너랑 같이 외국어 학원등록하고 같이 배워야 해. 너 머리 좋다고 했지? 누가 먼저 배우나 내기 할까?”
“하! 오빠가 내 말을 못 믿는 모양인데, 나 고등학교 중퇴하기 전까지 반에서 오등 안에 항상 들었거든?”
“···전교도 아니고 반에서?”
“다른 애들은 다 학원 다녔는데 난 학원도 안 다니고 오등이었단 말이야!”
“실업계 아니었나?”
“···그래도 오등은 오등이지!”
“아무래도···.”
화란에게 진양의(眞兩意)를 가르치지 않으면 평생 외국어를 익힐 수 없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아무래도 뭐!”
“···굉장히 잘 배울 것 같다고···.”
대화를 통해 조금 긴장을 푼 화란과 동탄 아파트에 함께 들어온 호충은 소파에 몸을 묻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푸하.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바다에서 빠져나온 게 언제야?”
“이틀 전.”
“아!”
“일 마무리하느라 겁나게 바빴다.”
동해바다에서 녀석들의 배를 통해 빠져나오고 속초를 통해 경기도에 들렀다가 지방에 다녀오느라 하루를 썼다. 이후에 녀석들의 집을 뒤져야 했고, 장국철이 숨어 있는 집을 찾아 증거를 조작하기까지 또 하루였다.
“조폭이 용의자가 된 건 오빠가 한 일이야?”
“응. 결국 그놈이 시킨 일이라 없는 죄는 아니거든. 종범과 주범은 엄연히 달라. 그 새끼가 주범이야.”
“후우. 앞으론 별일 없으면 좋겠어.”
호충은 일이 있어도 없게 만들 능력이 있었다.
“너는 앞으로의 일만 생각해.”
“······.”
“왜 또?”
“오빠가 조금 삭막해진 것 같아서···.”
호충은 자신도 모르게 화란에게 무심하게 대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
화진과 자신이 헤어진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 감정이 지금도 그의 마음 깊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화란을 대했으니, 화란이 삭막하다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오빠 피곤하다. 씻고 자자.”
“···응.”
쏴아아악.
호충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다시 화진을 떠올렸다.
“······.”
아들 주명과 딸 주현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흐르는 것이 물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호충은 한참이나 그대로 샤워기의 물을 맞았다.
“끄윽.”
그리움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마음을 후벼 파고 있었다.
“꺼흐흑. 허흑.”
***
동탄 아파트를 정리하고 남해로 내려간 호충과 화란은 나란히 어학원에 등록했다.
“영어부터 배우자. 혹시 미국아닌 유럽으로 가도 영어는 대충 통하니까.”
“에효. 영어는 자신 없는데···.”
“뭐는 자신 있냐?”
“···쳇.”
화란은 차가운 자신의 연인의 마음을 녹이려고 생각해 왔던 말을 꺼냈다.
“오빠.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호충은 운전대를 잡고 옆을 돌아보지도 않고 되물었다.
“무슨 생각.”
“우리 아기 이름말이야.”
임신한 아기의 일이라면 연인이 조금 더 푸근하게 자신을 대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호충의 마음은 더욱 차갑게 굳어갔다.
“······.”
호충은 화진과 첫 아이를 갖고 이름을 지으려고 나눴던 대화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
.
.
화진은 호충이 회임한 아기의 성별이 아들이라 알려준 다음, 아들의 이름을 며칠 간 고민하고 말했다.
“태자 전하. 저는 우리 아들이 항상 밝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밝아야지. 그대와 내가 함께 있을 것이니 우리 아들은 밝은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밝을 명(明)이 꼭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스스로의 생에 주인이 되길 바라니 주인 주(主)자도 넣고 싶어요.”
주(主), 명(明)
본래 황제이신 아버지께서 태자의 이름을 정하려 했지만, 태자비가 강력하게 아들의 이름을 밀어붙여 결국 화진의 뜻대로 주명(主明)으로 태자의 이름이 정해졌다.
.
.
.
“······.”
호충은 두고 온 자식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지만, 화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난 우리 아기가 항상 밝았으면 좋겠어.”
“!”
호충은 화진의 말을 연상케 하는 화란의 말에 운전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와 오빠처럼 남들 밑에서 사느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인생의 주인이 되었으면 좋겠단 말이지.”
“······.”
“오빠는 중국어 배웠으니까 밝음과 주인을 뜻하는 한자를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주인 주(主), 밝을 명(明). 주명(主明).”
“오! 역시 한 번에 나오네?”
“하지만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데···.”
“딸이 태어나면 지어줄 이름도 생각해 놨지롱.”
.
.
.
“태자 전하. 제가 공주님의 이름도 정했답니다.”
“그래? 난 생각이 너무 많아서 고를 수가 없던 참이야.”
“호호. 여자 아이는 너그럽고 현명해야 해요. 그래서 현명하고 어진 마음을 뜻하는 현(賢)을 써서 주현(主賢)이라고 지으려고요.”
“주현···. 좋구나. 폐하께서는 이번에도 공주의 작명을 당신에게 양보해야겠어.”
.
.
.
과거를 떠올리던 호충은 이어진 화란의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처럼 막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너그럽고 현명하게 살아갈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이건 나도 알아. 현명할 현! 아까 아들이면 주명이라 지어주려고 했으니까 딸은 주현! 주현이 좋겠다.”
끼이익.
호충은 차를 갓길에 세우고 화란을 돌아봤다. 한 번은 우연이라 칠 수 있지만, 두 번은 필연이었다.
“왜, 왜? 내가 혼자서 이름 지어서 화났어?”
“······.”
호충은 붉어진 눈으로 화란을 보고 있었다.
[다 같이 왔느냐···.]
호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화란은 혹시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 변명하느라 급급했다.
“뭐, 뭐라는 거야. 오빠. 난 그냥 내 생각만 말한 거야. 오빠가 다른 이름으로 지으려면 얼마든지 바꿔도 된다고.”
[화진아. 우리가 낳은 아들, 딸까지 모두 데리고 왔느냐. 내가 알아보지 못할까봐 다 데리고 왔느냐.]
“···오빠. 왜 울고 그래···.”
호충은 옆 자리에 앉은 화란을 끌어안으며 알아들을 수 있게 말했다.
“끄흑. 잘 했다. 잘 했어. 정말 수고했다. 내가 너를 알아보게 해주었다.”
“···나 이름 그렇게 잘 지었어? 이게 오빠가 울 정도의 일이야?”
“고맙다. 고마워. 흐허헝.”
“오빠···.”
둘의 새끼손가락 끝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연결되어 밝은 빛을 뿜고 있었다.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