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제천대살 (1)
* * *
업계에서는 그를 제천대살(祭天大殺)이라 불렀다.
손오공 제천대성을 흉내 낸 거냐고 비웃는 자들도 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멋지지 않은가?
뛰어난 무공, 엄청난 비술, 무엇보다 부처님에게도 대드는 당찬 성격.
자신도 그런 삶을 살겠다는 것, 이것이 그의 인생 목표였다.
그리고 오늘, 사내는 그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서고 있었다.
업계에 발을 들인 후 처음으로 초절정 고수를 작업하는 날.
운도 제법 따라줬다.
청부 대상을 상대할 최적의 무기까지 손에 넣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툭툭.
방금 확보한 귀면비(鬼面比)가 꽂혀 있는 허리춤을 두드리며 흥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명년 오늘이 지 제삿날인지도 모르고 염불이나 외고 있을 철포대사(鐵布大師)를 향해.
잠시 후, 사내가 걸어간 방향과는 반대쪽에서 검은 장포를 입은 누군가가 나타났다.
“제갈. 어떻게 되었나?”
“휴우, 답답해 죽을 뻔했어요. 이런 일은 저한테 안 맞는다고요.”
소나무 옆 바위 그림자가 들썩거리더니 웬 젊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의 진법 속에 모습을 감춘 채 제천대살을 감시하던 제갈윤이었다.
“빨리 보고나 해.”
“뻔하죠 뭐. 대장이 예상한 대로 제천대살은 보물이 묻힌 위치를 알고 있더군요. 주변 몇 곳을 파헤치더니 어렵지 않게 귀면비를 찾았어요.”
“역시 그랬군. 좋아, 난 광군영에게 가볼 테니 넌 객잔에 가서 쉬고 있어.”
강한월은 제천대살이 떠나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향해 제갈윤이 외쳐 물었다.
“대장. 수고했다는 말도 안 해주는 거예요?”
강한월은 아무런 답도 없이 가버렸지만 제갈윤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졌다.
부대 첫 작전의 시작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제천대살 체포작전, 일 단계 확인 완료.
* * *
서늘한 달빛이 쏟아지는 깊은 밤.
경공을 펼쳐 나는 듯 달려온 제천대살이 작은 암자 앞에 도착했다.
금종조 철포삼을 극성으로 연마한 호신강기의 대가, 철포대사가 머무는 곳이었다.
창호지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그리고 나직이 울려 나오는 독경 소리.
철포대사는 암자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흐흐, 그렇게 불경을 읊어봐야 소용없다. 부처님도 널 구해줄 수 없을 테니….’
제천대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그려졌다.
보통의 살수라면 청부 대상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손을 쓰겠지만, 그는 당당히 걸음을 내디뎠다.
비록 은밀한 살인 청부를 하고 있지만 목줄을 끊어 놓는 행위는 정면승부로 결정짓는 것이 지금껏 고수해온 그 만의 방식.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살행(殺行)이 아니니까.
이건 신성한 백팔살(百八殺) 비술의 수행 과정이며, 치열한 대결을 통해 얻은 피 만이 수행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거였다.
끼이익.
낡은 경첩이 마찰되는 소리와 함께 제천대살이 안으로 들어섰다.
달빛을 받은 낯선 이의 그림자가 암자 안으로 길게 그려지는 순간, 철포대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손님을 반겼다.
“아미타불. 생각보다 늦었구려. 기다리고 있었소.”
뭐야?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어?
제천대살이 눈살을 찌푸리며 정면을 주시했다.
사천왕이 그려진 탱화를 배경 삼아 정좌하고 앉은 철포대사.
의외인 것은 아리따운 젊은 여인과 함께라는 것인데….
“하하하, 이것 참. 명성 높은 철포대사가 알고 봤더니 음란한 땡중이었군. 야심한 시각에 여자를 끼고 놀고 있다니.”
“철포대사가 땡중일 수는 있겠지만 저랑 놀고 있던 건 아니랍니다. 이래 봬도 전 임무 수행 중이거든요.”
철포대사 곁에 있던 여인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을 받았다.
땡중이 몰래 불러들인 기녀쯤 되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
그나저나… 임무 수행 중이라니?
“뭔 임무 중인지 모르겠지만 잽싸게 꺼지는 게 좋을 거다. 아니면 철포 땡중과 함께 제사상을 받게 될 테니.”
“어머나 무서워라. 그러지 마시고 이리 오셔서 차나 한 잔 받으세요.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이것 봐라?
좀 전의 협박은 진득한 살기를 담아 던진 것이었는데, 담담히 받아치는 것을 보니 여인은 공력을 익힌 무림인이 분명했다.
게다가 철포대사는 입을 다물고, 이 여인이 대화를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겁을 낼 필요는 없었다. 청부 대상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면 그만….
“날 원망하지 말거라. 꺼지라는 충고를 듣지 않은 네 잘못이니!”
제천대살은 지체 없이 손을 썼다.
등 뒤의 검을 꺼내어 벼락같이 목을 베어가는데….
“귀면비는 잘 챙기셨어요?”
검이 여인의 목에 닿기 직전.
제천대살은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 여인이 귀면비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호호, 이제 제 이야기를 들어볼 마음이 생기나요? 요점만 간단히 할게요. 그러니까 이건 당신이 염화도(炎火刀) 송충을 죽였던 것에서부터 시작된 건데요….”
여인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제천대살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염화도를 죽인 것이 벌써 이년 전이구나.
백팔살 수행이 이 단계로 올라서며 절정급 고수를 사냥하기 시작한 때였다.
“절정고수 염화도가 살수의 손에 죽었다고 꽤나 떠들썩했죠. 당시에 염화도의 시체를 보고 누군가 사인을 분석했는데, 극음지기(極陰之氣)에 기반한 쾌검(快劍)에 당했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당시의 나는 쾌검을 주로 썼었지. 그런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네가 염화도의 딸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끝까지 들어보세요. 염화도가 죽은 지 반년쯤 후, 이번엔 사파의 고수 귀철편(鬼鐵鞭) 용두가 당신 손에 죽었어요. 염화도보다 인지도가 떨어지는 인물이라 크게 소문이 돌진 않았지만, 어쨌건 이번에도 사인에 대한 분석은 있었죠. 그는 철사장 계열의 장력에 두개골이 으스러져 죽었다고….”
“흐흐, 기억하고 있다. 구역질 나는 못생긴 면상을 일장에 뭉개버렸지.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고?”
또르르.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따르며 여인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뭐 그냥 흔한 강호의 이야기일 뿐이죠. 그런데 누군가에겐 이게 신경을 자극하는 이야기였던 거예요. 극음지기를 익힌 쾌검의 고수가 반년 만에 철사장을 익혔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인데….”
“흥, 누군지 모르지만 생각의 폭이 좁군.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대장도 그렇게 말했어요. 불가능하진 않다고… 하지만 기연이 필요하다고.”
“기연?”
여인의 이야기가 드디어 제천대살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기연이죠. 예를 들면 극양(極陽)의 기운을 품은 쌍각화사(雙角花蛇)를 복용하는 것 같은. 무림맹이 사마세가에 의뢰하여 매년 정리하고 있는 강호연감(江湖年鑑) 아시죠? 귀한 약재가 발견되는 것도 기록으로 남기는데, 원래 재작년에 발견되었어야 할 쌍각화사가 강호연감 기록에 없더라고요. 왜 없을까? 누군가 쌍각화사를 몰래 가로채서 꿀꺽한 걸까? 그 누군가가 쌍각화사의 양기와 독기를 이용해 철사장을 속성으로 연마했다면….”
“허허,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군. 원래 강호연감에 기록되어야 할 기연이라니?”
제천대살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지만, 실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처음 보는 여인의 입에서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인정 안 하셔도 상관없어요. 어쨌거나 이런 사소한 정보들이 모여 하나의 추론이 모습을 갖춰 갔고, 그걸 근거로 저희 조사가 시작된 거예요. 당신이 하도 은밀히 살아온 탓에 정보를 모으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서… 알아낸 것이 있나?”
제천대살의 눈빛에서 노골적인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결국 몇 가지 알아냈어요. 반복되는 기연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무공 성취. 그 사이 강호연감에서 사라진 몇몇 기연들과 일치하는 동선. 확신할 순 없었지만 심증이 가기 시작했죠.”
“계속해봐라.”
“우린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래서 이번 작전을 설계한 거예요. 당신 제천대살에게 철포대사의 암살을 의뢰하는 작전을.”
“이번 일을 의뢰한 것이 너희였다고?”
“그래요. 미끼를 던져본 거예요. 철포대사는 초절정의 고수이고 금강불괴에 가까운 단단한 호신강기로 유명하죠. 당신의 실력으론 감당하기 힘든 고수. 과연 의뢰를 받아들일까?”
제천대살은 독사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당신은 자신 있게 의뢰를 받더군요. 왜일까요? 맞아요. 당신은 철포대사의 호신강기를 파괴할 무기가 있는 곳을 알고 있던 거죠. 이곳에서 불과 삼십 리 떨어진 솔밭에 수백 년간 잠들어 있던 전설의 귀면비 말이에요.”
“허허, 이거야 원. 맞다. 나는 조금 전 귀면비를 손에 넣었지. 이쯤 되니 너희가 오히려 의심스럽구나. 어떻게 너희가 귀면비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거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이미 구부 능선을 넘었다는 게 중요하죠. 아직 마지막 절차가 남긴 했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당신은 바로….”
극적인 효과를 바라는 건지 여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
파르르 떨리는 제천대살의 눈빛.
과연 저 예쁜 입술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그 단어가 튀어나올까?
“회귀자(回歸子)!”
그 말에 마법이라도 걸려있던 것 같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제천대살은 곧바로 손을 썼다.
번개 같은 속도로 찻잔을 집어 여인에게 날린 것이다.
휘리릭~ 퍼엉!
찻잔은 화살보다 빠르게 날았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다.
철포대사가 재빨리 장력을 날려 찻잔을 박살 냈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제천대살도 이미 예상했던 것.
주저 없이 방향을 바꿔 철포대사를 향해 철사장을 갈겼다.
콰아앙!
장력과 장력이 부딪치는 충격에 암자의 기와장이 흔들렸다.
엉거주춤 뒤로 밀려난 제천대살이 철포대사를 노려봤다.
독기를 뿜는 자신의 철사장을 상대하고도 여전히 담담한 표정인 데다, 어쩐지 몸집이 조금씩 커지고 있는 듯했다.
과연 초절정의 고수다운 모습.
귀면비가 있으니 겁날 건 없지만, 단숨에 제거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혹시 숨어있는 적이 더 있다면 낭패인데….
어떡한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비밀을 알아챈 저들은 반드시 해치워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전.
그래, 오늘만 날이 아니다.
빠르게 눈알을 굴려 주위를 살핀 후 행동을 개시했다.
발로 찻주전자를 걷어차니 찻물이 쏟아져 나오며 암기처럼 여인에게 날아갔다.
여인이 흠칫 놀라며 뒤로 피하는 사이, 즉시 양손을 뻗어 철포대사를 공격했다.
좀 전보다 더 강력한 철사장.
철포대사는 즉각 장력을 마주 날릴 수밖에 없었는데….
콰아아앙!
제천대살은 장력이 부딪치는 반동을 이용해 몸을 뒤로 날리더니, 그대로 창문을 뚫고 도망쳤다.
쏜살같은 속도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
“이야, 도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치네요.”
“이렇게 그냥 보내도 괜찮은 걸까? 내가 혼자 상대해도 얼추 이길 수 있을 것 같던데.”
철포대사로 변장했던 면구를 벗으며 광군영이 물었다.
“됐어요. 진법을 깔아뒀으니 삼 단계 장소로 가게 될 거예요. 게다가 대장이 뒤를 밟을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뭐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아까는 왜 그렇게 길게 이야기한 거야? 그냥 ‘회귀자’라는 단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만 살펴보면 되는 거였잖아?”
“호호호, 오랫동안 추적해온 제천대살과 몇 마디 나눠보고 싶기도 했고, 실은 이야기하는 도중 몰래 섭혼술을 시도해봤어요. 혹시라도 성공하면 일이 편해지니까요.”
“결과는?”
“알면서 뭘 물어요? 실패했죠 뭐. 회귀자라 그런지 최면에 대한 방어력이 만만치 않더군요.”
여인, 소영영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남은 일은 청보와 대장이 처리할 테니 우리는 이만 철수해요. 아, 뒷방에 가둬 둔 철포대사 수혈 풀어주는 거 잊지 말고요.”
잠시 후.
암자를 나오는 광군영과 소영의 표정이 밝았다.
몇 시진 전 제갈윤이 그랬던 것처럼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천대살 체포작전, 이 단계 확인 완료.